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칠지도’의 위증 관리자 해외기행 0 8754 2019.01.03 18:45 (19) ‘칠지도’의 위증△ ‘칠지도’(아사오 나오히로 외 엮음, 이계황 외 옮김, 〈새로 쓴 일본사〉, 창작과 비평사, 2003, 49쪽) 여섯갈래 창이 일곱갈래 칼로 둔갑한 이유는?부산에서 약 200㎞ 떨어진 일본 서북부 도이가하마 해안의 모래밭에서 발견된 300여 구의 유골은 신통하게도 모두 20도 각으로 서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전래 매장법으로는 도시 설명이 안 된다. 그 매장 시기도 갑작스레 기원전 2세기께부터라는 분석이 나왔다. 오랜 연구 끝에 인골형질학과 농경문화, 사향심 등 여러 측면에서 그 해답을 얻어 냈다. 인골형질학적으로 그들은 종래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 인골집단인 야요이인들이다. 조몬인은 남방계 인종으로서 이마가 넓고 눈이 크며 턱이 넓적하나, 야요이인은 북방계 인종으로서 얼굴이 갸름하고 길며 눈썹이 가늘다. 그런데 이 야요이인들은 다름아닌 기원전 3~4세기에 한반도로부터 건너가 벼농사를 가르쳐준 사람들로서 농경을 중심으로 한 야요이문화를 일군 주역이다. 도이가하마 해안의 인골이 바로 이 야요이인들인 것이다. 그들이 20도 각으로 향한 서북쪽은 바로 한반도에서 초기 벼농사를 가꾼 호남 일대, 즉 발해 방향이며, 그 방향으로 머리를 돌린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수구지심(首丘之心)과 영혼을 고향으로 날려보내려는 바람에서였을 것이다. ‘일본서기’엔“왜가 가야 정복해 백제에 주자백제가 칠지도·칠자경을헌상했다”는데뭔가 이상하다4세기 후반에 보낸 칼이6세기 제작으로 추정되니‥이와 같이 한반도와 일본열도 간의 만남은 문화의 주고받음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것이 한반도 남부에 자리잡은 삼한이나 가야와의 간헐적인 만남으로 이어져오다가, 5~6세기에 이르러 고대 일본 국가가 형성되면서 한반도 3국과의 교류가 본격화되었다. 그 진두에는 지정학적으로 일본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선진문화를 구가하던 백제가 서 있었다. 일본은 백제의 선진문화를 수용하고, 또 백제를 통해 중국 문화와도 접하려는 욕망에서 백제에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한편,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와의 변화무쌍한 대립관계에 대처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먼 곳과 교섭하여 가까운 곳을 공격’하는 이른바 원교근공책을 펴나갔다. 그리하여 초기 한성시대부터 백제와 일본간의 선린·교류관계는 한-일 관계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전개되었다.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부터 양국간에는 사절이 교환되고, 각부문 전문가들이 파견되어 일본 문화의 개화를 선도하였다. 5경 박사가 일본에 가서 〈주역〉, 〈예기〉 등 5경을 가르쳤고, 왕인 박사는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가서 일본 황태자와 군신들에게 한자와 경전을 가르치며 문맹을 퇴치하는 데 한몫하였다. 이에 아직은 무학상태에 있던 일본사람들은 이들 박사들을 가리켜 ‘문독인’(文讀人), 즉 ‘글을 읽는 사람’이라고 무척 부러워하며 우대하였다. 불교를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지만, 백제인들은 워낙 높은 이상세계를 추구하였던 터라 금세 불교에 정통하게 되어 교리는 물론, 복합적인 불교문화까지 일본에 능수능란하게 전해주었다. 그 결과 나라를 중심으로 한 일본 중서부 긴키 지역에 고대 일본문화의 발달에 큰 기여를 한 아스카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다.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사(비조사)는 백제에서 건너간 한 권세가의 증손인 소가노 우마코가 세웠는데, 우마코를 비롯한 100여 명이 일제히 백제옷을 입고 준공 봉안식에 참석했다고 하니 그 기세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공주 도읍 시대를 이어 태평성대를 누리던 사비 도읍 시대에는 백제 문물이 글자 그대로 홍수처럼 일본에 밀려들었다. ‘수인’(手人)이라 불린 백제의 직능공들이 수준 높은 공예기술과 예술을 전수하였다. 아스카문화의 정수인 호류사(법륭사)는 백제 장인들이 지은 18만여평의 대사찰로서 금당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고류사(광륭사)에 봉안되어 있는 일본 국보 1호 목조 반가사유상은 그 재료가 한반도에서 나는 적송일 뿐만 아니라, 그 외모가 우리 국보 83호인 금동반가사유상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시가현 오미신궁 앞마당에 있는 일본 최초의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든 사람도 백제 장인이며, 이 궁전 옆에 최초의 국립대학 격인 권학당을 짓고 왜인들을 교육시킨 사람도 백제인이다. 아직도 일본 땅 곳곳에는 그때 백제인들이 만든 저수지인 ‘백제지’가 남아 있다. 실로 일본의 정신문화와 물질문화의 구석구석에 백제의 손길이 가닿지 않은 곳이 없다. △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동제 칠자수대경(6세기 전반,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004, 76쪽) 그러한 사실을 실증하는 수많은 유물 중에는 이른바 ‘칠지도’(七枝刀, 七支刀)라는 특수한 유물이 있다, 그 특수성이란 유물의 문화사적 가치보다는 정치사적 의미가 견강부회되기 때문이다. 