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書院)의 기원과 기능 관리자 지식 0 3591 0 2018.07.30 17:14 ※ 서원의 기원우리나라에 서원이 설립된 것은 1542년이었다.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 선생은 안향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안향 선생이 학문을 하던 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설립하였다. 안향 선생은 중국의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최초의 학자였다. 주세붕 선생이 세운 최초의 서원은 ‘백운동서원’이라 칭했지만, 퇴계 이황 선생에 의해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퇴계 선생을 비롯한 위대한 학자들에 의해 서원의 보급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명종대에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대에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에는 전국에 700여개소에 이르렀다.서원의 기원에 대해서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형태는 송나라 때에 와서 완성되었으며, 특히 서원의 위상은 주자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자는 성리학을 완성한 학자로 동양사회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큰 사람이다. 조선시대에는 주자가 완성한 성리학을 모든 선비들이 배웠으며, 관리가 되기 위한 과거시험에서도 주자의 학문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서원의 기능 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며 지역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서원은 교육기능과 교화기능을 주축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 중기 사대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이다.먼저 교육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 있어서의 교육의 목표는 인품이 훌륭한 성현을 본받고 관리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다른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중심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사서와 오경을 모두 익힌 다음에는 『가례』『근사록』과 같은 성리학에 관한 지식을 배우도록 했다.정치적 혼란으로 중앙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서원이 설립되었던 까닭에 ‘성현을 본받는다’는 교육목표는 초기의 서원교육에서 특히 중요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학문의 진정한 의미는 인생과 우주의 본질을 추구하고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그 뒤 서원에서 공부한 선비들이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과거준비를 위한 교육도 동시에 강조되었던 것이다.서원의 또 한 가지 기능인 교화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인물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자를 비롯하여 사성(四聖)과 십철(十哲), 그리고 우리나라 18현 및 송대의 6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은 사학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수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등을 배향한 서원이 가장 많았으나 배향인물의 선택 폭에 있어서는 국가에 의해 정해진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훨씬 넓었다.한편 국립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서원에서도 봄과 가을에 걸쳐 일 년에 두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일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았던 관계로 그 날짜를 석전보다 뒤로 하였다. 즉, 석전이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는 데 비하여 서원의 제사는 중정일(中丁日) 또는 하정일(下丁日)로 잡아 거행함으로써 그 격을 구분하였다.선현을 제사하는 기능 이외에도 서원은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다. 즉, 지방의 인재들이 모이는 집회소였으며, 학생들의 학문을 위해 다양한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과 책을 출판하는 기능도 담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서원에는 ‘장판각’ 또는 장판고라는 서고가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서원은 지방의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서원에서는 그 지역의 여론을 이끌어 나갔음은 물론, 각 지방별로 설치된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을 성토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서원에는 다양한 유교문화가 존재하며 각종 의례와 도서보관, 출판과 문화, 정치적 여론 형성 등 복합적인 문화를 내포하고 있는 우리나라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장소다. ※ 輿論 형성의 場이자 圖書館이었던 書院◆ 서원 명칭의 유래 서원의 명칭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궁중에 있던 서적(書籍)의 편수처(編修處)이던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에서 유래했다. 이후 송나라 때 지방의 사숙(私塾)에 조정(朝廷)에서 서원이라는 이름을 준 데서 비롯되어 서원이 학교의 명칭이 됐다. 수양·석고(石鼓)·악록(嶽麓)·백록동(白鹿洞) 등의 4대 서원이 생겼으며, 특히 주자(朱子)가 강론(講論)을 하던 백록동서원은 유명하였다. 이후 서원은 선현(先賢)과 향현(鄕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를 아울러 갖추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서원의 시작우리나라에서 사와 재를 겸비한 최초의 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의 백운동 서원 즉 소수서원이다. 소수서원은 542년(중종 37) 경상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관내 순흥(順興) 백운동(白雲洞)에 고려 유교(儒敎)의 중흥자(中興者) 안향(安珦)의 구가(舊家)가 있음을 알고 거기에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경적(經籍)을 구입하여 유생들을 모아 가르친 것에서 시작됐다. 그 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와서 이를 보고 중국 백록동 고사(古事)처럼 조정에서 사액(賜額)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은 1550년(명종 5)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친필로 쓴 액(額)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노비(奴婢)를 내렸다. 그리고 이들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免稅)·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다. 소수서원 이전에도 도천서원(道川書院)이 1401년(태종 1) 단성(丹城)에, 김굉필(金宏弼)을 제사하는 천곡서원(川谷書院)이 1528년(중종 23) 성주(星州)에, 김구(金坵)를 제사하는 도동서원(道洞書院)이 1534년(중종 29) 부안(扶安)에 각각 세워졌으나 모두 사(祠)와 재(齋)의 기능을 겸비하지 않은 것이었다.◆ 서원의 폭발적 증설소수서원 이후 서원의 설치는 전국에 미쳐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 설치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러 1도에 80~9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국가 공인(公認)의 절차인 사액(賜額)의 청원에 따라 사액을 내린 서원도 늘어나 숙종 때만 해도 130여 개소에 이르렀다. 서원의 폭발적 증설은 관학(官學)인 향교(鄕校)의 쇠퇴를 가져왔다.◆ 서원에 대한 규제 서원이 남설되자 정부차원에서 규제가 시작됐다. 효종·숙종 때는 사액(賜額)에 대한 통제를 가하고 첩설자(疊設者)를 처벌하는 규정까지 두었으며, 영조 때는 안동 김상헌(金尙憲)의 원향(院享)을 철폐한 것을 시발로 대대적인 서원 정비에 들어가 200여개 소를 철폐하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700여개 소나 남아 있었다. 1864년(고종 1)에 집권한 대원군(大院君)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고 그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서원의 교육과정서원(書院)은 교육(敎育)과 제향(祭享) 기능이 중심이었고, 양반(兩班)들이 모여 여러 문제를 의논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공공장소의 기능을 하였다. 교육내용은 성리학적(性理學的)이고 도학적(道學的)인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 대체로 소학(小學)·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 중용(中庸)·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춘추(春秋)의 차례를 따라 학습이 진행되었다. 교육방법은 원규(院規)에 의한 규제(規制)와 원생(院生) 자신의 자율적인 실천 및 학습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교수방법으로는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를 문답하는 강(講)이 기본이었으며, 강(講)의 평가는 대통(大通)·통(通)·약통(略通) 조통(粗通)·불통(不通)의 5단계 또는 통(通)·약통(略通)·조통(粗通)·불통(不通)의 4단계로 나누었다. 서원(書院)은 향촌사회(鄕村社會)의 도서관(圖書館) 역할도 하였다. 책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서원(書院))은 서적의 수집과 보관 및 보급 기능도 수행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