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동아시아의 유리의 보물창고 관리자 해외기행 0 4232 2018.09.21 14:32 (10) 동아시아의 유리의 보물창고 △ 경주 98호 고분에서 출토된 새머리모양 유리물병(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셔블 발기 다래’더 반짝인 카이로의 유리병 11년 전 여름, 숱한 수수께끼를 안고 ‘유리의 길’을 추적하던 한 방송사 취재팀과 함께 그 길의 서단에 위치한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했다. 수소문 끝에 ‘다우르’란 가장 오래된 유리공장을 찾아갔다. 허술하기 이를데 없으나 진열한 수백 종의 오색창연한 유리그릇은 대대로 유리그릇만을 만들어 온 공장의 유구한 내력을 여실히 말해준다. 취재팀은 경주 98호 고분 남분(4세기 후반)에서 출토된 봉수형 물병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대로 하나 만들 수 있는가하고 물었더니, 기능공 아흐마드씨는 하찮은 물음이라는 듯 씩 한번 웃고는 별로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단숨에 대롱불기로 똑같은 물병을 만들어냈다. 10분도 채 안 걸렸다. 구연부가 새의 머리 모양이라 하여 봉수병(鳳首甁)이라고 하는 이 유리물병은 후기 로만글라스계의 전형적인 유리병으로서,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유사품이 발견된 바가 없다. 동아시아에서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이 1500년 전의 유물을 4만리나 떨어진 곳에서 한 기능공이 순식간에 재현하는 기적 같은 일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한마디로 이것은 이 유리그릇의 친정이 바로 그곳으로서 그 인연이 오늘까지도 끈끈히 이어오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알고보니 우리에게는 한낱 유물로만 남아있는 봉수형 물병이 1천오백여 년 동안 이집트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줄곧 만들어지고 써내려 온 일상의 유리그릇이었다. 사실 유리처럼 역사의 사연을 확연하게 증언해주는 물질은 드물다. 다양한 소재와 가공기법으로 만들어지는 유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귀중한 보물로 애지중지되어 왔다. 유리는 언제 어디서나 값진 교역품으로 거래되고 있으며, 한때는 화폐로 대용되기까지 하였다. 지금도 유리는 일상생활의 용기에서부터 첨단과학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될 물질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것은 유리의 독특한 성질 때문이다. ‘불과 모래의 조화’니, ‘모래와 재로부터 태어난 불사조’니 하고 묘사되는 유리는 색깔이 아름답고 가벼우며 투명하여 광명효과가 있으며, 여기에 방수성과 불변성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유리의 제조과정은 복잡하고 우수한 기슬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므로 당대 사회의 과학이나 기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유리는 불변의 소재이기 때문에 어떤 물질에 비해서 당대의 사회상이나 교류상을 입증하는 데 가장 신빙성있는 검증방법과 증거를 제공해 준다. △ 금동제 유리 사리장치(위)와 그 속의 유리잔과 물병(아래). 이처럼 귀중한 유리가 우리나라에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2백여년 전인 초기 철기시대부터 만들어지고, 기원을 전후해서는 동아시아의 유리 보고(寶庫)로 자리매김되었다. 3세기에 저술된 중국의 사서 <삼국지>에는 삼한인(三韓人)들이 금이나 은, 비단보다도 유리를 더 귀한 재보로 여긴다고 씌어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여러가지 유리유물로 미루어 우리나라에서의 유리제품은 크게 장식품과 그릇의 두 가지로 나뉘어지며, 일찍이 기원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재나 기법이 다양하고 그 교류 또한 상당히 광범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리나라 유리가 납-바륨유리, 칼륨유리, 소다유리, 납유리 등 다양한 조성성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외국의 경우 보기 드문 현상이다. 신기한 것은 한 유적에서 서로 다른 성분의 제품이 뒤섞여 발견된다는 일이다. 아마 이것은 여러 지역과의 활발한 교류가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1500년전 4만리밖 카이로의 유리병은 신라 유리병으로 이어지고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최초의 유리제품은 1989년에 부여 합송리 석관묘에서 출토된 길이가 각각 5~6㎝ 정도의 남색 관옥(管玉: 둥근 구슬) 7점인데, 제작연대는 초기 철기시대인 기원전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규슈의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출토된 48점의 관옥은 이 합송리 유리와 같은 성분의 유리구슬로서 한반도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판명된다. 이때부터 삼국시대 전반에 걸쳐 제작된 각양각색의 유리장식품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구슬이 주종을 이룬다. 