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처음 서울에 온 북한 적십자대표 (3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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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처음 서울에 온 북한 적십자대표 (3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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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서울에 온 북한 적십자대표 (39회)

  제6장 멕시코 올림픽과 고교야구




처음 서울에 온 북한 적십자 대표


1972년 9월, 북한 적십자 대표 일행 54명이 서울에서의 적십자회담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실황을 중계방송하기 위해 나는 판문점으로 향했다. 


남과 북이 지금은 금강산이다, 개성공단이다, 경제회담이다, 체육관계 회의다 하면서 빈번하게 교류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양 쪽의 만남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 힘든 상호 방문의 문을 양쪽 적십자사가 열었다. 1972년 8월에 우리 적십자사 대표 54명이 북한에 가서 회담을 했고, 한 달 후인 9월에는 서울에서 2차회담이 열려 북한 대표단이 남한에 첫발을 디딘 것이다. 


TV방송 3사에서는 합동 중계를 하기로 하고, 남쪽으로 판문점을 넘는 실황은 KBS가 담당하여 강창선 선배가 중계방송을 했으며 북한대표단이 돌아갈 때는 TBC가 방송을 담당하기로 하여 내가 판문점으로 향했던 것이다. 


내 고향 장단(長湍)에 있는 판문점을 장단 사람들은 ‘널목리’ 또는 ‘널문리’라고 부르는데, 그때는 그렇게 자주 갈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임진강 위에 놓인 ‘자유의 다리’를 넘어, JSA(공동경비구역) 유엔군 측 체크 포인트를 지나 판문점까지 가노라면 공연히 으스스한 분위기마저 느껴질 때였다. 


임진강을 지나 왼쪽으로 내 고향 도라산을 바라보면서 JSA를 거쳐서 판문점에 도착하니, 남과 북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기자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방송준비를 위해 여기저기 왔다갔다하고 있는데, 북한 기자 한 사람이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선생, 잘 보고 있습네다.”

하는 것이 아닌가. 

“네?”

하고, 내가 무슨 말인지를 몰라 의아해 하자

“선생 모습, 개성에서 자주 보고 있습네다. 어젯밤에도 봤디요.” 

하면서 남쪽 TV를 북쪽에서도 보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것은 북한 대표단에 대해 잘 방송하라는 일종의 공갈이었다. 마침내 나의 중계방송이 시작됐는데도, 그 북한 기자는 내 옆에서 얼쩡거리며 연신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시늉을 보이고 있었다. 


북한 대표들이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간단한 수속을 하고, 북쪽 문을 거쳐 판문각(板門閣)으로 올라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사라지자 나의 중계방송이 끝이 났다. 나는 그때서야 생각이 나, 그 북한 기자를 찾았더니 어느 틈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장단에서도 널목리 막걸리는 아주 유명해서 장단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벌판 끝 개성사람들도 즐겨 찾는 술이다. 방송도 끝나고 해서, 내게 은근한 압력을 가하던 그 친구와 널목리 막걸리라도 한잔 하려고 했는데, 기회를 놓치고 말아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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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에서 중계방송을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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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


날아가버린 비들기

                            박종세


하얀 비들기가 날아갔다. 그것도 보통 비들기가 아니고 공작비들기, 한 마리도 아니고 한 쌍인 두 마리가 몽땅 날아갔다. 


“아니 어쩌다가 날려 보냈어요?”

“.......”


식구 중에 아무도 대답을 하는 이가 없다. 사실 대답할 말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비들기가 우리 집에 날아 온지도 일주일이 넘었으니, 풀어놔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한 장본인이 바로 나이고, 그래도 미덥지가 않다고 사흘을 더 기다렸다. 풀어준 것이 식구들이고보면, 내가 누구에게 왜 어쨌느냐고 말한다는 것은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아범이 풀어주라고 하지 않았느냐, 당신이 그러지 않았느냐, 아버지가 그러시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식구는 아무도 없다. 다만 날아간 비들기가 아깝다는 표정이고, 혹시나 집을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만을 하고 있을 뿐, 할 만큼은 했고 오히려 초과 시행했을 뿐이라는 표정들이다. 

  

비들기를 싫어하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평화를 상징하는 비들기, 사랑을 상징하는 비들기, 깨끗함을 상징하는 비들기...... 나는 그 흰 공작비들기를 얻기 위해 고속버스를 타고 몇백리를 달렸다. 그리고 주신 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차례 하고 나서 귀하게 모셔왔다.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왜 그런지 공작비들기만은 꼭 갖고 싶었던 것이다. 

 

집에 가지고 와서는 길을 들인답시고 콩을 사다 먹인다, 사료를 사다 먹인다 하면서 꽤나 애를 썼고, 온 식구가 몸을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물을 입에 대주는 등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모두를 쏟았다. 

       

그러나 그 흰비들기, 공작비들기 한 쌍은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빈 새장과 그 안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먹이들 뿐이다. 


몹시 섭섭했다. 그리고 서운하기도 했다. 또 분하기도 했다. 


그동안 20년 가까이 방송인 생활을 하면서 정성들여 키운 후배, 또 고생하여 한 길을 걸어온, 또 걸어가는 동료, 그리고 나를 아껴주던 선배 비들기들이 내 곁을 떠나기도 하고 떠날 준비를 하기도 한다. 


동기로 같이 아나운서를 시작한 L군은 워싱턴에서 방송국을 만들어보겠다고 동분서주 하고 있고, I군은 역시 미주에서 치과의사로 활약하고 있으니, 방송 일선에서 뛰고 있는 것은 동기 중에서 나 하나만이 남은 셈이다. 내가 못나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잘나서 그런 것일까? 방송이 무슨 매력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좋아하는 때문이며, 내 딴에는 일종의 사명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 미국과 일본에 들러서 만나본 원로 아나운서 몇 사람도 30여년씩 한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해왔고, 발전시킨 공으로 희끗희끗한 머리에 중역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 중에 어떤 이는 중의원 의원으로 최고 득점 당선을 하기도 했다. 정말 부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아이들이 쫓아온다. 


“아빠, 우리 비들기를 발견했어! 우리 학교에 있는 다른 비들기들하고 놀고 있어요. 선생님에게 말해서 잡아올까?”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 비들기, 제 동료를 찾아 날아간 사랑스런 흰빛 공작비들기들이, 말이 통하는 동료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자란 물, 방송 속에서 내 증력이 허락하고 주위에서 밀어주는 한 마지막 정열을 불사르리라 다짐한다. 


- 1975년 3월 중앙사우(中央社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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