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주년-독립운동 사적지를 가다 ②] 물 위의 피난처, 자싱 관리자 해외기행 0 5271 2019.09.03 15:08 [광복 60주년-독립운동 사적지를 가다 ②] 물 위의 피난처, 자싱윤봉길의사 의거후 국민당 정부가 제공했던 은신처 현존메이완가 76호에 복원된 '대한민국 김구선생 항일시기 피난처'.193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를 떠나 주 활동무대를 항저우(杭州)로 이전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 경찰의 감시와 수색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역사는 말 그대로 파란만장이었다. 윤 의사 의거를 계기로 일본 경찰의 마수가 뻗쳐오자 임시정부는 32년 항저우(杭州), 전장(鎭江), 자싱(嘉興)을 거쳐 37년부터는 중일전쟁의 여파로 창사(長沙), 류저우(柳州), 치장(기江) 등지로 이동하게 된다. 이 기나긴 유랑의 시작이 된 자싱에도 어김없이 임시정부 관련 유적이 남아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항저우에 청사를 두고, 일제의 감시나 정보망을 피해 자싱의 남호(南湖)나 난징에서 국무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자싱에는 중국국민당 정부의 도움으로 피신한 김구의 피난처 두 곳과 이동녕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거처하던 건물이 있었다. 훗날 이 유적들을 자싱시 인민정부가 복원, 문물보호단위(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자싱시는 넓은 호수가 인상적인 한적한 지방 도시다. 사실 자싱시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 아니다. 상하이 출신 가이드가 두 시간여 거리의 이곳에 와서 정작 기념관 위치를 못 찾아 헤맬 만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싱시는 자체 예산을 들여 김구 피난처를 복원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현재도 인근 지역 재정비가 한창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슬럼가나 다름 없었던 이 지역에 오는 10월까지 △ 한·중 우호의 거리 △ 미식 거리 △ 고대 문화거리 등 3대 거리를 조성할 계획이다. 자싱시는 메이완가 일대를 재개발해 10월까지 한중우호의 거리로 만들 계획이다.상하이에서 고속도로로 2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자싱시. 한적한 지방 도시다.일본 경찰에 쫓겨 배 위에서 피난 생활 목조 반양식의 건물 공사가 한창인 메이완(梅灣)가의 76호 입구에는 ‘대한민국 김구선생 항일시기 피난처`라고 쓰여 있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김구 피난처 왼쪽으로 기념관이 나란히 서 있으며 2001년 독립기념관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마친 때문인지 한눈에도 외관이 말쑥했다. 피난처는 2층 목조건물로 1층은 접견실 겸 식당으로 2층은 침실로 재현해 놓았다. 2층에는 김구 선생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형태의 침대와 옷장이 전시되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2층 김구 선생의 방 마루바닥에 있는 나무로 만든 비상 탈출구였다. 선생은 일제의 수색을 피해 이곳 비상구를 이용해 1층으로 내려가 배를 이용, 호수로 피신했다고 한다. 원래는 침대 바로 밑에 비상구가 있었으나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침대의 위치를 옮겨 놓았다. 지금도 집 뒤편 호숫가에는 탈출용 배가 묶여 있어 당시 선생의 고초를 짐작케 한다. 피난처 옆으로 새로 지은 기념관 입구에 자리한 김구 선생 흉상.메이완가 76호 전시관 내에는 임시정부의 활동 내용이 기록돼 있다.76호에서 3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임정요인 피난처.김구선생 방에 있는 비상탈출구를 통하면 집뒤 호수로 탈출할 수 있다. 김구 선생은 아예 이 배 위에서 피난생활을 하기도 했다.상하이 임시정부수립기념일 행사에서 만났던 중국인 소설가 샤녠성(夏輦生)씨는 바로 이 지역 출신. 그는 처녀 뱃사공 주아이빠오(朱愛寶)와 김구 선생의 러브 스토리를 '선월(船月)'이라는 소설로 발표해 국내에도 출간한 바 있다. 실제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이 처녀 뱃사공을 '부부 비슷한 관계'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인 행세를 했던 김구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나기 위해 처녀 뱃사공과 부부인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자싱까지 따라붙자 김구는 아예 선상 피난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훗날 임시정부의 이동을 따라 난징(南京)까지 동행했던 주아이빠오를 김구는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만다. 하이옌 남북호(南北湖)의 `차이칭(裁靑)별장'. 전시관측은 밤중에 도착한 일행을 위해 폐관 시간을 늦추며 기다려 주었다.별장 입구에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의 글씨를 기념비로 세워놓았다.한국 독립운동 도운 중국정부와 중국인 추 선생의 장손 추치위엔(왼쪽)씨가 상하이 총영사관의 초청을 받아 임시정부수립 기념일 행사에 참석해 다함께 만세를 부르고 있다.현상금 60만원이 걸린 김구 선생이 가흥에서 피신해 있으면서도 독립운동을 이끌 수 있었던 데에는 추푸청(褚補成) 선생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하이 법과대학 총장인 추 선생의 도움으로 김구는 광동 출신의 중국인으로 변성명하고 인적 드문 시각에만 이동하며 추 선생의 고향인 자싱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현재 기념관이 자리잡은 메이완가 76호는 추 선생의 수양아들인 천동성(陳桐生)의 별채였다. 추 선생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급기야 김구를 며느리의 친정별장이 있는 하이옌 남북호(南北湖)의 `차이칭(裁靑)별장'으로 이동시킨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서 고생을 마다 않고 친정별장까지 동행해 피난처를 마련해준 추 선생의 며느리를 두고 "활동사진이 있다면 기록해 후세에 알리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추 선생 일가의 도움은 절대적이고 감동적인 것이었다. 이 같은 인연으로 추 선생의 장손 추치위엔(褚啓元)씨는 상하이 총영사관의 초청을 받아 임시정부수립 기념일 행사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기도 했다. 자싱시는 이 하이옌의 별장도 역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으며 입구에 기념관도 꾸며 놓았다. 이 별장 주변 호숫가는 중국 민속촌이 자리 잡고 있어 앞으로 관광지로 연계 개발될 여지가 충분한 곳이다. 사실 대도시도 아닌 지방 도시에 흩어져 있는 유적에 대해서도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점을 선뜻 이해하기 힘들 법도 하다. 상하이 임시정부수립 기념일 행사에서 만난 박상기 상하이 총영사는 "우리 한국인들이 역사 교육 공간으로서 의미가 큰 항일 운동 유적지를 찾고 김구 선생 등을 기리는 것을 중국인들이 무척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낀 적이 많다"고 말했다. 이 같은 정서적 배경에 경제 발전을 원하는 중국인들의 적극성이 더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 했던 임시정부 유적지들이 역사적 가치를 보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긴 유랑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가 활동기반을 잃지 않았던 데는 당시 중국정부와 중국요인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광복 60주년을 맞아 사적지 탐방을 하고 있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