그 중에서 곡옥(曲玉: 굽은 구슬)은 우리나라 특유의 것이다. 이러한 장식품들은 색깔이나 무늬가 한결같이 아름답고 우아하다. 구슬의 교류와 관련해 신묘한 느낌마저 주는 유물로는 경주 미추왕릉지구 고분에서 출토된 인물문 상감(象嵌)구슬이 있다. 목걸이의 중심 구슬에는 사람의 얼굴과 새, 그리고 꽃무늬가 검정, 빨간, 흰색으로 아주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얼굴의 생김새나 길고 짙은 눈썹 등으로 보아 아리안계통의 서역인임에 틀림없다. 원래 상감구슬은 사람의 얼굴이나 동물, 꽃, 새 같은 동식물의 형상을 구슬 속에 새겨 넣는 일종의 모자이크 무늬의 구슬을 말하는데, 이러한 장식무늬구슬은 대체로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중앙아시아 등 서역 일원에서 일찍이 유행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유물은 서역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짐작된다. 기둥구슬 굽은 구슬 서말 구슬 꿰 만든 보배동아시아 특유의 유리문화를 꽃피우는데‥ △ 이집트 카이로 공장에서 경주의 옛 물병을 보고 1993년 본떠 만든 유리물병(맨위)은 놀라울 정도로 빼닮았다. 가운데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리제품으로 기원전 2세기 이후 발견되는 관옥(기둥구슬)이고 맨아래는 우리나라 특유의 곡옥(굽은 구술)이다. 그런가 하면 백제 무령왕릉을 비롯한 몇몇 유적에서는 전형적인 동남아 유리계통인 소다-석회유리(일명 인도-패스픽유리)로 만든 적색이나 적갈색의 아름다운 구슬이 나와 동남아시아와의 교류 일단을 시사하고 있다. 그밖에 여러 유적에서 나오는 금박구슬(유리 층 속에 얇은 금박을 입힌 구슬)이나 점박이구슬(일명 잠자리눈구슬:표면에 다른 색의 점무늬를 그린 구슬) 같은 것도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에 그 기원을 두고 있거나, 유행되던 것으로서 십중팔구는 교류품이다. 이와 같이 기원을 전후한 초기단계에는 주로 구슬을 비롯한 아름답고 다양한 특유의 장식품을 만들거나 수입하여 우리의 유리제조사를 빛내었다. 그러다가 대체로 4세기 이후, 삼국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대내외적으로 문화의 발달에 관심을 돌리게 됨으로써 전래의 제조기술이나 교류에 바탕하여 유리그릇을 만들어내거나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출토된 고대 유리용기류는 총 80여점에 달하는데, 크게는 고분 출토품과 사리 관련품의 두 가지로 나뉜다. 그 중 출토지가 분명한 22점은 모두가 9기의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연대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말까지의 약 100년간에 해당된다. 고분에서 나온 이러한 용기들은 소재나 제조기법, 장식무늬, 색깔 등으로 보아 거개가 후기 로만글라스계에 속한 것으로서, 4~5세기에 지중해 연안 지방에서 제작된 뒤 흑해를 북상해 남러시아에서 초원로를 따라 북중국을 거쳐 신라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하는 것은 초원로를 낀 여러 곳에서 유사품들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유리용기들은 98호분의 출토품 4점을 제외하고는 그 유사품들이 지중해 주변이나 남러시아, 중부 유럽, 북중국의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모두가 전형적인 후기 로만글라스계 유리용기들이다. 앞에 말한 봉수형 물병은 그 대표적인 일례다. 이러한 사실은 초원로를 통한 유리의 동전설을 뒷받침해주며, 아울러 신라문화가 초원로를 통해 로마문화와 접촉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신라시대에도 유리교류는 계속된다. 그러한 유리용기로는 불국사 석가탑을 비롯한 불사의 사리장치로 쓰인 8점의 용기가 있다. 그 중 1959년 경북 칠곡군 송림사 5층 전탑에서 나온 금동제 사리장치는 희대의 유물로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인 7세기 초에 건조된 이 탑의 중앙부에 안치된 방형금동제 사리장치 속에는 큰 유리잔과 다시 그 속에 작은 녹색 유리병(높이 7㎝)이 들어있다. 유리잔 표면에는 페르시아의 사산계 문양인 환문(環紋:고리모양의 무늬)이 3단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사산계 유리제품이나 제조기법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로만글라스계 용기가 고신라 고분에서 출토되고, 사산계 용기가 통일신라시대의 사리탑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동서 문명교류란 큰 흐름 속에서 고신라문화와 통일신라문화가 지니고 있는 상이성과 그 변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역사의 ‘불사조’라고 하는 유리유물이 많이 남아 있어 우리의 그 옛날 역사, 특히 남들과 어울렸던 역사, 동아시아의 유리보고로 당당했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불과 모래를 ‘조화’시킨 것이 유리라고 할진대, 우리네 역사도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남들과의 조화를 이룰 때가 분명 있었다. 그럴 때 우리는 흥했고, 그렇지 못했을 때 우리는 낭패를 맛보았다. 이것이 유리가 우리에게 주는 엄정하고도 고마운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