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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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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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란 무엇인가]


족보(族譜)란 한 종족(宗族)의 계통(系統)을 부계(父系)중심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으로 동일혈족 (同一血族)의 원류를 밝히고 계통 (系統)을 존중하며 가통(家統)의 계승을 명예로 삼는 한 집안의 역사책 이다.

족보를 만드는 이유는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동족 의식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성은 혈족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류 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부터 유사한 관념을 갖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원시 사회야말로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씨족의 숫자도 점점 증가하고 대가 멀어질수록 서로의 유대 관계를 알 수 없게 되자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해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성을 처음으로 사용한 민족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다. 초기에 성을 만드는 방법은 단순하였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지명이나 산, 강을 성으로 삼았다. 신농씨의 어머니가 강수에 있었으므로 성을 강씨로, 황제의 어머니가 신수에 살았으므로 성을 신씨로, 순왕의 어머니가 요허에 있었으므로 성을 요씨로 한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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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 문화를 수입한 후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였기 때문에 고씨(高氏)라 했고 신하들에게 성을 사성(賜性, 임금이 공신에게 성을 내려주는 일)했다고 적었다.

백제는 온조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부여씨(夫餘氏)라 했고 신라는 박(朴)·석(昔)·김(金)씨의 전설이 있으며, 신하들에게 성을 ‘사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성(百姓)이란 말은 백 사람에서 성을 주었다는 유래에서 나온 말로 성을 가진다는 것은 지배층임을 의미한다.

학계에서는 고구려는 장수왕(419∼491), 백제는 근초고왕(346∼376) 때부터 성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신라 진흥왕(540∼576)의 순수비에 나타나는 인명을 보면 성을 쓴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성보다는 본을 썼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성은 점차 널리 보급되어 조선 초기에는 평민, 후기에 이르러서는 천민층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다.

이런 사정에서 더 이상 성의 유무만으로는 신분의 고하나 가문의 지위를 확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의 사대부 또는 명문 가문에서는 그들의 가문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한 방법의 하나로 족보라는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한국인의 독창적인 족보

족보의 연원은 본래 중국으로, '제계'라 하여 왕실의 계통을 적은 데서 유래한다.

중국 육조 시대에 고관을 배출한 우족(右族)이나 관족(冠族)이 성립하면서 문벌과 가풍을 내세우는 족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조상의 벼슬이나 경력, 계보, 집안 사람의 임관과 승진은 물론 혼인, 교제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사항을 담은 족보를 작성하는 보학이 발달했다. 특히 족보는 원래 공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관리의 임용에도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송대에 들어서자 사적인 용도로 변모하면서 가족을 하나로 응집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족보는 중국에서 유래하였지만 우리나라로 들어와 한국인의 독창적인 족보로 탈바꿈한다.

우리나라의 성씨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성명의 구성과 개념이 특이하고 고유한 점이 많다.

성과 본관은 가문을 나타내지만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렬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한국인의 성명을 보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계대(系代)까지 나타내는데 이것이야말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의 독창적인 작명방법이다.

내용은 시조로부터 차례로 한 세대에 한 칸씩 내려쓰며, 항렬이 같으면 같은 난에 쓴다.

여기에 명(名)·자(字)·호(號)·시호(諡號)를 쓰고, 생몰 연도와 간지·월일을 쓴다. 관직이라든가 호를 내려받은 사실은 물론 과거에 합격한 사실 등 개인의 경력을 기록하고 배우자의 관(貫)과 성씨 및 부와 조부의 관명과 생몰 연월일도 기록한다.

이 밖에도 묘지가 어디 있으며 그 형태나 방향이 어떤지도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후계자가 있는지 없는지, 양자를 들인 것인지 아들을 양자로 보낸 것인지, 또는 적자와 서자, 아들과 사위를 구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최초의 족보는 문화 유씨의 『영락보(榮樂譜)』라고 알려져 있으나 서문만 전해지고 실물은 없다.

그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성종 7년(1467)에 간행된 안동 권씨의 족보 『성화보(成化譜)』이다.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이었던 권제와 세종 때 영의정이었던 권람 부자에 의해 편찬되었으며 족보의 서문은 서거정(徐居正)이 작성했다.

