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박씨 충헌공파(42세) 후 방어사공파(56세) 선영, 조말생묘, 다산유적지, 마재성지 단풍 라이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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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박씨 충헌공파(42세) 후 방어사공파(56세) 선영, 조말생묘, 다산유적지, 마재성지 단풍 라이딩

관리자 0 3247

상강이 지나니 아파트에서 바라본 도봉산 자락에도 어느새 단풍이 내려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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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페달을 돌려 중랑천 동쪽을 타고 한강 용비교에 이르니 응봉산과 건너편 서울숲에도 추색이 완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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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투어를 하다보면 사시사철 가는 길목에 따라 최적의 시기가 있습니다.

그 때를 잘 맞추어야 제대로 여행을 즐길 수 있고 아는 만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때 맞춘 여행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오늘 찾아가는 다산유적지의 생태공원 코스는 아름다운 단풍이 주제입니다.

도봉산 자락의 무수골에 내리는 단풍색깔을 보고 그 때를 결정하면 서울근교는 대부분 잘 구경 할 수 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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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적색 네모 표시가 밀성박씨 선영>
 
워커힐 아랫길~구리 한강공원을 지나 왕숙천과 한강 합수부를 지나면 위 사진의 가파른 오르막이 나옵니다.
이 업힐 정상부에 조말생묘 안내판과 미음나룻길 안내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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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로 이곳에 아래 처럼 "밀성박씨선영입구"라는 큰 표지판이 보이는데 늘 궁금한 차에 오늘은 맘먹고 자전거를 끌고 비포장 언덕 길을 올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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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안내판을 클릭하면 큰 글씨로 볼 수 있습니다.>

박씨 12중조 중 한 분인 밀성군파(密城君派) : 파조 박 척(朴陟) 충헌공(도시조 42세손)의 후손 56세손 방어사 박희민(希閔)의 후손들이 인조 때에 이곳 미음나룻 일대에 세거지를 정하고 살았다는 역사 기록 안내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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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전체를 철책으로 둘러 쌓고 열쇠로 잠금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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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 언덕으로 올라가 묘원 전경을 촬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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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포기하고 서쪽 언덕을 향해 더 올라가 보니 
양주조(楊州趙)씨 선영이 있네요. 묘원이 원형 구조로 구축되어 잘 꾸며져 있습니다. 산봉오리를 중심으로 사방에 묘봉을 조성한 보기 드문 독특한 구조로 단장이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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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니 바로 조창원(趙昌遠, 1583년 ~ 1646년)과 그의 후손들 묘원인데 둘째 딸이 인조의 계비(장렬왕후)로 책봉 되면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로 승진하고 한원부원군에 올랐는데 기록을 보면 이 분도 충남 보령군 오천면(鰲川面) 오천성(鰲川城, 충남도 기념물 제9호) 부근의 남산에 묘가 있다는 지석(誌石)이 발견되었으나 묘는 찾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곳의 묘는 또 다른 두번째 가묘인 셈이고 이후의 후손들이 안장 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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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동쪽 언덕에 있는(
위 위성 사진) 조말생(趙末生, 1370년 ~ 1447년
) 묘와 그 아래에 있는 사당을 탐방한 적이 있는데 그러고 보니 밀성박씨 방어사공 박희민 묘원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는 조말생 묘가 있고, 서쪽에는 조창원의 묘가 있습니다. 사실여부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고종 때(아래 글 참조)에 조말생의 묘와 후손인 서쪽의 조창원의 묘 40여처가 이곳으로 함께 이장 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보게 됩니다.

재밌는 역사는 조말생의 묘가 본래 금곡동 묘적산 끝자락 홍릉이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고종 황제의 능이 들어서면서 이곳 수석동산 2-1번지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향토유적 제 8호로 지정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역사를 잠시 더듬어 보면 ~~
 

『 고종의 민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침을 청량리에 있던 홍릉(淸凉里 洪陵)으로 작정하고 장차 고종께서 승하 하시면 물론 홍릉으로 드실 터인데 홍릉의 산세로 보든지 위치가 좋지 못하여 팔도의 유명한 지관들을 모조리 불러 능침 자리를 고르라 하셨다. 여러 지관들은 전력을 다하여 팔도의 산맥과 지리를 살피었으나 만승의 높은 자리에게 신이의 만년지지가 될 만한 곳이 도무지 없었으므로 당시 고종 황제의 어심이 어지러웠다. 그리하여 드디어 광무(光武) 4년에 이르러 각 지관에게 하명 하기를 새로운 명당지지가 없으면 이미 산소 자리를 쓴 곳이라도 명당자리가 없는지 알아보라는 하교를 하니 여러 지관들은 다시 방침을 바꿔 이조 오백년 내려오는 대관과 문벌 있는 집의 산소 자리는 모조리 보았더니 과연 있다! 바로 금곡에 있었다!

