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세계와 사통팔달한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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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세계와 사통팔달한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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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세계와 사통팔달한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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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림문화 꽃피운
다섯갈래 국제교류망


발해는 동방의 강대국답게 튼튼한 국가체제에 기반하여 5대 교통로를 통해 세계와 사통팔달함으로써 주권국가로서의 국제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안에 버금가는 수도를 가진 대제국 발해를 누구에게 얽매인 변방의 한 소수민족 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의 변조이고 왜곡이다. 발해의 국제성은 우리 민족사의 정통 계승국으로서, 당대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한 주역으로서 응분의 국제적 대응과 교류를 진행한 데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발해는 건국에서 멸망(698~926)에 이르기까지 228년간 15대를 이은 중앙집권적 왕조로서 독자적인 국가운영체제를 갖춘 독립국가였다. 1대인 고왕 대조영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뒤, 2대 무왕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정복활동을 벌여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그의 뒤를 이은 문왕은 발해 전체 역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57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리면서 내치에 힘을 모아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그후 4대부터 9대까지 25년 동안 6명의 왕이 교체되는 일시적 내분기를 겪고나서는 10대 선왕에 이르러 다시 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정복활동을 마무리하여 9세기 전반에 최대의 판도를 확보하여 다시 중흥을 맞이하였다. 사방 5천리를 아우른 국토면적은 한반도 전체 면적의 2.2~2.8배에 달하는 50~63만 k㎡나 되었다. 그러자 당나라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발해를 ‘해동성국’, 즉 바다 동쪽의 융성한 독립강국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융성은 14대까지 이어오다가 15대에 와서 거란의 내침으로 마감되고 만다. 그러나 요동반도에 끌려간 발해유민들은 ‘후발해국’이니 ‘대발해국’이니 하는 이름의 후계국들을 세워 부흥운동을 근 2백년 동안이나 벌인다. 부흥운동을 일으킨 사람들 대부분은 후일 고려로 망명해 발해의 역사적 정통성을 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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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의 옛성 노브고르데에프성 취락지에서 출토된 중앙아시아 소그드 은화 (앞책, 56쪽)  

40만강군 바탕 228년간 지속
독자연호 쓴 중앙집권 왕국
5개 교류길 통해 문화융합
발해만의 문화까지 창조


발해의 행정체계를 보면, 중앙정부기구는 대체로 당의 3성 6부 9시제를 본받기는 했으나, 나름대로 개편하고 이름도 달리하여 3성 6부 1대 7시 1원 1감제로 운영하였다. 3성 가운데 행정실무기관인 중대성을 중심으로 하는 운영체제는 3성의 균형과 견제를 기저로 한 당나라의 운영체제와는 다르나, 통일신라 하대에 3성 중 집사성에, 그리고 고려 때 중서문하성에 권력이 집중된 것과 비슷해, 그 상관성이 주목된다.




지방행정기관으로는 부, 주, 현을 두어 각각 도독, 자사, 현승 등 지방관이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와같은 국가의 행정체계는 당나라의 그것과 대등한 것으로서 결코 당의 지방행정체제라고는 볼 수 없다. 그리고 발해의 건국과 영토확장 및 중흥의 주요 역군은 건국초기부터 고구려의 상무기풍을 물러받은 40만 강군이다. 이것은 8세기 전반 49만을 헤아리는 당나라의 군사력과 망상막하였다. ‘발해인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 ‘풍속에 말타기와 사냥을 즐긴다’라는 사적의 기록은 무예를 숭상하는 발해인들의 용감한 기상을 전해준다.


이렇게 정연한 국가체제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발해는 시종 당나라와는 나라 대 나라의 국가관계 차원에서 영활한 화전 양면의 전략전술로 응수해나갔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당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거란 등 가까운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전대인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원교근공’(遠交近攻: 먼데와 교섭하여 가까운 데를 치다) 정책의 일환으로 멀리 서천한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에 위압 당한 당나라 중종은 705년 특사를 보내 과거 고구려와 그 유민들에 대한 잘못을 사과하고 발해의 건국을 축하하는 한편 수교를 제안한다. 능수능란한 무왕은 둘째 아들을 당에 숙위로 보내 그 제안을 수락한다.


이 대목에서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점은 발해가 당에 숙위를 보냈다거나, 당이 주제넘게 발해왕에게 ‘홀한주도독’ 같은 책봉을 했다거나, 조공이 오갔다든가 한 것은 여느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두 나라의 의례적인 외교관례나 관영무역일 뿐, 중앙과 지방간의 어떤 신속관계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신당서>가 전하는 바와 같이 발해는 자신들의 연호를 줄곧 사용했으며, 시호도 스스로 만들어 썼다.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에는 왕을 ‘황상(皇上)’이라고 부를 정도로 발해는 중국과 동격의 황제국이었다. 이러한 발해이기에 침해를 당할 때는 단호하게 주권을 행사한다. 북방의 흑수말갈이 당에 빌붙어 압박해 오자 발해는 723년 대장군 장문휴가 이끄는 수군 정예 2만을 보내 속전속결로 중국 산둥반도의 덩저우를 공략한다. 우리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외선제공격의 일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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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경용원부(현 훈춘)에서 출토된 삼존불의 협시보살이 목에 십자가를 걸고 있다. (전쟁기념관, 발해건국 1300주년 기획전 '발해를 찾아서', 28쪽)