조선 초기의 족보는 일반적으로 사위나 외손도 그 성을 기재했으며 아들·딸 (딸은 사위 이름으로 기재)의 기재 순위는 출생 순위, 즉 연령 순으로 기재했다. 특히 친손을 19대손까지 기재했다면 외손도 19세손까지 기재했다.

 반면에 조선 후기의 족보는 출생 순위와 관계없이 언제나 아들을 먼저 기재하는 '선남후녀'이다.

이와 같이 변하게 되는 것은 사회적인 통념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족보에서 자녀를 연령 순으로 기재하는 것은 인륜의 질서를 존중하기 때문이고 선남후녀의 방식은 본가, 즉 동족원을 보다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족보에서 선남후녀의 방식을 취하기 시작한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본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푸대접 받는 족보


오늘날 세계의 많은 인류학자들이 한국의 족보를 연구한다. 그만큼 한국의 족보가 독특한 특성과 연구할 만한 값어치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족보의 국가’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오히려 지나친 개인주의적인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족보를 푸대접한다. 심한 비유로 개의 혈통은 철저히 챙기는데 사람의 계통을 밝히고 혈통을 아는 데는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조선 시기 족보는 양반의 소유물이었으므로 양반의 신분적 특권은 고귀한 혈통과 뛰어난 조상을 확보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일부 양반 가문에서는 왕실이나 이름난 귀족들을 시조로 두기 위해, 혹은 이들의 계보에 자신들을 접속시키기 위해 족보를 편찬하면서 본관을 바꾸거나 조상의 세계와 파계를 조작, 윤색하는 행위 즉 가짜 족보를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과거에 부역을 면하기 위해 다른 집안의 족보에 자신의 이름을 삽입하는 부보(附譜)의 관행이 횡행하여 가짜 족보가 후일 정식 족보로 둔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백성들이 다른 사람의 족보에 이름을 기록하여 군역에서 빠져나가자, 어떤 백성은 상민과 천민들이 거짓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을 금해줄 것을 신문고를 쳐 호소하기도 했다.


조작의 방법도 다양했다. 당시에 만연된 모화(慕華)사상에 따라 시조를 중국과 연결시키기도 했고 고려시대에 성장한 가문들은 고려 초의 개국공신, 또는 삼한공신의 후예로 둔갑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한반도가 전란에 휩싸이게 되어 사회 기강이 흐트러지자 이때까지 철저한 위계에 의해 구분되던 신분의 격차를 족보의 변조로 위장하려고 했고 한국전쟁이후 양반제도가 사실상 철폐되자 가짜 족보는 더욱 성행했다.

그러나 이제 가짜 족보는 설자리를 잃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등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다.

특히 주요 정부 관원의 임명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족보에 기록된 사람들을 일일이 검증하면 가짜 족보인지를 곧바로 판독할 수 있다.

족보의 진정한 의미는 어느 선조가 고위직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씨족이 누구인가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바로 탄로나는 가짜 족보로 위세를 세우던 사람들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가짜 족보로 망신 당하지 말라는 듯이다.


족보천국 대한민국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길가는 사람 누구를 잡고 물어보아도 자신의 조상은 양반이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족보(族譜)일 것이다. 실로 우리나라는 족보 천국이라 할 정도로 족보가 성행하고 있다.

그러나 족보는 과연 거기에 실린 사람들이 양반임을 입증해 주는 증거로 부족함이 없는 것일까?

족보란 특정 성씨의 시조부터 편찬 당대인에 이르기까지의 계보(系譜)를 기록한 것으로 흔히 세보(世譜)라고도 한다.

족보는 어느 한 개인 또는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계보가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하는 씨족(氏族)집단 전체 또는 그 씨족 내 파(波)의 합동계보이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거나 알고 있는 족보에서는 수록된 개개인에 대하여 본손(本孫)인 경우 이름 외에도 자(字) ㆍ호(號)ㆍ시호(諡號),출생과 사망 연월일, 과거급제와 그후 관직을 중심으로 하는 이력, 묘지의 위치 및 배우자에 관한 제사항 즉, 배우자의 출생 사망 연월일과 소속 씨족, 그의 부ㆍ조부ㆍ증조부의 이름과 직위, 외조부의 성명과 본관 및 직위등을 밝히고 있으며 사위인 경우에는 성명과 본관을 적고 있다.

