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만남의 인연을 맺어준 허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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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만남의 인연을 맺어준 허황옥

관리자 0 5261

(8) 만남의 인연을 맺어준 허황옥


△ (좌로부터)수로왕비 허황옥 영정·수로왕 영정

천축국 공주
임찾아온 뱃길2만리

2천년 전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로 이 땅에 온, 현숙한 외방 여인 허황옥(許黃玉:허왕후)은 지금도 우리 속에 살아 있다. 2년 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에서는 36억 아시아인의 하나됨을 상징하여 수로왕과 허왕후의 만남이 재현되었다. 해마다 치러지는 김해의 수로제에서 왕은 왕후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몇 해 전에는 인도의 한 점성가가 한국에서 차기 ‘구국의 큰 별’은 가락 김씨 가문에서 나올 것이라는 솔깃한 점괘를 내려 대선 정국에 흥미를 더한 일도 있었다. 모두가 시조 할머니의 가호와 보우를 비는 발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허황옥은 살아 있는 설화의 주인공으로 오늘날까지도 맥맥이 전승되어 오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설화의 얼개를 보면, 16살의 아유타국(阿踰陀國:아요디야) 공주 허황옥은 하늘이 내린 가락국 왕을 찾아가 배필이 되라는 부모의 분부를 받들고 기원후 48년에 2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붉은 돛을 단 큰 배를 타고 장장 2만5천리의 긴 항행 끝에 남해의 별포 나룻목에 이른다. 영접을 받으며 상륙한 다음 비달치고개에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르고는 장유사(長遊寺) 고개를 넘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행궁에 가서 상면한다.


하늘이 내린 황금알에서 태어나 배필도 역시 하늘이 점지할 것이라고 믿어오던 가락국 시조 수로왕은 허황옥을 반가이 맞이한다. 둘은 2박 3일의 합환식(결혼식)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온다. 그 후 140여 년을 해로하면서 아들 10명과 딸 2명을 두었는데, 둘째와 셋째에게 왕비와 같은 허씨 성을 따르게 하여 그들이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아들 가운데 7명은 지리산에 들어가 선불이 되고, 왕후는 189년 나이 157살에 생을 마감한다. 한국의 ‘국제결혼 1호’로 피의 만남(섞임), 곧 혈연이다. 그 만남이 있었기에 수백만 김해 김씨와 허씨가 왕후를 시조 할머니로 모시고, 오매불망 할머니의 고향을 찾아가기도 한다.


사실 허황옥설화는 수로왕의 천강난생(天降卵生) 같은 신화소는 거의 없고, 역사적 사실에 바탕하였거나 그것을 반영한 설화다. 단, 어떻게 그 시대에 멀고먼 인도에서 어린 나이에 배를 타고 올 수 있었는지, 왕후의 내한이나 불교적 행적을 말해주는 물고기 무늬나 석탑 등은 후세의 ‘조작’이 아닌지 등등 몇 가지 왕후의 정체성과 관련된 논란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논란을 내용별로 묶어보면, 기원전 3세기 인도 갠지스강 중류에서 크게 번성한 태양조 불교국 아요디야에서 왔다는 설, 아요디야에서 중국 쓰촨(사천)성 푸저우(보주)를 거쳐 양자강 하구에서 황해를 건너 온 일족이라는 설, 타이 방콕 북부의 고대 도시 아유타와 관련이 있다는 설, 일본 규슈 지방에서 도래했다는 설, 기원초 중국의 전후한 교체기에 발해 연안에서 남하한 동이족 집단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종합하면, 다들 외래인이라는 데는 견해를 같이하고 있으나, 외국 어디인가에서는 크게 인도와 비인도의 두 지역으로 나뉜다.


달마가 서쪽에서 왔듯이 열여섯살 아유타국 허황옥이 서쪽에서 온 까닭은‥
‘고운임 수로왕과 백년해로 위해서’
불교와 차 씨앗을 싣고 붉은 돛배 남해에 닻내렸네


다들 나름의 전거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나, 몇 가지 현존하는 문헌기록과 유물들을 근거로 하는 인도설이 좀 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주로 상황론에 입각한 연역법을 따르는 비인도설 쪽 논리는 짐짓 미흡해 보인다. 철학과는 달리 역사를 연역법으로 추리하면 왕왕 빗나가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는 항시 일회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만남, 문명의 만남이라는 교류사관에서 본다면, 그녀가 어디에서 온 누구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우리는 세계와 어떻게 만났는가, 세계에 대한 우리 마음의 여닫이는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을 살피는 일이다. 설혹, 그녀의 정체가 허구라고 할지라도 우리네 선조들은 어떻게 그녀라는 ‘허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와 만나고 있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제를 짚어보는 의미인 것이다.


