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진취적인 고구려의 교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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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진취적인 고구려의 교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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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진취적인 고구려의 교류상



△ 각저총의 씨름도와 모사도 (4세기 말, 위책 3, 101쪽과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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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안거치고
서역과 직교류
선진문화 창달


지난 7월 초 중국 쑤저우에서 열린 제2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재되었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그나마도 다행이다. 이 등재를 둘러싸고 우리가 유네스코와 몇 년 동안 줄다리기를 벌이다가 가까스로 등재를 성사시켰지만, ‘완승’은 아니고 ‘반판승’이다. 우리의 문화유산 절반을 중국에 빼앗긴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역사의 상실이다. 이를 묵과하거나, 이에 안주해서는 안되며, 분발해서 응분의 역사적인 몫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원래 한 나라의 문화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 목록에 등재하는 것은 그 문화유산의 보편주의적 가치를 공인하고 공유하려는 데서 나온 발상이다. 그러나 이 숭고한 이상이 때로는 괴변의 볼모로 엉뚱하게 이용당하고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고문서를 우리는 돌려달라고 하나, 상대는 그 유산이 한국이라는 특정 국가의 독점물이 아니라, 인류에게 보편적 가치를 지닌다는 그럴싸한 구실을 내걸고 앙탈을 부린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 중국은 ‘고구려 수도, 귀족과 왕족의 무덤’이란 앙큼한 이름으로 우리네 문화유산을 따로 등재하고는 여러 가지 감언이설로 그 합법을 강변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역사적 변조와 정치적 패권주의의 얄팍한 속내가 깔려있음은 불보듯 뻔하다. 그 어디에 있던간에 문화유산의 진정한 주인은 그 창조자다. 자국 박물관의 유물이 비는 것을 꺼리거나 역사의 변조에 안달나 남의 유산을 사취하는 것은 역사의 반역이다.

특정 문화유산의 보편주의적 가치는 그 문화의 교류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자생성과 모방성이란 근본속성으로 인해 문화는 불가피하게 서로 교류되며, 그 교류과정에서 비로소 모두에게 공유되는 보편주의적 가치가 창조되는 법이다. 따라서 교류를 떠난 문화유산의 보편주의적 가치란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인류에게 보편주의적 가치를 선사할 수 있는 세계적 문화유산을 수두룩하게 가지고 있다. 그중 고구려 문화유산이 가장 뛰어나거니와, 그 가운데서도 고분벽화는 가히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해명에서 벽화가 지닌 의미는 각별하다. 기록은 기록자에 의해 실상이 가감될 수 있지만, 벽화만은 그대로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벽화를 보유한 민족은 ‘핵무기를 보유한 민족보다 훨씬 위대하고 강하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 우리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그러한 민족 가운데 하나다.


앞트임 복식·천마상 입증
씨름도엔 매부리코 서역인
간다라 영향받은 수렵장면도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벽화고분은 95기에 달한다. 그중 오늘날 중국 영토 안에 있는 것이 24기이고, 나머지 71기는 모두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녘 땅에 널려있다. 3세기 초부터 7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이 고분들에 그려진 벽화는 주제에 따라 대체로 인물풍속도, 장식무늬도, 사신도의 3개 발전단계로 구분되는데, 모두가 고구려인들의 혼이 간직되고 사상과 생활모습이 담겨진 귀중한 예술작품이며 역사자료다. 벽화의 이러한 주제 변화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것이다. 이 벽화들의 주제를 통해 우리는 인류공동체 속에서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 구성체로서의 고구려가 보여준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교류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교류상은 멀리 서역과의 교류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벽화에서 보다시피 고구려인들은 서역인들과 같은 유형, 즉 카프탄(앞트임)형의 복식을 입고 있었다. 이 형식은 고대 아시아 유목기마민족의 복식에서 시작되어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포함한 서역 일원에서 널리 유행하다가 마침내 범아시아적인 전통복식으로 정착되었다. 그 공통적인 기본형식은 앞이 트여 앞면에서 여미고, 앞면이나 길, 소매가 직선으로 재단되며, 섶과 깃, 무가 첨가되고 거기에 다른 색의 천으로 단을 두르는 가연법(加緣法) 등을 쓴다는 데 있다. 실로 아우름이 돋보이는 일례다. 치포 같은 중국인들의 전통복식은 이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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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암법으로 그린 수산리고분의 기단부와 모사도 (5세기 후반, 위책 3, 198쪽)  