 오늘날 하도 여러 종류의 족보가 성행하기에 우리들은 자신의 가계기록(家系記錄)이라 하면 먼저 족보를 떠올린다.

하지만 과거에 가계 기록의 보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 기록 보존의 수단으로 처음부터 족보라는 합동계보의 방식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개별적으로 각자의 가계를 기록 보존하는 것이 족보보다 더 일반적이었다.

 조선시대 이런 개별적인 가계 기록에는 다양한 종류가 잇었다. 우선 <가승(家乘)>은 자기 부계(父系)의 직계 조상을 기록한 것으로 가장 단순한 계보 기록이다. 다음으로 <내외보(內外譜)>라는 것이 있는데 이 것은 부계의 직계조상과 각 조상의 배우자의 부계 직계 조상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8고조도(八高祖圖)>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기 부친의 조상을 4세대 앞인 8고조부모까지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부친뿐만 아니라 모친에 대해서도 작성해서 양친의 8고조부모까지 수록하면 자연히 <16고조도> 가 된다.


 그런데 이런 개별적인 가계 기록은 그 성격상 대부분 필사본(筆寫本)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족보와 같은 합동계보의 성격을 띤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가계만 기록했기 떄문에 인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전해진 개별적인 가계 기록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오늘날은 족보다 게보 기록의 유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설명한 여러형식의 가계 기록 가운데 가승을 제외한 다른 세 가지, 특히 8고조도와 16고조도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 쪽 혹은 할머니 쪽의 계보도 기록한 점이 특색이다. 즉 8고조도나 16고조도는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을 구별하지 않고 남녀 조상들을 모두 기록하였떤 것이다. 이는 모계(母系)는 무시한 채 부계 중심으로만 편찬되어 있는 족보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남녀 차별 없이 수록했던 조선 초의 가계 기록들


유교적인 가치관의 신봉자로 자처하였던 조선의 유학자들에 의해서 남녀를 평등하게 수록한 가계 기록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조선을 보통 부계 중심의 유교적인 가치관이 지배한 사회로 이해하고 있는 우리의 통념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조선 초의 이런 가계 기록은 족보에도 영향을 미쳐 17세기 중엽까지의 초기 족보들은 자녀를 남겨 구분없이 출생순으로 수록하거나 외손(外孫)들 까지도 세대나 범위의 제한 없이 수록하였던 것이다. 이 또한 조선 초기 남녀가 평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았음을 증명해주는 <분재문기(分財文記)>처럼 초기의 족보들은 남녀가 평등한 대우를 받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이 현실과는 다름을 증언해주고 있다.
가승 내외보. 8고조도. 16고조도 라는 네 종류의 가계 기록이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그 조상들을 기록한 문서인 데 비하여, 족보는 역으로 과거의 한 인물을 공통의 조상으로 하여 자손들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각자의 가계를 족보로 취합해 합동으로 기록 보존하기 시작한 것이 보통 조선 초기인 15세기 중엽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대체로 17세기 후반에 작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엽에 이르는 약 2세기 동안에 나타나는 초기 족보들은 실상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족보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그것은 어느 한 개인이 자기의 가승을 주축으로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거시앋. 이런 초기 족보에 그 편찬자의 직계조상들에 관해서는 상당한 분량의 기사가 실려 있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이름뿐인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이런 초기 족보에는 대체로 딸의 자손들, 즉 외손(外孫)도 본손(本孫)과 마찬가지로 세대의 제한없이 족보 편찬 당시의 인원까지 수록하고 있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족보인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 ≫ [성종 7년(1476) 명나라 성화 12년]에 등장하는 인물 약 8,000명 중에서 안동 권씨의 남자는 380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대부분 여자 쪽의 자손이다. 이와 같은 편찬 방식은 ≪성화보≫ 다음으로 오래 된 족보인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 [명종 20년(1565), 명나라 가정 44년] 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에 기재된 총 3,800명의 인물 가운데 문화유씨는 1,400명에 지나지 않는다.