바로 금곡 홍릉! 이곳은 광무 4년 때로 보면 이태조(李太祖) 때에 정승(政丞)으로 있던 조말생(趙末生)이란 재상의 묘지였으니 과연 다시 얻기 어려운 당당한 명당지지였다.

 

이 말을 들은 고종은 즉시 조말생 대감 후손(後孫)되는 이를 입시하라 하명 후 "경의 선조대의 묘지가 명당이라 하니 명성왕후의 능침 자리로 줌이 어떠하냐" 하시었다. 아무리 군명이 지엄하시나 오백년 이래 대대로 40여소의 산소를 쓴 선산을 옮기는 것은 이것이 또 큰 문제이므로 즉시 물러나와 종회를 열고 긴급 협의 후 이것만은 할 수 없다 하여 대궐문 밖에 거적을 깔고 종척 일동이 복지대명(伏地待命)을 하니 이것을 본 고종도 어찌할 수 없어 그대로 용서하고 이래저래 1개월을 지내었다. 그러나 고종은 종래 금곡에 능침을 정할 생각이 간절하니 날로 날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얼마 후에 고종은 다시 조씨 후손을 불러 "경의 선조의 묘지가 그토록 훌륭하다 하니 구경이나 가자" 하니 조씨의 유력한 종척 몇 사람을 데리고 금곡으로 친행을 하여 친히 산세와 지리를 살피시다가 "과연 명산이다,명당이다" 무수히 칭찬 후 다시 용안에 화색을 띄우고 "어디 이렇게 좋으나 혹 무슨 기적이 없는지 땅을 좀 파보자" 하니 근친들이 묘소 부근을 시험적으로 몇 자 파보았더니 아! 이것이 왠일이냐, 깊은 흙속으로 부터 큰 돌이 한 개 나타났고 그 돌에는 "오백년후이조능침지지(五百年後李朝陵寢之地)"라고 뚜렷이 새겨 있었다.

이것을 본 고종은 "보라! 이것은 하늘의 뜻이로다, 할 수 없다, 이 자리는 짐에게 주고 그 대신 경등의마음대로 사패지(賜牌地)를 주리라" 하니 황명과 천명을 어기지 못하는 조씨 일문은 드디어 사십 처의 묘지를 전부 옮기고 금곡 명당지지는 고종이 차지하니 즉시 청량리의 홍릉을 지금의 금곡으로 천봉(遷奉)하게 된 것이다.

 
 덕소 팔당교가 가까워지면서 한강 남쪽의 미사리와 검단산 자락의 단풍을 즐기면서 페달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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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 팔당역 앞에서부터 시작되는 옛날 기차 길이 남한강자전거길인데 
위 지도 적색 경로가 도보나 자전거로 탐방 가능한 경로입니다.
구 능내역 100m 직전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서 우측의 내리막길(다산로 526번길)을 50m쯤 내려가면 우측에 음식점 옆으로 팔당호 강변을 따라 쇠파이프로 만든 아치형 길이 보입니다. 이 길을 따라 연꽃마을로 들어서서 팔당댐 쪽을 건너다 보면 아래 사진처럼 풍광이 아주 좋습니다. 이 길이 다산길 제 2코스로 봄철, 여름철 연꽃이 필 때도 경관이 매우 수려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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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로 760번길을 따라 나즈막한 쇠말산을 넘어가면 조류생태습지- 마현리 오토캠핑장 - 연꽃단지 - 수생식물원-수변쉼터 등 드넓은 다산생태공원을 두루 둘러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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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단풍나무들이 자태를 뽐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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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탐방로가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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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풀 군락도 조성되어 있어서 가을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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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 올라 동쪽의 북한강과 남한강 합수부, 강건너 정암산 자락의 풍광도 조망할 수 있고, 벤치에 앉아 맑은 공기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근처에 편의점과 여러 음식점도 있으니 식사가 가능하고 실학박물관, 다산기념관, 그리고 콜로나19 사태에도 개방된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과 문도사(사당) 그 뒤쪽 동산에 있는 묘소에 올라보면 왜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했는 지를 가늠하게 합니다.