 

발해의 당당한 국제성은 이러한 자주적인 국가권력 행사와 더불어 상경을 시발점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뻗은 다섯 갈래의 국제교통망을 통해 진행된 교류와, 그 결과로 이루어진 문화의 융합상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5대 국제통로는 상경에서 부여부(현 지린)를 거쳐 거란으로 가는 거란도, 영주(현 초우양)를 거쳐 중원으로 이어지는 영주도, 압록강을 타고 산둥반도로 들어가는 압록도(일명 조공도), 동경과 남경을 거쳐 신라까지 연결되는 신라도, 동경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이다.

이 5도를 통한 일본과의 교류는 그 대표적 일례다. 신라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던 일본은 발해의 동태를 알아보기 위해 720년에 자진해 사신을 파견한다. 발해는 아랑곳하지 않다가 당과 흑수말갈, 신라간의 밀착이 엿보이자 군사적 동맹 여부를 타진하기 위해 7년 후에 무관 출신의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는다. 그 후 양국관계는 신속하게 발전하는데, 전기에는 주로 군사외교이나, 후기에 와서는 경제문화교류가 주류를 이루면서 일본에 대한 발해의 문화적 영향이 커진다.


<속일본기>를 비롯한 일본 사적의 기록과 일본에서 발견된 ‘발해사 목간’이나 ‘견(遣)고려사 목간’ 등 유물이 증언하다시피 두 나라간에는 11회의 사신교환이 있었으며, 문물교류도 상당히 빈번하였다. 발해는 주로 모피와 삼 등 토산품과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서책을, 일본은 견직물과 종이 등 생활필수품을 서로 교환하였다. 871년 일본에 간 발해사신들이 첫날 관무역에서 얻은 이익만도 일본화폐로 40만 냥,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6억 6천만엔이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발해사신들은 일본 문인들과 작시를 주고받는데, 오늘까지 남아있는 발해 한시 10수 중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들으며’같은 9수는 이들 발해사신들이 지은 것이다. 발해악이 일본 궁중음악의 하나로 된 것도 이무렵이다.


발해문화는 당문화를 비롯한 여러 문화를 받아들어 융화시킨 독특한 복합문화다. 무덤양식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돌무지 무덤이 위주이지만 당의 벽돌무덤이나 말갈의 흙무덤도 받아들였다. 당삼채를 본받아 삼채도기를 구워냈으며, 금 알갱이를 촘촘히 박는 서역의 누금기법으로 정교한 금속장식품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발해 고유의 문화상도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몇 사람의 뒤를 따라 여러 명이 빙빙 돌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답추(踏鎚) 춤이나, 연꽃잎 무늬에서 3국은 8개 잎을 기본으로 하는데 비해 6개 잎으로 꾸미는 기법을 쓴 것이 그런 사례다. 또 여러 명을 합장하고 그 무덤 위에 건물을 짓는 건축술 등도 발해만의 문화현상이다.

발해의 유물 중에는 몇가지 주목되는 것이 있다. 연해주의 옛 발해성인 노브고르데예프성 밖 취락지에서 은화 한 점이 발견되었는데, 앞면에 왕관과 함께 ‘부하라의 군주 짜르’란 소그드 문자가 새겨져있는 점으로 미루어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은화임이 확실하다. 교역수단인 이 은화는 북방 실크로드의 초원로와 연결되는 거란도(일명 ‘담비의 길’)를 따라 발해까지 유입된 것으로서 수만리 떨어진 두 지역간에 교역이 진행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가지 신기한 것은 불교와 고대 동방기독교간의 융합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의 발견이다.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십자가가 발견되고, 동경용원부(현 훈춘)에서는 삼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상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발해의 서변에 자리한 우순(撫順) 지역에서도 수백점의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신라의 경주에서도 석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7세기 중엽 중국에 들어와 약 250년 동안 성행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경교)가 9세기 전반 탄압을 받고 축출될 때, 발해 땅에 파급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경교는 불교와 습합하는 방법으로 전파를 시도하였으니, 그 맥락에서 보면 발해에서 두 종교간의 융합관계는 이해가 될 것이다. 배타가 아닌 어울림의 문화를 꽃피운 발해인들의 슬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렇게 발해는 완비된 국가체제와 주권국가로서의 확고한 국제성을 지니고 사통팔달한 국제교통망을 통해 세계와 교류하고 문화를 주고받은 대제국이었다. 이러한 발해를 아예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지방정권 운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용서못할 거역이고 오만이며, 우러 겨레에 대한 야멸찬 멸시에 다름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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