족보가 유행한 까닭


그러면 족보가 유행한 까닭은 무엇인가. 족보는 출현당시부터 단순한 가계기록의 보존수단뿐 아니라 사회적 기능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사회적 기능은 처음에는 동리 씨족원 사이의 각별한 유대관계를 강조하는 이념적인 것이었지만 문벌(門閥)숭상의 사회풍조가 발전함에 따라 점차 현실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문벌숭상 풍조는 기본적으로 사람들 독립된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느 씨족의 어느 파에 속하는 누구의 자손이며 또 누구의 외손인가로 이해하려는 사회관습의 소산이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사람들의 사회ㆍ정치 생활에서의 활동과 성공은 개인적인 능력이나 인격보다는 그들의 가문이나 배경에 의해서 좌우되었던 조류의 반영이었다. 이런 사회풍조가 우리 역사상 어느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또 어느 시기부터 발달하였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후기 학자들인 유형원(柳馨遠), 이익(李溺), 정약용(丁若鏞) 등 은 우리나라는 근세 이후로 문벌사상이 발달하여 그 페단이 매우 심하다고 공통적으로 개탄고 있는데, 그들이 말하는 '근세'란 대체로 16~17세기 이후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 시기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 아래에서 우선은 자신들을 위해서, 둘째를 후손들을 위해서 자신들 가계의 배경을 널리 알려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기를 희망했고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와 같은 희망과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바로 족보였던 것이다. 특히 족보를 통해서 가계를 확실하게 밝혀 놓지 않을 경우 현재의 사회적 신분을 현상 유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현 수준 이하로 전력할 수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양반계층의 최하단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큰 관심거리였던 것이다.


 여기에 신분제도와 관련해 운영되었떤 군역(軍役) 문제는 경쟁적인 족보 편찬에 불을 붙였다. 조선 중종 때 확립된 군적수포제는 군역 수 행을 포(布)나 돈으로 대신하게 한 제도였는데 양반은 징수 대상에서 면제함으로써 군역면제를 원하는 양반들이 족보를 경쟁적으로 편찬했던 것이다. 족보가 군역 면제의 한 증거로 이용된 결과 족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더 한층 커진 것은 당연했다. 이런 사정은 헌종 12년(1846)에 간행된 ≪한산이씨(韓山李氏) 제 3수보(修譜)≫ 발문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이 수정족보의 편찬자 이희값(李羲甲)은 발문에서 자신이 3수보의 편찬 주역을 맡게 된 경위를 한산에 사는 일가(一家) 이인적(李寅迪) 노인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 노인의 족보 중간(重刊) 부탁을 거부하였지만 5년간 계속해서 찾아와 부탁을 하였으며 다시 찾아올 때마다 그 말이 더욱 간곡하여졌고 심지어는 눈물을 떨어뜨려 ㄷ가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저 궁벽한 시골에 사는 우리 일가로서 과거나 벼슬길이 끊어진 채 여러 세대가 지나 이제 그 자손들의 이름이 군안(軍案 : 군역대상자 명부)에 오를 형편에 처했으나 달리 손을 쓸 방도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불쌍한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이런 간청 때문에 그는 영조 16년(1740)에 만들어진 족보를 107년 지난 이때에 다시 중간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위 예에서 보듯이 당시 족보의 개수(改修)를 추진한 사람들은 절박한 필요성의 하나로 으레 군역문제를 지적하였다.


실제 조선 후기에는 이른 바 '탈역소지'라고 하는 탄원서를 관(官)에 제출하여 군안에서 이름을 삭제하여 줄 것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때 탄원 정당성의 입증자료로 반드시 족보를 제시하였다. 탄워서를 접수한 관에서도 으레 족보에 나타난 가계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렸다. ≪유서필지(儒胥必知)≫는 조선시대에 널리 사용된 일종의 서식대전(書式大典) 인데, 이 책 중에 수록된 외읍인유반맥자탈역단자(外邑人有班脈者탈役單子)>에는 탄원서를 접수한 수령이 내릴 수 있는 결재문의 한 본보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족보를 검토하고 가승을 참조하니 그의 가문이 양반임이 명명백백하다. 다라서 그에 대하여 특별히 군역면제의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 이다.
이 결재문은 조선 후기에 족보가 왜 그렇게 성행했는지를 웅변해 준다. 족보가 바로 군역면제 여부의 결정적인 입증자료였던 것이다. 18세기부터 전개되는 족보의 전성시대는 이렇게 도래한 것이다.


조선후기 족보는 대부분 위조되었는가


흔히 알려진 것처럼 과연 조선 후기에 대부분의 족보는 위조되었는가. 당시 족보를 조작할 의사를 지닌 사람들은 두 집단이었을 것이다.

