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박씨의 事蹟 등을 기록한 박유원의 방유정집『 放遊亭集 』1冊 單 관리자 문집 0 9202 0 2018.11.26 18:10 창원박씨의 事蹟 등을 기록한 방유정집『 放遊亭集 』1冊 單이 책은 純祖31年 西紀1831年에 발간 된 방유정집으로,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 헌납, 예조참의 등을 지내고, 세종 때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당시의 집권자들과 뜻이 맞지 않아 사퇴하고 고향(현재 고흥군 대서면 남양리)으로 돌아와서 호를 방유정이라 짓고 스스로 <放遊亭 序>를 썼으며 그 풀이대로 산수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낸 放遊亭 朴由元(1388년~1450)의 淸節之稟을 그린 事蹟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에 금갑도(金甲島, 현재 진도)를 수비하면서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왜적을 토벌하였고, 보성(寶城) 예교(曳橋) 전투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으며, 順天 왜교(倭橋) 전투에서 전사한 찬성공 박홍세(贊成公 朴弘世)의 충절지품(忠節之稟)을 그린 事蹟 등이 수록되어 있다. 末尾 4통의 향교(鄕校) 통문<通文>에서는 두 분의 청절(淸節)과 충절지품(忠節之稟)을 유가(儒家)에서 본 받도록 장보(獎褒)하는 내용이다. <放遊亭 韻>에서는 방유정 박유원과 교류가 있었던 南在, 趙俊, 孟思誠, 陽村 權近, 佔畢齋 金宗直 등과 주고 받았던 詩가 수록되어 있다.1831년 지은 <放遊亭記>와 <參判公 放遊亭 朴由元 事蹟>, <放遊亭 朴由元 自序>, <放遊亭 韻>, <僉正公 朴駘壽 事蹟>, <贊成公 朴弘世 事蹟>, 4통의 <通文>의 順으로 내용을 이룬다. 잘 보이지 않는 것으로 희소 가치가 있다. [참고] 昌原 朴氏 : 중조 박령(朴齡)의 네 손자 중에 막내 손자인 朴東智가 아들 3형제 박유원(朴由元)·박유정(朴由貞)·박유창(朴由昌)을 데리고 지금의 고흥의 속면인 흥양으로 낙향 하면서 관적지인 창원보다 전라남도 고흥 일대에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래서 고흥 일대의 창원박씨 후손들은 그를 입향 파조로 삼고 있다. 가장 오래된 족보인 안동권씨성화보(1476년) 118쪽에는 당시 관직이 오위(五衛)의 정5품(正五品)인 사직(司直)으로 나타나는데 그 직위는 부호군(副護軍)의 하위이고, 부사직(副司直)의 상위직으로 모두 14인이며 오원(五員)이라는 간부사관층(幹部士官層)의 상위를 이루면서 도성 각문(各門) 가운데 일부의 파수 책임을 맡는 등 군사적으로 중요한 책무를 담당 하였다. [참고] 박홍세(朴弘世) - 1550∼1598년(선조 31).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여회(汝恢) 현감 박만근(縣監 朴萬根)의 손자이다. 선조(宣祖) 대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에 금갑도(金甲島,현재 진도)를 수비 하면서 李舜臣을 따라 왜적으로 토벌하였고, 寶城 예교(曳橋) 전투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順天 倭橋 전투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左贊成으로 추증 되었고, 宣武공신의 녹훈을 받았다. 선조 37년(1604년)에 이루어진 宣武功臣은 총 18명으로, 이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1604년에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사람들 중 이듬 해인 1605년(선조 38) 9,060명을 녹훈 하였던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에 포함 되어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