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박씨 관향조 약사 - 2009년9월30일 수요일 제33호 관리자 0 3830 0 2018.09.20 14:45 註) 한빛신문 제33호 2009년9월30일 수요일 4면관향조 약사 - 창원박씨(昌原朴氏) 본관의 연원(淵源) 창원박씨는 신라왕족의 후예이다.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적장자인 밀성대군의 후손으로 밀성(밀양)박씨 12중조의 한분인 삼사좌윤공 휘 을재(乙材 - 三司左尹公派祖 시조 37世孫)의 9世孫 영(齡)을 관향조로 한다.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 유화(有華)의 증손으로 고려 공민왕때 창원도호부사(昌原都護府使)를 역임하고, 나라에 큰 공훈을 세워 창원군(昌原君)에 습봉되었고 양정공의 시호를 추증 받아 후손들이 밀성(密城)에서 분적하여 그를 1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창원(昌原)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창원박씨 약사(略史) 관향조 박영(朴齡)의 자(字)는 연수(延壽), 호(號)는 애일헌(愛日軒)으로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휘 정빈(諱 正份)과 한양한씨(漢陽韓氏)와의 사이에 1325년 3월 15일 태어났으며, 도총판창원도호부사(都總判昌原都護府使)를 역임하고 창원군(昌原君)에 습봉되고 옥천의 원덕사와 밀양의 경현사에 배향되었다. 아들 손(蓀)은 대마도를 정벌함에 공이 있어 김해부사를 지냈고, 조선조에 와서 손자 동지(東智)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그의 세 아들 유원(由元), 유정(由貞), 유창(由昌)이 번성 창원박씨의 3대산맥(三大山脈)을 이루었다. 장남 유원의 자(字)는 원서(元瑞) 호(號)는 방유정(放遊亭)으로 태종조에 문과하여 예조참의요 세종조에 가선대부 행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도덕(道德)이 일세(一世)의 사표(師表)가 되어 흥양 용강사(龍岡祠)에 배향되었다. 유원의 아들 태수(泰首)는 사마시에 합격 통정대부 행 용양위부호군 오위장 겸 동지충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태옹(泰顒)은 진사이며 ,손자 언석(彦碩)은 대사헌(大司憲)이고, 세영(世榮)은 이조참의이고, 증손 만근(萬根)은 현감이며, 태수(鮐壽)는 좌승지로 임란에 양포(糧布)를 내놓아 군비를 돕고 용만(龍灣)에서 호가(扈駕)하다가 군중(軍中)에서 순사(殉死)하니 부채를 하사(下賜)하여 귀장(歸葬)토록 하였고 용강사에 배향되었다. 차남 유정의 아들 태식(泰植)은 이조참판이고, 손자 세인(世仁)은 공조참의이다. 증손 대련(大連)은 판관으로 임진왜란에 호가하여 훈련원판관으로 선무원종2등공신으로 삼강절의록에 등재되었다. 대근(大根)은 무과 등제하여 장사랑군자감 직장 행 훈련원 부정을 역임하였다.삼남 유창의 아들 태주(泰柱)는 훈련원판관이고, 손자 영수(永壽), 영년(永年)은 벼슬하지 않았으며, 증손 보한(普漢)은 예조참의이다. 7世孫 지연(枝連)은 문과로 판관이고, 충남(忠男)은 순무사(巡撫使)이고 응오(應鰲)는 임란에 호종하여 이순신 막하에서 승전에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호남 절의록에 등재되었다. 응달(應達)은 형조참판이고 시명은 참봉으로 효행이 있었다. 8世孫 홍세(弘世)는 참봉으로 임란에 금갑도를 지키었고 정유(丁酉)에 창의하여 이충무공을 도와 수훈(殊勳)을 세우고 순절하여 좌찬성에 추증되고 용강사에 배향되었으며 동해삼강록, 호남절의록에 등재되었다. 홍신(弘信)은 수군만호이며 홍립(弘立)은 성균 진사, 이화(而華)는 학행이 있었고 임란에 전공을 세워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중추부사이며, 이명(而明)은 학행과 효우(孝友)가 돈독하여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 이장(而章)은 회령부사(會寧府使)이며 임란에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절의삼강록에 등재되었다. 9세손 응엽(應燁)은 사헌부감찰, 유엽(有燁)은 아버지(휘 홍세, 임란공신)를 도와 공을 세워 자헌대부 행 동지중추부사, 동생 숭엽(崇燁) 역시 형과 함께 아버지를 도와 공을 세우고 통정대부 절위장군 겸 첨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으며, 정엽(正燁)은 아버지(휘 홍세)가 임란에 순절하니 적진에 들어가 적을 격파하고 아버지의 시신(屍身)을 수습 귀장(歸葬) 이충무공이 공(公)의 충효에 감탄하였으며 통정대부 행 훈련원 주부에 증직 되었고, 의엽(宜燁)은 아버지와 형의 뒤를 따라 임란에 참전 전공을 세워 군자감정에 제수되었다. 