허왕후는 혈연뿐만 아니라, 우리와의 불연(佛緣), 즉 부처님과의 인연, 불교와의 인연도 맺어주었다. 우리의 많은 고대국 건국신화에서 유독 가락국만이 그 건국이 불교와 관련지어진다. 수로왕은 건국한 다음해에 궁성터를 찾아다니다가 신답평(新畓坪)이란 곳에 이르러 이 곳은 비록 땅은 좁지만 16나한과 7성이 살 만한 곳이어서 궁성터에 적격이라고 말한다. 16나한이란 석가의 16제자이고, 7성은 도를 깨우친 사람들로서 모두가 최고의 불자들이다. 그리고 4년째 흉년이 들자 왕은 부처님께 청하여 설법을 하니 흉년을 몰아온 악귀들이 제거되었다고 한다. 가락국을 일명 ‘가야국’이라고 하는데, 이 ‘가야’란 말은 인도어로서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나 코끼리, 가사 등에서 그 어원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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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허황옥이 함께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수로왕 남릉 정문에 새겨진 쌍어문 

수로왕의 이러한 행적은 불교국 아요디야의 공주, 허황옥과의 결합에 따라 가락국 불교의 초전을 더욱 굳혀간다. 특히 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 보옥선사는 가락국의 국사로서 불교의 가락국 초전에 디딤돌을 놓는다. 김해 불모산(佛母山) 장유사에 있는 선사의 화장터와 사리탑 및 기적비, 그리고 왕과 왕후가 만난 곳에 세워진 명월사(明月寺) 사적비에는 선사의 초전활동을 말해주는 유물과 기록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지리산에 들어가 왕후의 일곱 아들을 성불케 하고 칠불사를 짓기도 한다. 그 밖에 가락국의 불교 초전을 알리는 유적유물은 적지 않다. 이 모든 것은 왕후의 도래를 계기로 일어난 불사들이다. 이러한 불사들은 가락국에 국한되지 않고, 200년께는 딸인 묘견(妙見)공주를 통해 일본 규슈까지 파급되니, 백제 불교의 일본 공전보다 무려 250년이나 앞선 일이다.


비인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체로 이러한 불교의 가락국 초전을 부정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시대에 인도로부터 뱃길이 트일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서〉‘지리지’에 보면, 기원전 3세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때부터 중국은 남양 각지와 해상교역을 하며, 기원 전후에는 지금의 부남(扶南:베트남)으로부터 인도 동남단의 황지(黃支:칸치푸람)까지 해로가 개척되어 11개월이면 오갔다. 아직 고증이 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뱃길이 한반도 남해안까지 이어졌다고 한들, 무리 무근이라고 일축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허황옥의 내도는 문물의 교류라는 또 하나의 결과를 가져왔다. 왕후가 소지한 옥합에는 수놓은 비단옷이나 갖가지 금은주옥의 장신구 패물과 함께 차의 씨앗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흔히들 9세기 초 신라 흥덕왕 때 대렴(大廉)이 당나라로부터 차종을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보다 900년 전에 허왕후가 최초로 가져다 심은 차종에서 유명한 죽로차(竹露茶)가 자라났고, 머리, 귀, 눈을 밝게 한다는 등 가야인들이 구가한 차의 9덕은 오늘의 다도로 이어지고 있다. 묘견공주는 불교와 함께 차의 씨앗과 부채도 일본에 건네주었다고 한다. 수로왕은 왕후 일행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빚은 향기로운 술을 대접하고, 무늬와 채색이 고운 자리에서 잠을 자게 배려하며, 비단옷과 보화까지 하사한다. 왕후가 타고 온 배의 뱃사공 15명에게는 각각 쌀 열 섬과 비단 삼십 필씩을 주어 돌려보냈다. 가야인들의 열린 마음과 너그러움이 밴, 첫 인도인들과의 만남이고 나눔이었다.



왕후는 올 때 파신(波神)의 노여움, 즉 풍랑을 막고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배에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싣고 왔다. 높이가 120㎝ 정도밖에 안되는 이 자그마한 석탑은 고려 중엽까지는 김해의 호계사에 보존되어 있다가 지금은 허황옥릉에 인치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귀중한 석탑은 한낱 뭉그러진 돌덩어리 다섯개를 쌓아놓고 무슨 탑이냐고 하는 비아냥거림까지 받아왔다. 그러나 한 후손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오늘은 그 원상이 거의 복원되었다. 김해의 한 병원 원장인 허아무개씨는 200회나 넘게 탑을 찾았고, 돌이 우리나라에 없는 파사석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며, 탑은 초기 인도 스투파의 축소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렇게 보면, 이 석탑이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불탑인 셈이다. 허씨는 평범한 의사다. 역사와 그 해석은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몫이다. 이와 같이 2천년 전 이 땅에 온 허황옥은 혈연과 불연, 그리고 교류의 인연을 맺어준 메신저와 교류인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와 함께 있다. 문명은 이러한 메신저와 교류인들에 의해 알려지며 서로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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