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변조될 수 없는 발해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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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변조될 수 없는 발해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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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변조될 수 없는 발해의 정체성


△ 발해의 첫 도읍지인 동모산 산성(전쟁기념관 발행, 발해 건국 1300주년 기획전 ‘발해를 찾아서’, 1998년,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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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 종족도
발해는 ‘고구려 아들’


중국이 고구려에 이어 발해까지도 자국의 영토에 편입시켜 변방의 한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으로 역사를 변조하려는 어마어마한 ‘공정’이 지금 막 장막 뒤에서 시공 중에 있다. 조만간 장막이 걷히면서 발해 유적의 유네스코 단독 등재 등 그 ‘변조’가 가시화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고구려 문화유산 등재에서 당한 ‘반판승’보다도 더 참혹한 완패를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역사 정통을 지키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출구는 오직 하나, 지켜내는 일뿐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민족사 정통에 뿌리박은 발해의 정체성을 명백히 가려내는 일이다. 그 정체성이란 한마디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민족의 정통 주권국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계승성은 발해의 건국 과정이나 차지한 영토와 종족 구성, 그리고 전통적 생활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발해 건국의 역사적 뿌리는 고구려의 부흥운동이다. 당나라가 무력으로 고구려를 굴복시켰지만, 고구려인들은 녹록하게 그 지배를 감수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나라가 망한지 2년도 채 되기 전에 한성(현 황해도 재령)에 모여 검모잠과 안승의 지휘하에 부흥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신라와 연합군을 결성해 요동반도에서 당군과 일전을 벌였다. 이러한 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당으로부터 요동 지역에 파견된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은 오히려 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을 끌어모아 부흥운동을 앞장서 이끌었다. 이렇게 되자 당은 한성의 고구려 부흥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안승 세력을 신라 땅으로 몰아내고는 보장왕을 붙잡아 중국 서남부로 유배시키고 아들들은 장안에 유폐시켰다. 그러나 부흥운동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고구려의 서변 영주에 끌려갔던 고구려 장군 대조영은 말갈인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뒤, 대릉하를 건너 추격해 오는 당군을 천문령에서 물리치고 동모산에 이르러 698년에 나라를 세웠다. 위세를 크게 떨친다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진국(震國, 혹은 振國)이라고 지었다가 15년 후에 발해로 개명하였다. 이렇게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30년간 벌인 피어린 부흥운동에 의해 비로소 건국의 틀을 마련하였다.


 

발해 종족의 뿌리는 대체로 예맥·부여계 고구려인
말갈인은 종족이름 아닌 송화강·백두산 지역민 지칭



△ 함남도 신포시 오매리 절골터에서 발견된 발해인들의 온돌 유적(앞책 33쪽)  

발해가 차지한 영토나 그 족속에서도 고구려로부터의 계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발해 2대왕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라고 고구려의 후계임을 자임한다. 발해는 한반도를 비롯한 고구려의 고토 대부분을 망라하고, 그 기초 위에서 영토를 통일신라의 4~5배로 확대해 명실상부한 해동성국을 이루었다. 이 영토 내에 있는 종족이 과연 고구려 종족을 계승했는가 하는 족속문제가 발해의 정체성 시비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문제이다. 그것은 문헌의 해석과 족속계통 및 사회구성원에 관한 이해가 크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구당서>에 나오는 대조영이 ‘고려별종(高麗別種)’이란 말의 해석에서 중국측은 ‘고려(고구려)와는 다른 종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견강부회적인 억설이다. 어법상에서 ‘~와 다른 종족’이라고 할 때는 이렇게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정확한 해석은 ‘고구려의 다른 한 종’이란 뜻이다. 기타 여러 사적에 나오는 ‘별종’의 실례들은 내용이나 어법에서 중국측의 억설을 일축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일본학계에서는 당나라에 유학한 일본 승 스가하라가 쓴 <유취국사(類聚國史)>란 책에서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주민(피지배)은 말갈인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발해의 이중종족론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중국은 물론, 우리 나라 학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외국에 보낸 사절단을 비롯한 상층에도 말갈인들이 적잖게 기용되고 있었다. 총체적으로 볼 때, 발해의 종족은 고조선과 고구려를 구성하고 있던 예맥·부여계통의 고구려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거론되는 말갈인이란 어떤 특정 종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송화강 유역의 속말말갈이니, 백두산 지역의 백산말갈이니 하는 것과 같이 지역에 따라 주민 일반에 대한 중국측의 비칭인 것이다. 쑨진지 같은 중국 학자도 말갈은 어떤 민족이나 종족도 아닌 예맥이나 숙신, 고아시아의 3개 종족으로 이루어진 일부 부락군이나 부락연맹 같은 것이라고 하여 말갈의 종족성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이 말하는 것처럼 발해는 말갈인들이 세운 지방정권이 아니라,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고구려의 당당한 계승국인 것이다.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것은 발해인들의 생활문화이다. 인간집단의 생활문화는 장시간의 답습과 축적 등 전승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법이다. 전승 없이 어느 순간에 급조되지는 않는다. 발해의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같다’라는 <구당서>의 기록으로 미루어서도 발해가 고구려의 생활문화를 이어받았음에는 의문이 여지가 없다. 어느 민족에게나 보수성이 가장 강한 것이 장례법과 무덤양식인데, 두 나라는 똑같이 돌방무덤을 주로 쓰고 있다. 그리고 우리만의 독특한 주거문화인 온돌도 두 나라가 신통하게도 공유하고 있다. 기타 도기나 막새기와, 성채 등 유물에서도 고구려풍을 짙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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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꽃무늬가 새겨진 발해와 삼국의 막새기와(앞책 33쪽)  

