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한국의 첫 세계인 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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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한국의 첫 세계인 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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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한국의 첫 세계인 혜초

△ 혜초스님의 서역기행 노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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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세계인 혜초가 후손을 꾸짖다

자고로 한 나라의 위상은 그 나라가 세계성을 지닌 세계인을 얼마나 배출하였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세계인이 많으면 소국도 강국이 되며, 세계에 대한 기여도도 그만큼 높아진다. 세계성이란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삶을 함께하는 정신을 말하며, 이러한 정신을 지니고 실천하는 사람이 곧 세계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정신을 지닌 첫 세계인이 바로 신라 고승 혜초 스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704년께 신라에서 태어난 스님은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중국 광주에 건너가서 천축(인도)에서 온 밀교승 금강지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밀교를 처음 접한다. 스승의 권유로 ‘떠날 때는 100명이나 돌아온 자는 한 명도 없다’는, 그 어려운 천축여행길의 장도에 오른다. 723년에 광주를 떠나 뱃길로 동천축에 도착한 후 온갖 간난신고를 이겨내면서 4년간 인도를 비롯한 서역의 여러 지역을 살펴보고 당나라에 돌아온다. 돌아온 후에는 장안의 명찰들을 전전하면서 주로 밀교 경전의 한역과 필사 및 연구에 전념한다. 말년에는 산시성 오대산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780년 향년 76세로 입적하였다.


인도·서아시아까지 거쳐

혜초 스님은 낯선 이역땅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속에 생생하게 엮어냈다. 1300년 전에 씌어진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불과 96년 전의 일이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중국 돈황막고굴 제17동(일명 장경동)에서 우연히 책과 저자의 이름, 그리고 권두와 권말이 떨어져 나간 한 잔간 사본을 발견했는데, 지난 90여 년간의 줄기찬 연구 끝에 오늘날에 이르러 책명과 저자명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 저자의 약력과 여행기 내용 및 여행노정 등 기본적인 내용에서도 적잖은 연구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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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천축의 마하보디 득도처 대탑 앞을 지나는 혜초스님 (디지털 복원) 

지금 남아있는 여행기는 원본이 아니라, 3권짜리 원본을 간추린 절략본의 사본이다. 발견할 때는 9장의 황마지(黃麻紙)를 이어붙인 길이 358㎝, 너비 28.5㎝의 앞뒤가 잘려나간 두루마리 잔간으로서, 마모되어 확인할 수 없는 자까지 합치면 글자수는 약 6300자(227행×28자)로 헤아려진다. 그리고 잔간과 기타 관련자료들을 참고해 보면, 원 절략본의 분량은 1만1300여 자(405행×28자)로 추산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잔간은 절략본의 절반을 약간 넘는 분량인 셈이다. 그나마도 다행스러운 것은 절략본의 앞뒤(1권 전부와 3권의 뒷부분)만 잘려나가고 핵심부분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여행기의 주요내용은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스님이 여행기에서 기록한 내용의 대부분은 직접 목격한 것이지만, 일부는 얻어들은 것도 있다. 또한 거개가 한 나라를 단위로 해서 기술했지만, 간혹 한 지역을 개괄해서 서술한 경우도 있다. 나라에 따라 기술한 내용이나 분량은 좀 다르지만, 대체로 출발지에서 목적지로 가는 방향과 소요시간, 왕성(치소)의 위치와 규모, 통치상황, 대외관계, 기후와 지형, 특산물과 음식, 의상과 풍습, 언어, 종교 특히 불교의 성행상황 등을 순차적으로 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내용 중에는 전후 다른 여행기들에서 언급된 것도 있지만, 독특한 것도 적지 않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현존 잔간에 5언시가 다섯 편이나 실려있다는 사실인데, 이로써 다른 여행기들과는 달리 ‘서정적 여행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4대 여행기 중 가장 일러

스님의 길고도 험난한 여행노정은 잔간의 기술에 따라 추적할 수 있다. 그는 바닷길로 광주를 떠났는데, 잔간의 앞부분(1권)이 결락되어 동천축에 상륙할 때까지의 노정은 미상이다. 상륙한 후 석가의 열반처와 녹야원 등에 있는 4대 성탑을 순례하고 중천축에 이르러서는 급고원탑 등 4대 영탑을 둘러본다. 그리고는 3개월간 걸어서 남천축(현 데칸고원 지방)에 갔다가 다시 3개월간의 발섭(跋涉) 끝에 서천축을 지나 북천축의 수도 잘란다라에 당도한다. 여기서 간다라와 카슈미르 등 주변의 여러 지방을 다녀온 뒤 서북행으로 토화라(현 아프가니스탄)를 찾아간다. 이곳에 얼마간 머물러있다가 실로 모험의 길일 수밖에 없는 생소한 이슬람 세계로의 서행을 택한다. 드디어 한달 열흘만에 여행의 서쪽끝인 대식(大食: 아랍) 치하의 페르시아 땅 니샤푸르에 종착한다. 귀로에는 다시 토화라를 거쳐 험준한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 당의 안서도호부가 자리잡고 있는 구자(현 쿠차)에 도착한다. 그때가 광주를 떠난지 4년이나 지난 727년 11월 상순이다. 그후 언기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왔는데, 언기 이하 부분은 잘려나가 구체적 노정을 알 수 없다.