이들 5부자는 임진왜란에 출전 충과 효를 실천하는 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경(璟)은 문과 정언으로 부제학으로 창의(倡義)하여 무적(茂績)이 많아 장성 창의단(倡義壇)에 배향되었고 성엽(成燁)은 진도군수이고, 현정(鉉鼎)은 부정(副正), 수원(秀元)은 이충무공을 따라 진중(陣中)에서 순절하니 임란공신으로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0世孫 선(愃)은 선교랑 한성부 주부, 신(愼)은 찰방(察訪), 흔(忻)과 름(凜)은 모두 통정이며, 순(恂)은 별시문과 훈련원 판관, 등(憕)은 통정대부 동지중추부사, 항(恒)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황(惶)은 찰방(察訪), 성(惺)은 문장이 세상에 떨쳐 증(贈) 지평(持平)이며, 응진(應珍)은 무과로 훈련원 주부로 병자호란에 호종(扈從)하여 반양(潘陽)에서 전공을 세우고 순절하여 어모장군 훈련원 첨정 겸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1세손 진영(震榮)은 학행으로 증(贈) 가선대부 중추부사, 진빈(震彬)은 효로 정려(旌閭)가 있고, 진걸(震傑)은 무과로 훈련원 주부로 병자호란에 수훈(殊勳)이 있어 좌수사에 증직되었다. 14세손(世孫) 사문(師文)은 문과로 대사간(大司諫)이다. 16세손 찬형(贊馨), 17세손 종율(鍾律)은 진사이다. 창원박씨는 이와 같이 많은 후손들이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창의하여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큰 공훈을 세워 고흥지역 21성씨(姓氏) 141명의 임란공신 중 9명을 배출하며 지역의 명문가로서 대대로 충과 효를 이어 왔다. 집성촌 밀성박씨 삼사좌윤공 대동보에 의하면 관향조 휘 영의 묘소가 창원부(昌原府) 남산(南山) 임좌(壬坐)에 기록되어 있으며 아들 휘 손 역시 창원부 남산 선영하에 있은 것으로 보아 선대조께서 밀양에서 창원으로 이거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휘 손(蓀, 관향조 영의 아들)의 아들 4형제가 각각 포천(長男 弘幹), 함경도 단천, 함흥(次男 弘直), 경기도 장단(三男 弘信), 전라남도 고흥(四男 東智 본명 弘智)으로 이거하였다. 장남 홍간과 홍직, 홍신은 현재 이북 땅에 거주 후손들이 연락이 닿지 않고 있으며 휘 동지의 후손들은 전남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지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1,897가구 6,121명이 거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요 유적 창원박씨 주요 유적으로는 입향조 성균진사 휘 동지(東智)(本名 弘智) 조상을 추모(追慕)하는 유허비각이 마을중심부(대서면 상남리 남양마을)에 자리하고 있으며 입향조 묘역을 수호관리하고 종회 종무소 겸 각종문중 회의장소인 염수재(念修齋, 대서면 화산리)가 있으며 세종조(世宗朝)에 가선대부 이조참판(吏曹參判)의 높으신 관직(官職)과 고흥향교지(高興鄕校誌)효자(孝子)록(錄)에 수위(首位)로 기록된 방유정 휘(諱)유원(由元) 기적비(紀蹟碑)와 임란공신 좌찬성공 휘 홍세(左贊成公 諱 弘世)를 비롯하여 현조를 배향한 성모재((誠慕齋,대서면 상남리 성산)하며 임란공신 박대련, 박응오, 박이장, 박이화 네 충신을 배출한 중파재실 경모재(景慕齋, 대서면 금마리)와 과재공파 현조를 배향한 숭모사(崇慕祠)며 영조조(英祖朝)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신 휘 사문(諱 師文)의 실적비(實跡碑, 동강면 죽산마을)등이 있다.進士公 유허비각 - 전남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 남양마을염수재 - 전남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1984년) 경모재 - 전남 고흥군 대서면 금마리(1988년)성모재 - 전남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1936년) 숭모사(崇慕祠) - 전남고흥군 동강면 죽산마을(1992년)박유원 기적비 - 전남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 박사문 실적비(實蹟碑) - 전남 고흥군 동강면 죽산마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