    
 노자
(老子)의 『도덕경』의 한 대목인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조심 조심 세상을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그가 
남인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조상이 당쟁의 중심 인물이 되지 않았음을 자랑했고, 그 아들들에게도 그런 일에 가담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래서 문벌과 당색의 타파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인재의 고른 등용을 역설했습니다만 정작 형제자매들은 당쟁에 희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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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여유당 전체 전경>

다산의 5대조로부터 살아온 이곳(옛지명 소내, 두릉) 생가는 1925년 대홍수 때에 마을과 함께 떠내려가서 옛마을 모습은 잃고 1975년에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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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세가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여유당"이란 당호를 짖고 미완성이었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완성하고 흠흠신서(欽欽新書), 아언각비(雅言覺非), 그리고 최대 역작인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이곳에서 저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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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 회갑 때에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지만, 그를 끔직하게 아끼고 지지했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 하면서 노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으로 1801년 신유사옥 천주교 탄압으로 비화 하면서 정약용은 정약종(丁若鍾)을 비롯 가계의 형제들 즉, 약현(若鉉)·약전(若銓)이 신앙과 배교를 선택 받다가 죽임을 당했으니 말년에 이곳 여유당에서 남은 가족을 지키는 일에 얼마나 고뇌를 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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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때문에 실학박물관과 기념관은 개방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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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사당 문도사, 文度(문도)는 諡號(시호)
純宗實錄(순종실록)에 의하면 다산의 시호는 조선 망국 4일전인 1910년 7월18일(음)에 다산과 박지원에게 뒤늦게 내려졌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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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묘소 전경> 


다산은 1784년 처음 천주교 교리를 들었는데, 자신이 천주교에 입교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천지가 창조되는 시원이나 신체와 영혼 또는 삶과 죽음의 이치에 관하여 들으니 놀랍고 의아하여 마치 은하수가 무한한 것과 같았다. 서울에 돌아오자 이벽을 따라가 <천주실의>와 <칠극> 등 몇 권의 책을 보고 비로소 기뻐하여 마음이 기울어졌다."
 

천주교 신앙을 믿는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강한 비판과 견제를 받아야만 했던 그는 형의 사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40세부터 57세까지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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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유적지를 둘러보고 오르막길을 200여미터 오르다 다시 좌측 길로 이어진 마재성지로 올라갑니다.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698-44 번지 마재마을에 천주교 재단은 2017년 5월27일 "성가정 성지"로 선포합니다.

마재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의 요람인 셈입니다. 정양종.정약전.정약현 정약용 4형제가 중국에서 가져온 '천주실의'를 읽고 천주교의 신앙을 스스로 받아들인 곳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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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재마을의 나주 정씨 형제들은 초기 교회 창설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들 형제들 가운데 초기 교회사에서 대표적 역할을 하였던 정약종과 그의 가족들의 숭고한 순교 신앙의 여정은 그들의 삶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로 하여금 오늘날 마재 마을로 발걸음을 향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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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재가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되기 시작한 시기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이전부터인데 이곳에 있던 나주 정씨 집안의 후손들은 18세기 후반부터 중국어로 된 서학서를 읽게 됩니다. 그중에서 정약전은 1779년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주도로 주어사(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 강학회에 참석하여, 이벽(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1784년에 마재를 방문한 이벽은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함께 배를 타고 상경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 형제 중에 특히 초기 교회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인물은 정약종, 형제는 어머니가 두 분이라서 이복형인 정약현이 있었고, 정약현의 부인은 이벽(1754~1786)의 누이였고, 정약현의 딸 정난주는 황사영(1775-1801)이 남편이었으니 정약현의 사위었습니다. 정약종의 친형제는 형 정약전(1758-1816)과 동생 정약용(1762-1836)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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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종의 어머니는 집안의 신주를 불살랐던 진산의 윤지충(1759-1791, 증조부가 해남윤씨 윤두서)의 고모이니 고종 사촌간입니다.
그리고 조선 최초의 세레자 이승훈(1756-1801)은 정약종의 여동생과 결혼을 했으니 이러한 그의 가문을 보면 그가 천주교 창설과 관련된 인물들과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문을 사랑하고 널리 연구했던 4형제들 가운데서 정약종은 당시의 학인들이 일반적으로 지향하던 과거를 통해 관료로 진출하기를 거부했는데 그는 "과거를 위한 학문은 너무 무게가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완전히 포기했고", 불로장생의 비법을 논하던 도교에 탐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뒤인 1786년 형 정약현으로부터 교리를 접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은 후에는 교회의 중추적 인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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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개종은 그의 형제를 비롯한 다른 남인계 인물들 보다도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세를 통해 그가 가지고 있던 지상 천국적 현세나 미래사회에 대한 갈망을 천주교 신앙 안에서 용해시켜 나가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정약종이 초기 교회의 입교자들과 다른 측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주교 신앙에 대한 자신의 회의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망설임과 비슷한 점을 생각하면서, 세례를 받을 때 이 이름을 취하여 세례명으로 삼았습니다.
 