돌방무덤·온돌도 고구려식
일본이 발해사신을 왜
‘고려사’라 불렀는지 알만하다


그 옛날 발해의 민족적 얼은 농경문화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신당서>는 쌀이 발해의 한 주인 노주(盧州)의 특산물이라고 전하고 있다. 비옥한 노주는 중경현덕부에 속한 주로서 서고성이나 연길분지라고 한다. 북위 43도의 북방에서 쌀이 생산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아마 당시 북방의 온난화가 일어나 가능했을 것이다. 쌀은 동이족 가운데서 우리 한민족만의 전유물이었으며, 고려시대까지도 물가의 기준이 될 정도로 귀중품이었다. 노주의 쌀은 질이 좋아 나라에 바치는 공미였으며, 명나라 때는 이곳이 황제의 식량 생산지인 황량구(皇糧區)로 지정되기도 했다. 지난 60년대부터는 특별미로 베이징에 반출되어 고 마오저뚱(모택동) 주석의 밥상에 올랐으며, 70년대부터는 국가가 특별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쌀밥을 ‘왕밥’이라고 한다. 발해인과 더불어 우리는 ‘왕밥민족’이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발해에도 원삼국시대의 것과 비슷한 암각문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의 이맥이 쓴 <태백일사>를 보면, 발해의 경박호 부근 암벽에 경남 남해의 금산 암벽에 새겨진 암각문과 비슷한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다같이 무슨 글자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발굴된 4백여개의 기와에서 한자가 섞인 문자 150여자를 발견했는데, 그중에는 해독할 수 없는 ‘발해문자’가 여러개 있어, 앞에 말한 금산 암각문자와의 관련성이 주목된다. 언어와 문자는 한 민족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징표이다.

거란(요나라)에 멸망된 후, 발해 땅에는 거란의 동쪽 나라란 뜻의 동란국(東丹國)이 세워져 발해인들 중 일부는 거란화되어 후일 만주족의 조상이 되고, 일부는 고려에 이주하여 고려의 발해 계승역을 담당했다. 북한에는 물론, 남한에도 그 후예들이 살고 있어 천여년 전 해동성국을 이룬 발해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의 혈연적 유대를 실감케 한다.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성이 태씨다. 그 후손들인 영성 태씨 일가가 경북 경산시 남천명 송백리에서 조상의 사당을 모셔놓고 지금도 오손도손 살아가고 있다. 고려와 발해는 8년간이나 공존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를 ‘친선의 나라’라고 부르면서, 맹약을 어기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사신과 낙타 50마리를 보내오자, 사신은 섬에 유배시키고 낙타는 굶어죽게 한다. 이것은 왕건이 발해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지의 표시인 것이다.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은 당시 외국에서도 널리 인정되고 있었다. 일본은 발해에 보내는 사신을 으레 ‘고려사’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지난 세기 초 중국 둔황에서 발견한 <둔황문서>에는 발해를 옛 고구려를 지칭하던 돌궐어 ‘리(Mkli)’나 ‘묵릭(Mug-lig)’으로 부르고 있다. ‘리’나 ‘묵릭’은 고구려의 족속인 맥(예맥)에서 연유된 말이다. 이것은 돌궐을 비롯한 내륙아시아인들이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로, 내지는 같은 국가로 알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중국 동북지방이나 내몽골 일대의 여러 발해유적에 고구려 이름이 붙어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발해의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시도는 지각있는 중국인들 자신에 의해서도 이미 지탄을 받은 바가 있다. 40년 전 미구에 있을 역사분쟁을 예감한 고 저우언라이(주은래) 전 총리는 역대 중국의 대국적 배타주의를 사과하면서 발해가 우리의 옛 땅이었음을 확언하였다. 우리가 연구를 심화시키고, 변조 아닌 진실에의 접근이 이루어진다면, 발해가 고구려의 당당한 계승국이며, 우리 정통역사의 한 구성부분이라는 정체성은 보다 확연하게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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