한 집단은 조상의 관직이나 과거에 관한 기사를 과장되게 표현하여 자기 가문의 위신을 높이려는 집단이다. 다른 한 집단은 특정한 목적, 예를 들면 그 당시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였던 군역을 면제받기 위하여 계파 자체를 전혀 엉뚱한 데에 연결시켜 이른 바 아버지를 바꾸고 할아버지를 바꾸는 '역부환조(易父煥祖)'를 하는 원래 양반신분이 아닌 부류들이다. 그밖의 사항들, 즉 이름이나 출생과 사망 생년월일, 묘지의 소재지, 배우자의 소속 씨족과 그 아버지의 이름 등은 혹 몰라서 잘못 기술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어도 고의적으로  조작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사항들은 가문의 위신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조작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경우는 '역부환조'하는 두 번째 집단이다. 물론 양반신분을 지닌 사람들이 자기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족보를 조작하였다면 이 역시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겠지만 당시 문헌들은 이런 경우를 크게 다루지 않았따. 양반 신분을 조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 양반신분으로 족보를 위조하는 경우이다. 과연 조선후기에 군역면제받기 위해 양반신분으로 족보를 위조하는 경우이다. 과연 조선 후기에 군역면제를 받위 위한 족보위조가 광범위하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족보위조 사건은 18세기 후반부터 등장한다.

그 가운데 순조 7년 (1807)에는 위조에 관련된 죄인만도 16명이나 되며 위조 족보를 사들인 사람도 166인이나 되는 사상 최대의 족보위조 사건이 있었다. 이는 상당히 큰 규모의 사건이지만 그 외에 18세기 후반 이후 발생하는 크고 작은 족보위조 사건의 그 관련자 총수는 합쳐야 500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시기 족보위조가 광범위 하게 위러어졌다는 통설이 거의 설득력을 지니지 못함을 말해준다.

18세기 후반부터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이 처럼 소규모로 이루어진 족보위조라는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는 도저히 거의 모든 조선인이 족보에 등재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이전인 17세기까지는 양반의 권력과 특권의 상징이었던 족보를 위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인 대다수가 족보에 기록될 수 있었던 이유 


그렇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이 어떻게 족보에 기재 될 수 있었을까.

이는 18세기 후반부터 족보 편찬에 있어 아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던 데 기인한다. 가계의 연결관계가 불분명한 사람들은 이른 바 별보(別譜) 또는 별파(別派)라는 별도의 족보에 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규장각한국본도서해제≫ 4에 따르면 영조 36년(1760) 편찬된 풍양조씨의 족보 30권 가운데 계보를 기록한 부분은 모두 28책이었다.

그 중 제 28책에는 17개파가 별보 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곳에 기재된 전체 인원의 4퍼센트는 풍양 조씨와의 혈연관계가 명확하게 입증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족보에 실리게 디ㅗ었던 것은 당사자들이 풍양 조씨에 속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수록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조 26년(1826)년에 간행된 풍양 조씨 족보는 모두 35권으로 되어있는데 그중 계보를 기록한 것은 33권이다.

여기서 32권, 33권은 별보로서 전체 분량의 6퍼센트이다. 그런데 1900년에 간행된 같은 가문의 족보는 80권인데,

그 가운데 계보를 수록한 것이 78권으로 그 중 별보는 1권으로 줄었다. 이는 19세기까지 별보에 기재된 인물 다수가 본래의 여러 파에 흡수되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900년의 풍양 조씨 족보는 그보다 74년전에 간행된 족보에 비하여 분량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같은 기간 인구증가율을 20퍼센트로 추정했을 경우 (Michell, Toni의 연구결과에 따름) 이 기간 동안 풍양 조씨의 구성원은 세 배 이상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즉 족보에 수록된 인원의 최대 80~90퍼센트에 해당하는 인원에 별보에 기록되는 형식으로 풍양 조씨의 구성원이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풍양 조씨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었다. 다른 가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서 족보를 지닌 인구가 폭팔적으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20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족보에서 배제되었떤 황해도 재령 이북지역과 제주를 비롯한 섬 지방의 거주자들에게도 족보의 문호가 개방되었따. 이런 경로를 통해 20세기 후반에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해당 씨족의 족보 구성원이 되었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 국민 모두가 족보의 구성원이 된 본격적인 시기는 조선 후기가 아니라 20세기 전반이었다.

