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거석문화사에 우뚝 선 고인돌 관리자 해외기행 0 4961 2018.09.21 14:05 (4)거석문화사에 우뚝 선 고인돌 △ 강화도 하점면 부근리에있는 고인돌인 사적 137호 강화지석묘. 한겨레 자료사진 다음세상 꿈꾼 한반도 불멸의 넋 흔히들 돌을 무지나 아둔함, 그리고 무언에 빗댄다. 그러나 인간의 슬기가 스며들었을 때, 돌은 ‘불멸의 상징’이나 ‘수호신’ 으로 둔갑되기도 하고, 말도 한다. 그래서 버려졌던 큰 돌들이 인간의 주목을 받고, 인간은 이러한 돌들과 긴 시간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는데, 그 역사는 백년도 채 안된다. 거석이란 선사 시대에 무엇을 기리거나 상징하기 위하여 큰 돌로 만든 구조물, 즉 거석기념물을 말하며, 이러한 거석기념물을 수반하는 여러 문화를 통칭 거석문화라고 한다. 원래 거석기념물은 유럽의 대서양 연안지대에서 발견된 거석분묘나 원시 신앙과 관련된 각종 거석유물을 가리켰으나, 지금에 와서는 유럽뿐만 아니라, 그밖의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거석유물들을 통틀어 일컫고 있다. 거석문화는 대체로 신석기 시대에 출현하여 청동기 시대를 거쳐 철기 시대 초기까지의 긴 세월 동안 생존해온 끈덕진 문화다. 그리고 드물기는 하지만 최근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시아의 일부 도서 지방에서는 여전히 거석기념물을 축조하는 이른바 ‘살아있는 거석문화’가 남아있어 생생한 연구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거석기념물은 지역에 따라 제작 편년이나 형태 및 기능이 조금씩 다르지만, 총체적으로 유형화하여 고찰할 수 있다. 긴 기둥 모양의 돌 하나를 지상에 수직으로 세운 멘히르(독석)와 돌기둥을 두 개 세우고 그 위에 평평한 돌을 한 개 가로얹은 트릴리톤, 그리고 돌을 여러 개 세운 위에 평평한 뚜껑돌을 얹은 돌멘이 있다. 일명 지석(支石)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이 돌멘은 좁은 의미에서 거석기념물을 뜻하리만큼 거석기념물 중에서 가장 많고, 또 분포지도 제일 넓다. 그래서 거석문화 연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다음으로, 돌멘 앞에 큰 돌로 출입하는 통로를 만들고 봉토를 쌓은 코리도툼과 기둥 모양의 돌을 여러 줄 배열한 알리뉴망(열석), 여러 개의 돌을 일정한 간격에 따라 원형으로 둘러서게 한 크롬렉(환상열석)도 있다. 그밖에 사람의 형상을 한 석상도 거석기념물에 속한다. △ 자료: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2001) 예나 지금이나 그토록 흔하고 무덤덤한 무생물인 돌이지만, 인간의 요리에 의해 문명의 한 화신으로 탈바꿈함으로써 몇 가지 의미있는 문명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우선, 거석은 고대인의 묘장법(墓葬法)을 증언한다. 돌멘과 같이 그 자체가 분묘인 것도 있고, 묘의 통로로서의 코리도툼도 묘장법의 일부다. 멘히르는 묘의 표지이기도 하지만,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남근숭배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제단 주위에 배치된 거석은 종교적 행사용이고, 원형의 크롬렉은 태양 숭배를 의미하며, 어마어마한 거석은 악마로부터 시체나 영혼을 수호하기 위한 성역(聖域)으로 풀이된다. 이와 더불어 육중한 거석은 위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기능과 의미 때문에 거석기념물은 하나의 보편성을 띤 복합적 문화를 형성하고 장기간 존속되어 올 수 있었다. 거석기념물은 북유럽과 서유럽으로부터 지중해 연안과 인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를 거쳐 멀리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동서 광활한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범세계적 문화권을 이루고 있다. 그 편년을 보면 유럽과 지중해 일원에서는 신석기 시대에, 그 이동 지역은 청동기 이후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자칫 거석문화의 ‘서방기원설’이나 ‘동전설’을 유발시킬 수 있는데, 아직은 그 확실한 전거가 잡히지 않고 있다. 문명의 전파는 단순한 편년의 차이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다. 거석유물은 주로 큰 바다와 인접한 곳에 밀집되어 있으면서 태양 숭배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남방의 양석(陽石)해양문화의 소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소속이야 어떻든간에 거석문화는 오래된 하나의 큰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권은 자생한 것인지, 아니면 교류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자생치고는 문화의 보편성이 너무나 우연히, 그리고 너무나 넓은 지역에서 실현된 것이 못내 의아스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교류에 의한 것이라면, 엄청난 거석이 어떻게 이동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 시점에서 추단할 수 있는 것은 자생설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거석의 이동이 아닌 그 문화 창조자들의 이동이나 만남에 의해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더 크다는 점이다. 