1791년 조상제사 문제로 발생한 윤지충의 진산사건 이후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대거 배교 했습니다.
그에게도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라는 압력이 들어왔지만, 그는 천주교 신앙을 계속해서 지켜나갔는데 특히 그의 부친이나 자신의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용으로부터도 신앙의 포기를 촉구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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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서학을 익힐 수 없으니 자신의 죄가 아님이 없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정약종은 교리 지식에 해박하였는데 황사영 <백서>에 의하면, 그는 "성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세어 무엇에나 자상하고 세밀함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영세 입교 후에도 천주교 학문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고, 이 연구가 습관과 성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간혹 한 가지 도리라도 불명한 것이 있으면, 자고 먹는 일마저 잊고서 전심전력으로 이를 사색하여 말 위에서나 배를 타고 갈 때에라도 묵상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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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음력 2월 26일(양력 4월 8일) 서울, 정약종이 참수형, 정약종(아우구스티노)는 그 집안이 탄생시킨 학문에서나 관직에서 뛰어난 사람들로 명망 있는 가문의 후손이었습니다. 1760년에 광주 고을 마재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그의 신중함과 학문에 대한 그의 열의는 주목을 받았다. 』

- 성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일부에 있는 그에 대한 기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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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양근 지방의 박해로 정약종의 가족은 마재에서 서울로 피난하였으며, 이때 정약종의 아내 유소사( 체칠리아)와 아들 정하상과 딸 정정혜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종과 그의 아들 정철상(가롤로)가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자 정약종의 유족들은 5촌 조카의 도움으로 다시 고향 마재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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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친척들의 냉대로 극도의 빈궁 속에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들 가족은 꾸준히 신앙을 키워 나갔으며, 1814년 상경한 정하상은 1816년부터 조선교회의 재건과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후 정하상이 마재에 있던 어머니와 여동생을 서울로 오게 함으로써 일가는 마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바오로), 딸 정정혜(엘리사벳)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앞서 순교한 부친과 정철상의 뒤를 이어 서소문 밖 순교터에서 다시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의 아내 유소사(체칠리아)는 79세의 고령임에도 혹한 형벌을 참아내며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지내다 옥사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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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정약종의 가족 순교자 가운데 유소사 체칠리아, 정하상 바오로와 정정혜 엘리사벳이 요한바오로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정약종과 그의 아들 정철상은 2014년 8월 16일 그들이 신앙을 증언하고 사형을 판결 받았던 땅, 현재의 서울 광화문 광장(당시 포도청 자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전으로 복자로 시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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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의정부교구는 2007년 12월 이곳에 한옥 성전를 마련하였고, 맞은 편의 약종 동산에는 순교자들이 긴칼을 목에 두르고 고통 가운데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던 칼 모양의 십자가, 성모자상, 십자가의 길과 그 길의 끝에서 마주하는 못박히신 청동 예수님의 발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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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 깊은 유적지 단풍을 구경하면서 생노병사를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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