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이순신 수군 부활 프로젝트 관리자 0 3550 0 2018.09.20 15:45 육군서 수군으로 옮긴 충무공, 고흥 도화면서 18개월간 근무郡, 지역주민에 명예관직 부여 “선조업적 계승해 자긍심 키울것”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에 있는 발포 해안성(진성) 내에 세워진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사당인 충무사. 각종 문헌기록을 보면 전남 고흥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장수 144명 가운데 33명(23%)을 배출한 고장이다. 반도인 고흥은 동쪽으로 순천만과 여수를, 서쪽으로 보성만과 보성·장흥을, 남쪽으로는 남해바다를 접하고 있다. 조선시대 고흥의 지명은 흥양(興陽)이었다. 고흥에 이순신 장군의 부하 장수가 많은 이유가 뭘까?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12년 전인 1580년 지금으로 보면 육군에서 해군으로 근무를 옮긴다. 해군으로 옮긴 이후 처음으로 받은 직책이 고흥 도화면에 있는 발포진 만호였다. 만호는 지금으로 말하면 중대장이다. 이순신 장군이 발포 해군기지 중대장으로 임명된 것. 이순신 장군은 발포 만호로 18개월 동안 근무하며 해군 제독으로서의 역량과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마음을 키웠다.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지금으로 보면 제독에 해당하는 전라좌수사에 임명된다. 당시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영은 5관 5포를 관할했다. 5관은 5개 자치단체인 여수, 순천, 광양, 고흥, 보성이다. 5포는 5개 해군기지로 여수 돌산(방답진)과 고흥 영남면(사도진), 점암면(여도진), 도양읍(녹도진), 도화면(발포진)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관할하던 해군기지 5곳 중 4곳이 고흥에 있어 임진왜란 7년 전쟁 기간 부하 장수들과 군졸들 중에 고흥 출신이 많았던 것.이순신 장군이 만호로 근무했던 고흥군 도화면에는 왜적을 대비한 해안성, 해군기지 등 의 각종 유적이 남아있다. 또 고흥 곳곳에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정운, 김인영, 배흥립, 송여종 등 부하 장수들이 첨사(현재 대대장), 만호로 근무한 흔적들도 있다. 현재 고흥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부하 장수들의 제사를 일 년에 네 번 지내고 있다. 고흥군은 무향의 고장답게 이순신 장군의 수군을 다시 부활시키는 조례를 입법예고했다. 조례 명칭은 1관(흥양읍)과 4포의 관직을 되살리는 ‘고흥군 조선시대 흥양수군 관직계승’이다. 조례에 따라 주민들 가운데서 지금의 행정기관 격인 1관의 흥양현감과 4포의 첨사·만호를 임명하기로 했다.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에 대한 기념관 등 각종 시설(하드웨어) 측면이 아닌 이야기(소프트웨어)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관직 계승자는 1관 4포 해당 마을 주민들의 추천에 따라 군수가 임명하는 명예직으로 임기는 2년이다. 현감, 첨사, 만호 임명자는 조선시대 장군 복장을 입고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임진왜란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한다. 또 이순신 장군 제사 제례 등에 주빈으로 참석한다. 이들 현감, 첨사, 만호 임명자는 현재 공무원 임용보다 더 까다로운 규정으로 선발한다. 현감, 첨사, 만호 임명자 밑에는 군관 1, 2명을 둘 방침이다. 군관들은 일정 수당을 받고 유적지 보전, 관리 등의 업무를 맡게 된다. 고흥군은 전라좌수영 당시 5관이었던 여수, 순천, 광양, 보성과 함께 가칭 ‘전라좌수영협의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임진왜란 역사 복원 등을 공동 추진하자고 제안할 방침이다. 또 여수 거북선 축제 참여는 물론이고 경상도 지역에 승전·위령비 등을 건립할 계획이다. 고흥군 관계자는 “조례 제정은 관광 활성화 못지않게 이순신 장군의 수군 재건을 통해 선조들의 위대한 업적을 후대에 계승하고 주민들의 자긍심을 키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고흥에는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 기념시설로 조선과 명나라 수군이 첫 합동작전을 벌인 거금도(절이도) 해전기념관, 임진왜란 해전기념관이 조성되고 이순신 평화공원과 백의종군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수군전력은 고흥사람들이었다. - 임진왜란과 전라좌수영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 남해안 방어는 전라도 지역은 강진에 병영,여수에 좌수영,해남에 우수영, 경상도 지역은 울산에 좌병영,진주에 우병영,동래에 좌수영,거제에 우수영이 있다. 전라좌수영 관할 5관(육지행정)은 순천도호부, 낙안군, 보성군, 흥양현, 광양현이고 5포(수군행정)은 사도진, 방답진,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 등이 있다. 5관5포는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 재해권을 장악하여 왜군을 격파하고 국난을 극복하는 원동력이었다. 이중 발포진은 충무공 나이 36세인 1580년 발포만호로 수군으로는 최초 발령지이다.이곳에서 18개월을 재임했다. 