그것도 족보를 위조하는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사자들의 요구에 의한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였다.

이런 현상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게 족보가 특권을 보장하는 공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단순한 사적인 문서로 취급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양반이라는 소수의 특권층이 배타적인 권익을 누리기 위해 족보를 만들었다면, 그런 법적인 특권이 상실된 근대 이후에는 오히려 가문구성원이 다수인 것이 세력을 확장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족보의 문호를 개방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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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장 포장의 종류 무궁화대훈장(無窮花大勳章, Grand Order of Mugunghwa)무궁화대훈장은 대통령 및 그 배우자, 우방원수 및 그 배우자 또는 우리나라의 발전과 안…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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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연령 명칭과 의미, 항렬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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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령 명칭 명칭연령의미출전지학(志學)15세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논어약관(弱冠)20세남자 나이 스무살을 뜻함예기이립(而立)30세모든 기초를 세우는 나이논어불혹(不惑)40세사물의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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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세(世)와 대(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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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世)와 대(代)세(世)란? 예컨대 조(祖)·부(父)·기(己)·자(子)·손(孫)을 계열의 차례대로 일컫는 말이며, 대(代)란? 사람이 나면서부터 30년간을 1代로 잡는 시간적공간…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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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족보 상식, 족보 용어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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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보상식1. 족보란 무엇인가?族譜(족보=보첩)란 한 宗族(종족)의 계통을 父系(부계)중심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으로, 同一血族(동일혈족)의 원류를 밝히고 그 혈통을…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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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왕실 및 대한민국 대통령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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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BC 57~935 왕실연표(朴씨10왕, 昔씨8왕, 金씨38왕, 56대 992년) 王代 (왕대)年代(연대)王代 (왕대)年代(연대)1대, 혁거세BC57~AD429대, 무열왕654…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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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12간지연대표, 방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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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방위도 *묘소의 방향이 자좌(子坐)로 되어 있으면 고인의 머리쪽이 정북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뜻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묘지의 방향은 정남향이 됩니다 12간지 방위표우리나라는 옛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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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역사연표 (조선개국 1393년 ~ 19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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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사연표 <조선~1910년>1393년 2월 국호를 조선으로 바꿈.1394년 10월 한양천도(漢陽遷都)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일어남, 정도전, 남은 등 죽임을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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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역사연표(1800년~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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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정순왕후(貞純王后) 대왕대비 김씨(金氏)의 명에 따라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실시. 서얼소통 시행, 내사노비(內寺奴婢) 폐지 등 제도 개혁.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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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역사연표(기원전.기원후~17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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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연표>◎ 기원전70만년전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 시작10000년 중석기문화 형성. 공주 석장리유적의 단구(段丘) 제1문화층과 단구 제3문화층. 욕지도(欲知島)유적…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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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관향조 (휘)령의 조선왕조신록 연보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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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조선왕조실록에 우리 관향조에 관련된 기록은 총 25건의 기록이 나타납니다.각 기사별로 당시의 정치 상황을 살펴서 이해하고 해설이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만, 자그만치 600…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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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관향조 (휘)령의 조선왕조신록 연보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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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조선왕조실록에 우리 관향조에 관련된 기록은 총 25건의 기록이 나타납니다.각 기사별로 당시의 정치 상황을 살펴서 이해하고 해설이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만, 자그만치 600…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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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족보의 最古書 안동권씨 성화보(成化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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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最古書안동권씨 성화보(成化譜 )1476년(성종 7) 간행된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족보. 3책. 목판본.당시에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성화연간에 만들어진 것이라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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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세조실록] 원종 공신, 주부 박홍간(朴弘幹)등은 3등에 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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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2권 1년(1455을해년) 12월 27일 (무진) 003 /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 주부 박홍간(朴弘幹)등은 3등에 녹훈하다.③좌참찬(左參贊) 정갑…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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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연대 대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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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대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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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고려시대 관청명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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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관청명(가)]관청명: 해 설가각고(架閣庫):고려때 궁중의도서,전적(典籍)을 맡아보던 관청,1356년에 설치, 종 7품의승과 종 8품의 주부를 두었다가옥(假獄):고려 광…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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