나라현 덴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에는 국보로 지정된 ‘칠지도’(길이 74.9㎝)란 보물이 ‘판도라의 상자’ 같은 특수상자 속에 갇혀 있다. 양면에는 모두 61자(앞면 34자, 뒷면 27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마모된 글자가 4자(앞면)이고, 애매한 글자는 2자(앞뒤 각 1자)다. 오래된 금속유물의 명문치고는 보존상태가 꽤 양호한 편이어서 그 판독에는 큰 문제가 없을 성싶다. 값어치로 보아 평범하다면 평범한 유물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느날 나라의 운세와 자존심을 건 보물로 둔갑하여 그 실체를 둘러싸고 한·일 양국은 한 세기가 넘게 지루한 갑론을박의 논쟁을 벼리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논쟁의 발단은 일본 쪽이 이 유물에 관한 유일한 문헌인 〈일본서기〉의 날조된 기록을 인용해 그것이 백제의 ‘헌상품’으로서, 왜가 4세기 중엽부터 약 200년 동안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지역(임나)을 통치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물적 증거가 된다고 강변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일찍이 이 신궁의 대궁사(주지)이자 〈대일본사〉 편찬자의 한 사람인 스가 마사토모는 1874년부터 4년동안 이 유물에 관한 조사를 하고서도 10여 년이 지나서야 명문에 관한 메모를 작성했고, 다시 20여 년이 지나 그가 숨진 뒤 출간된 그의 전집에 조사메모가 수록되었다. 그 사이 도쿄제국대학 교수 호시노 히사시는 신궁의 한 궁사에게서 넘겨받은 메모에 근거해 ‘칠지도고’(1891년)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그는 〈일본서기〉에 진구 49년, 즉 369년에 왜가 가야의 일곱 나라를 정복하여 백제에 주었더니, 3년 후에 사례하는 뜻에서 백제가 사신을 보내 칠지도와 칠자경을 비롯한 각종 보물을 ‘헌상’했다는 기록을 전거로 이 신궁의 유물이 바로 그 칠지도라고 주장했다. 스가가 신궁서 발견 당시엔여섯갈래 창 ‘육차모’로 적혀혹시 고대사 왜곡 위해칠지도로 변조한건 아닐까 신궁 유물의 실체를 밝히는 데 중요한 의미를 띤 제작연대 문제에서 일본 쪽은 명문에 있는 연호인 ‘태(泰)□4년’을 초기에는 중국 서진 태시(泰始) 4년으로 보고 268년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다시 동진 태화(泰和) 4년으로 판단해 369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해가 바로 왜군이 임나를 정벌했다는 해다. 이것은 이 유물의 ‘헌상’을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짜맞추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지금까지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중국에서 출토된, 금은으로 상감한 칼은 모두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제작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또한 칠지도와 함께 ‘헌상’했다는 칠자경(언저리에 원이 7개 새겨진 청동거울)이 6세기 전반의 무령왕릉에서 처음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일본에 보낸 칠자경이 4세기 후반에 만들어질 리가 만무하다. 따라서 칠지도를 369년에 만들었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가정이다. 이러한 맹점과 더불어 〈일본서기〉가 전한 칠지도와 신궁에서 발견된 유물이 같은 물건인가 하는 데 대해서도 의혹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논란에서는 이 문제가 소외되어 왔다. 원래 스가가 신궁에서 발견할 때 물품목록에는 분명히 ‘육차모’, 곧 여섯 갈래(가지)의 창이라고 기재되어 있었으며, 그는 이 이름으로 메모하였다. 그리고 유물은 가장자리가 얇고 중심부가 두꺼워 칼보다는 창이나 검에 가깝다. 그뿐만 아니라, 일견하여 유물은 ‘7지’, 곧 일곱 가지(갈래)가 아니라 몸체에 붙은 여섯 가지가 엇갈려 배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모두들 몸체까지 합쳐서 ‘칠지’라고 하는데, 몸체가 어떻게 가지일 수가 있는가. 상식 밖의 얘기다. 그런데도 신궁 유물에는 ‘칠지도’란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이것은 도대체 무슨 영문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720년께 편찬되었다가 임진왜란 직후 필사본으로 발견되어 고대 한국과의 관계를 많이 왜곡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일본서기〉의 조작기사를 합리화하기 위해 누군가가 여섯 가지를 일곱 가지라고 우겨대면서 명문 중의 ‘육차모’를 ‘칠지도’로 변조했다고 지적한다면 이것이 과연 무리일까. 이 대목에서 거의 같은 시기(1884년)에 일본 육군 참모부가 나서서 ‘광개토대왕비’에 석회칠을 하고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왜도해파’(倭渡海破), 곧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했다’는 4글자를 위작했다는 신빙성있는 일설을 상기하고, 4년 전에 일본 구석기문화를 70만년 전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신의 손’이라는 한 ‘고고학자’가 가미타카모리 유적지에 ‘유물’을 몰래 파묻다가 들통이 난 사건에 유념하게 된다. 이제 ‘칠지도’는 그 위증을 접고, 대신 육차모가 나서서 역사의 실상을 실토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