이러한 거석문화권의 중추에 우리 한반도가 우뚝 서있다. 중국 동북 요녕 지방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서부의 규슈 지방을 망라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이른바 ‘고여있는 돌’이란 뜻의 고인돌(돌멘)이 수많이 발견되는 까닭에 이 지역을 ‘동북아시아 돌멘권’이란 하나의 거석문화 분포권으로 묶을 수 있다. 이 분포권에서 우리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그 가운데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도 가장 많다. 고인돌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널려있는데, 대개는 무리를 지어 있어 그 분포밀도가 상당히 높을 뿐만 아니라, 형태나 부장품도 다양하다. 알려지기로는 지금 세계에 약 5만 5천기의 각종 거석유물이 있는데, 그 중 고인돌은 그리 많지 않다. 거석유물이 많다고 하는 아일랜드에도 고인돌은 고작 1500 기밖에 안된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약 4만 기(북한에 1만 4~5천 기)가 집중되어 있다. 그 중 전남 지방에서만 발견된 것이 2만여 기나 되니, 정말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고인돌 밀집지역이다. 그래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화순·고창·강화 지역의 고인돌군을 세계문화유산 997호로 등록하였다. 고인돌이 대표적 거석기념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커다란 문화적 긍지를 갖게 된다. △ 영국남부 웨섹스 지방의 환상열석(스톤헨지) 복원도. 태양숭배와 관련된 거석기념물로서 원내구조물은 하지의 일출을 관측하기 위한것으로 보고있음.<선사의 세계>(일본 간담사1994)에서) 한반도에서 출토된 고인돌의 형식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대체로 두 개의 세움돌(지석) 위에 한 개의 가름돌(횡석)을 얹은 탁자식(卓子式, 북방식)과 지상에 놓인 바둑판 같은 가름돌을 몇 개의 작은 돌로 괸 기반식(基盤式, 남방식)으로 대별하며, 그 중간형식으로 덮개돌만 있는 개석식(蓋石式)도 있다. 고인돌과 함께 각종 무문토기와 석기류, 옥, 맷돌, 짐승과 사람의 뼈, 청동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형태와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볼 때, 한반도의 고인돌은 신석시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걸쳐 주로 분묘나 제단으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며, 숭배 대상이나 수호의 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해발 80미터의 고지 위에 홀로 서있는, 가름돌 무게만도 50톤(운반에 4백명 인력이 필요)이 넘는 황해남도 관산리 고인돌 같은 거석은 어떤 권력자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돌멘의 기원에 관해서는 남방의 벼농사 문화와 함께 전해졌다는 남방기원설과 동북아시아에 널리 퍼져있는 상자식 돌관에서 원류를 찾는 북방기원설, 그리고 자생설의 세 가지가 있다. 아직은 어느 것 하나도 논거가 확실치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고인돌이 거석기념물 본연의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다른 지역 거석문화와의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 (위로부터) ○고창 도산리 야산 꼭대기 인가 옆의 북방식 고인돌○남태평양의 이스터 섬에 있는 약 550개의 인면석상.한겨레 자료사진 이와 같이 고인돌은 그 옛날 우리 겨레의 삶을 지켜주고 빛낸 값진 문화유산이기에 후손들은 늘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해 왔다. 전라북도 고창군 지동마을 능선에는 훤출한 위용의 탁자식 고인돌(이른바 ‘도산리지석묘’) 하나가 서있는데, 사람들은 망북단(望北壇)이라고 부른다. 병자호란 때 이 마을에서 태어난 송기상(宋基想)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진군하던 중 굴욕적인 화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되돌아와 호국충절을 다지며 평생토록 이 고인돌을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망북통배’(望北痛拜, 북방을 바라보면서 통한의 예를 올림)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땅의 고인돌 하나하나에는 이처럼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러한 얼과 넋은 겨레의 갈라짐을 넘어딛고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2년 전 남북한 고인돌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던 만남의 물꼬를 트는 순간이었다. 반 세기란 한맺힌 세월이 고인돌의 이름으로부터 그 기원과 편년에 이르기까지 남북한 학자들 사이에 얕지 않은 골을 파놓았다. 본의 아니게 하나의 역사를 놓고 서로 다르게 둘로 써왔다. 어찌 고인돌뿐이랴. 우리 겨레 앞에 나선 숙명적 과제는 하나를 둘 아닌 하나로만 되게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