땅길과 바닷길 모두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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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오천축국전> 잔간이 발견된 돈황 막고굴 전경 

혜초스님의 서역기행은 분명 희세의 거룩한 장거이며, 그 기록인 <왕오천축국전>은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이자 우리의 국보급 진서이고 불후의 고전으로서 커다란 문명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의미는 우선 문명교류사에서 개척자적, 선구자적 구실을 수행했다는 데 있다. 중국을 포함해 동양에서 그에 앞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한 사람은 없었으며, 더욱이 아시아 대륙의 서쪽끝까지 다녀와서 현지 견문록을 남긴 전례는 없다. 스님보다 약 100년 전에 도축구법한 현장은 육로로 갔다가 육로로 돌아왔으며, 역시 약 50년 전의 의정도 바다로 갔다가 바다로 돌아왔다. 도축구법의 거장들로 꼽히는 이 두 당승은 기껏해야 토화라(현장)까지 이르렀을 뿐, 그 서쪽땅은 밟지 않았으니 그곳에 관한 기록을 남길 리는 만무하다. 스님이 문명교류사에 남긴 다른 하나의 업적은 동양 밀교의 발전에 창도적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중국 밀교의 개조인 인도승 금강지를 사사하고, 또 그의 제자인 불공의 문하생으로서 중국에 돌아온 후 50여 년간 밀교 교리의 한역과 연찬 및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중국 밀교의 6대조가 되었다.


“파미르고원 언제 넘나” 서정적

스님의 서역기행과 그 기록은 이러한 문명교류사적 의미와 더불어 우리 민족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겨놓았다. 6세기 전반 중천축에 다녀온 백제의 겸익을 비롯해 불교의 최고전당인 나란다사에 늘 몇 명씩 상주할 정도로 한승들의 도축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혜초스님처럼 견문록을 남겼거나, 더욱이 대식 같은 미지의 세계를 탐방한 사람은 없다. 이렇듯 그는 명실상부한 한국의 첫 세계인으로서 한민족의 얼과 넋, 슬기를 만방에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신라)으로 날아가리 /.’ 남천축을 향한 길에서 읊은 이 절절한 향수의 5언시는 그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얼을 대변한다. 귀로에 험준한 파미르 고원을 바라보면서 ‘찬바람 땅이 갈라저라 매섭게 부는구나 / …불을 벗 삼아 층층 오르며 노래한다마는 / 과연 저 파미르 고원을 넘을 수 있을는지’ 라고 읊조린 5언시 한 수는 그의 당찬 도전과 낙천의 넋을 여실히 보여준다. 밀교승 불공이 제자 6명 중 스님을 두 번째로 지목하고, 스승이 입적했을 때 황제에게 올리는 감사문을 그가 대필했으며, 대종 때 심한 가뭄이 들어 지낸 기우제를 그가 주관했으며, 약관에 혈혈단신으로 이역땅을 누비며 기록을 남긴 사실 등은 그의 출중한 기량과 글재주, 의지와 용맹,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정신을 그대로 말해준다. 이러한 얼과 넋, 슬기로 우리 겨레의 세계정신을 선양함으로써 후대의 지봉 이수광과 혜강 최한기, 구당 유길준으로 이어지는 우리네 세계인의 원형을 일찌감치 창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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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중국 서안시 주지현에 세워진 ‘신라국혜초기념비’ 

스님의 여행기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오도릭의 <동유기>, 이븐 바투타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와 함께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로 꼽힘에 하등의 하자가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여행기다. 이것만으로도 여행기는 높은 문명사적 가치를 지닌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이라고 긍정할 수 있다. 동서양 학계에서 공히 인정하다시피 여행기는 내용의 다방면성과 정확성으로 말미암아 8세기 당시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으뜸가는 진서로 인정받고 있다. 스님은 고국 신라에서 연마한 시재를 멀리 서역 땅에서 남김없이 발휘하여 ‘느끼는 여행’을 함으로써 그의 여행기는 시가 있는 ‘서정적 여행기’로도 읽힌다. 그래서 여행기는 역사서이면서 문학서이기도 하다.


후학 복원·연구 분발 절실

이 세계적인 명저가 지니고 있는 진가에 비추어 볼 때, 그 연구성과는 아직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스님의 고향나라인 한국에서의 연구는 부끄러울 정도로 뒤진 상태다. 분발에 분발이 요청된다. 당면 과제는 잔간에 공백으로 남아있는 160여 개의 결락자와 이론이 많은 100여 개의 글자와 문장을 제대로 반듯하게 복원하는 일이다. 이와 더불어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스님과 그의 여행기가 지닌 민족사적 업적과 세계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평가하여 온전한 ‘혜초 평전’도 펴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위대한 한국인’을 기리는 일에도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편취 당한 채 저 멀리 무연고지인 프랑스 파리의 한 도서관에 유폐되어 있는 이 국보의 반환을 촉구하고, 국보뿐만 아니라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추진하며, 아늑한 서산 기슭에 사적비를 세우는 등의 기념사업에도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선현에 대한 우리의 불초를 씻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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