구분지역지휘관(벼슬)관할구역5관(육지행정구역)순천도호부부사(종3품)여수시,순천시 일원광양현현감(종6품)광양시 일원낙안군군수(종4품)보성군 벌교읍 순천시 낙안면보성군군수(종4품)흥양현현감(종6품)고흥권 일원, 여수 삼산면5포(수군행정구역)방답진첨사(종3품)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사도진첨사(종3품)고흥군 영남면 금사리여도진만호(종4품)고흥군 점암면 여호리녹도진만호(종4품)고흥군 도양읍 봉암리발포진만호(종4품)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임진왜란시 전라좌수영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우선 이순신의 장계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옥포파왜병장>,<견내량파왜병장>,<부산파왜병장>에 그 이유가 잘 남아 있다.옥포해전에서 부상자 1명, 당포해전에서 전사자 13명 부상자 37명, 견내량 해전에서 전사자 19명 부상자 110명,부산포 해전에서 전사자6명 부상자 25명으로 모두 211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들을 수군진 소속별로 보면 흥양수군 39명(전사6,부상33), 사도수군 34명(전사4,부상30), 여도수군29명(전사6,부상23), 녹도수군 16명(전사4,부상12), 발포수군13명(전사2,부상11)순이다.총211명 사상자중 고흥수군은 131명(전사22명,부상109명)으로 전체 62%를 차지 하였다.그만큼 임진왜란에서 고흥수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으며 고흥수군이 전라좌수군의 정예부대였음을 의미한다. 1관 4포가 고흥지역에 위치하여, 특히 수군전력의 핵심인 5포중 4포가 고흥에 있어 주도적으로 해전승리를 이끌었다. 고흥수군이 최적의 전투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전라좌수영의 전력은 해전에 동원된 인력과 물력이 모두 지역에서 마련되었다는 점이다.수군 특성상 선상위의 경험과 항해시 물길, 풍랑 대처, 배멀미등 전선의 격군(노를 젓는 사람)과사부(활을 쏘는 군사)등 실전에 수행할 병력도 현지 원주민들이었다는 것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다. 수군 전력은 고흥사람들이었다. 여기에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이 발포만호를 지내 전술과 전력 등 지략을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객사 뜰에 서 있는 오동나무를 가야금으로 사용하려고 베어 올리라는 명령을 거부해 첫 파직을 당한 곳이다, 발포 마을 가운데 느티나무 밑에 ‘충무공이 머무신 곳’을 기념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그 탑에 “저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나라의 물건은 사사롭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수군의 직책은 선장, 포도장, 사부, 포수, 격군, 타공으로 나누어져 있다.선장은 배의 지휘관으로서 군선과 수군을 통솔하며, 포도장은 선내의 치안과 질서를 담당한다.사부는 활을 쏘는 군사이며,포수는 승자총통을 쏘는 군사이다. 격군은 노를 젓는 사람으로 노군이나 농노문이라도 하며,타공은 키를 조정하는 사람이다. 고흥수군의 장수들은. 판옥선을 만들었고 이순신과 함께 각종 해전에 참여한 정걸(1514~1507)아우 송희립과 함께 이순신 휘하에서 해전에 참여하고 의병을 모집한 송대립(1550~1597),임진왜란 당시 녹도만호 정운의 군관으로 영남지역 원병파병을 주장하고지도만호로 이순신휘하에서 활약한 송희립(1553~1623),통제사 이순신의 선봉장 신여랑(1564~1593),이순신 휘하에서 중군으로 당포 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진무성(1566~미상),진도군수로 명량대첩에 큰 공을 세운 송덕일(1566~1616), 정운(1543~1592)등이다. 정운장군은 영암사람으로 성품이 강직하여 관직에 오래있지 못해 재주를 애석하게 여긴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녹도만호로 부임해 갑옷, 전선, 노등 병기를 손질하고 전선을 건조하고 군마를 잘 보살피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임진왜란 당시 원균이 전라좌수군의 출병을 요청 할 때 일부 장수들이 관할지역을 들어 출전을 거부 할 때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과 어영담은 출전을 원하였다. 당시 정운은 “영남도 우리 땅이고 호남도 우리땅이니...지금 적은 호남을 침범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이때에는 급히 병사를 이끌고 반격하여 한편으로는 호남을 지키고 한편으로는 영남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라고 출병을 원하였다. 이순신이 이끌던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 해전에 참여하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정운은 옥포해전에 큰 전과를 올리고 부산포해전에서 선봉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했다.그는 전투중 “나의 죽음을 적이 알지 못하게 하라”라는 말을 남겼으며, 이순신은 그의 순국소식을 듣고 “오른팔을 잃었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보성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안방준(1573~1654)은 <부산기사>에 “국가의 보전이 호남의 보전에서 연유 하였고, 호남의 보전은 순신의 수전에서 연유 하였고,순신의 수전은 녹도만호 정운이 앞장 선데서 나온 것“이라고 평했다.지금 녹동 쌍충사에 손죽도 전투의 (1587년,정해왜변) 명장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과 모셔져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