다음으로, 벽화에 나타나는 각종 동물 관련 소재는 대부분 기원을 서역이나 북방 유목기마민족문화에 두고 있다. 덕흥리 고분의 전실 천정에는 머리쪽에 ‘천마의 상’이란 글자가 새겨진 천마가 하늘 세계로 날아오르고 있다. 무용총이나 안악1호분에서도 비슷한 천마 그림이 발견된다. 5세기 초 고구려에 정착된 이 천마사상은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 신라에 전파되어 경주의 천마총에서 재현된다. 천마 같은 신성한 동물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동물의 수렵도나 투쟁도도 적잖게 눈에 뜨인다. 흥미로운 것은 살생을 금하는 불교적 세계를 묘사할 때 수렵장면이 등장한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수렵을 내세관이나 극락왕생을 표현하는 중요한 주제로 삼은 초기 인도 간다라 석조미술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특히 사신도 가운데 하나인, 뱀이 거북을 감고있는 현무도는 서역에 기원을 둔 신성한 동물간의 투쟁에 뿌리를 둔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벽화에 나타나는 이색적인 서역인상은 그들에 의해 이루어진 서역과의 인적 교류를 말해준다. 안악3호분의 수박(手搏:손잡고 겨루기)도와 각저총의 씨름도에서 고구려인과 겨루는 상대는 큰 눈과 높은 매부리코를 지닌 서역인임에 틀림없다. 그림 속의 서역인은 우리가 흔히 절에서 보는 수호 담당의 사천왕이나 역사상 등의 험상궂고 우락부락한 상징적 존재와는 달리, 평범한 생활 속에서 겨루기를 즐기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는 곧 서역인이 고구려땅에 와서 함께 살며 서로의 문화를 주고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같은 시기의 북중국 벽화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으로서, 고구려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서역과 직접 교류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중국보다 명암법 일찍 도입

다원적 문화 개방적 수용

인류공동체 보편가치 승화


고구려 벽화에서 특기할 것은 명암의 대비나 변화를 통해 그림의 효과를 노리는 이른바 명암법(일명 음양법)을 중국보다도 일찍이 서역으로부터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5세기 후반의 수산리고분에서 보면 인물들이 딛고 서있는 기단부를 사각형의 구획으로 나누고 흑백색을 엇바꾸어 사용함으로써 입체감을 돋우어준다. 강서대묘의 사신도가 그토록 생동감 넘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화법을 썼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6세기부터 주로 불화를 그리는 데 이 화법을 사용했는데, 명암으로 오목함과 불룩함을 나타낸다고 하여 요철화법(凹凸畵法)이라고도 하였다. 7세기 초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은 종이와 붓, 맷돌을 가지고 일본 법릉사에 가서 이 화법으로 불화를 그려 일본 화단을 놀라게 하였다.


끝으로, 고구려 벽화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몇 가지 무늬도 알고보면 서역에서 들어온 것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연꽃무늬인데, 연화총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에는 벽화뿐만 아니라, 건축장식에까지도 이 문양이 널리 쓰이고 있다. 원래 연꽃무늬는 기원전 4900년께의 고대 이집트에서 첫선을 보이는데, 연꽃은 재생과 불멸의 상징성을 지닌 행운의 꽃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기원전 7세기께부터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이집트와 인도간에 교역이 시작됨에 따라 희거나 푸른빛을 띤 이집트의 수련(睡蓮)과 붉은 인도의 홍련(紅蓮)이 서로 교류된 뒤 인도에서 불교가 흥기하자 이 꽃의 상징성이 불교의 교리와 부합되기 때문에 불화나 대표적인 불교 공예무늬로 발전하였다. 이후 불교가 전래된 한반도 3국 중에서는 고구려가 제일 먼저 장식무늬로 받아들여 벽화나 와당, 불상 등을 특색 있게 꾸몄다. 고구려의 연꽃무늬는 이집트나 인도의 그것에 비해 상징성보다 장식성이 더 강한 것이 특징이다.


강서대묘와 집안5호분의 벽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당초문(덩굴무늬)이나 팔메트무늬도 서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어울려 산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당초문은 주로 좁고 긴 벽면의 공간을 메꾸는 장식무늬로 사용되었다. 팔메트무늬는 종려 잎과 비슷한 부채꼴이나 손바닥 모양의 식물무늬로서 축을 기점으로 한 좌우대칭적인 구도가 특징인데, 이것은 전형적인 고대 유럽의 장식무늬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의 영상매체에 맞먹는 벽화의 생생한 몇 가지 화면을 통해 고구려의 진취적인 교류상을 살펴봤다. 고구려는 명실공히 대제국답게 세계를 향해 가슴을 열고 세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기원과 계통을 달리하는 당대의 다원적인 선진문화를 수용한 뒤 그것을 ‘고구려문화’라는 용광로 속에 용해시켜 특유의 선진문화를 창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더욱 완숙시켜서 이웃에 전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의 대중국 교류는 인접한 한 나라와의 유무상통이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한 교류상을 갖췄기에 고구려의 당당한 국제성과 고구려 문화유산의 보편주의적 가치가 비로소 공인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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