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의병 창의로 장성(오산)남문창의 비문에 오른 文正言 副提學 박경(朴璟) 관리자 0 2407 0 2018.10.11 16:00 호남오산남문창의비(湖南鰲山南門倡義碑) 탁본 -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에 있는 창의비각에서 장성 남문창의 비문을 계속하여 읽어본다. 아, 아! 슬프다. 임진․정유의 난은 우리나라에게 큰 액운이었다. 당시에 많은 군사를 이끌고 큰 진(鎭)을 지키는 자는 모두 쥐처럼 숨고 새처럼 흩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삼경(三京)이 모두 무너지고 선조임금이 의주로 옮겼으나, 오직 호남 일도(一道)만이 전 강토를 온전히 보존하여 조정의 명령이 비로소 통하고 군량의 보급이 끊이지 않았으니, 마침내 나라를 되찾은 공적을 이루었다. 이는 오직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에도 큰 힘이 되었지만, 여러 의사들이 좌우에서 도와준 힘이 매우 크다. 임진왜란 때 조선은 누란(累卵)의 위기에 있었지만 오직 호남이 있어 나라를 구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란 글이 다시금 생각나게 한다. 조헌과 고경명 두 분이 몸을 바쳐 순국하고, 충성과 의리는 해와 달을 꿰뚫고 명성과 위엄은 산악을 흔들었다. 장성 남문의 의거도 그에 버금간다 하겠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왜적을 만나 큰 공을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뜻과 절개는 죽고 살았다고 하여 무슨 다름이 있겠는가. 아! 오천 김경수의 두 아들 김극후와 김극순, 그리고 김인혼, 서홍도, 김언희는 모두 진주성에서 함께 전사했고, 윤진은 입암산성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정절, 윤황, 김부, 유희진, 김성진, 김명 등은 연달아 전사했으니, 가히 제봉 고경명, 중봉 조헌의 충렬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하겠다. 특히 정충량의 여섯 곳(당포․안골․명량․견내량․노량․예교)에서의 승전은 더욱 가상한 일이다. 임진왜란 중에 순절한 장성의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고 있다. 이들의 순절은 조헌과 고경명의 충렬에 뒤지지 않는다. 대개 여러 의병장들은 당대의 이름난 집안 출신으로 혹은 학문으로 혹은 문행으로 드러났으니, 이는 평소에 배운 것이 나타난 것이요, 단지 일시적으로 비분강개하여 목숨을 저버리는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국가에서 유술(儒術)을 중시한 것은 사기를 진작하고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하는데 그 뜻이 있다 하겠다. 그리하여 수 백 년 간 배양한 공이 바로 여기에서 증험되었으니 가히 빗돌에 새겨 후세에 전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이에 사양하지 않고 서문을 짓고 명문(銘文)을 쓰노라. 조선이 유학을 중시한 것이 여러 선비들에게 의(義)의 길을 가게 한 것이니, 이를 빗돌에 새겨 후세에 알리겠다고 홍양호는 그 뜻을 밝힌다. 학행일치! [장성 북이면 사남북길32에 있는 호남오산남문창의비] 그러면 명문(銘文)을 원문과 함께 읽어 보자. 저 임진년 여름에 불길 같은 해일이 몰아쳐 기다란 행렬의 왜적 떼 육지에서 미친 돼지처럼 날뛰네. 까까머리에 옻칠한 이마와 이빨은 옻칠하듯 검고 수많은 배의 연이어진 돛대가 해를 가렸도다. 維壬之夏炎海溢兮(유임지하염해일혜) 長蛇起陸封豕突兮(장사기육봉시돌혜) 有髡其首齒則添兮(유곤기수치칙첨혜) 千颼連檣蔽白日兮(천수연장폐백일혜) 독한 탄환이 뇌성치듯 하고 창검은 춤추듯 번득이니, 부산이 먼저 불타고 동래성도 빼앗겼도다. 화기의 매서움은 바람처럼 빨라 막을 길이 없어 흉한 칼끝이 곧장 서울 궁궐을 범했도다. 毒丸如雷舞長鎩兮(독환여뢰무장쇄혜) 釜山先焚萊城奪兮(부산선분래성탈혜) 火烈風迅莫之遏兮(화열풍신막지알혜) 凶鋒直上指京闕兮(흉봉직상지경궐혜) 여러 고을은 기와가 깨지듯 무너져 버렸으나 오직 제봉 고경명과 중봉 조헌이 충렬을 떨쳤도다. 담양에서 금산에 이르러 차례로 일어났으나 순절하고 멀리 명나라 군대가 파병하여 왔으나 임금은 멀리 피하고 나라는 위태로웠도다. 列郡彼靡如瓦裂兮(열군피미여와열혜) 維高與趙奮忠烈兮(유고여조분충열혜) 自潭至錦次第歿兮(자담지금차제몰혜) 天步遠播邦臲卼自危兮(천보원파방얼올자위혜) 견고한 대나무로 깃대를 만드니 늘름한 깃발이 연이어지고 의기로운 의사들은 함께 피를 뿌려 맹세하고 농사짓던 이들이 농기구와 몽둥이를 들고 용기를 더하여 노령의 남쪽 장성이 제일 우뚝하였도다. 苞桑之擊凜旒綴兮(포상지격름류철혜) 嶷嶷義士共沫血兮(억억의사공말혈혜) 鋤耰白挺勇氣勃兮(서우백정용기발혜) 蘆嶺之南長城屹兮(노령지남장성흘혜) 원근에 격문 날리는 그 소리 맑고 높음이여 메아리쳐 응하여 안개 일듯 모여들도다. 뽑힌 병사 이천 명 죽기로 결심함이여 飛檄遠邇風聲洌兮(비격원이풍성렬혜) 如響之應若霧列兮(여향지응약무열혜) 選卒二千思敢決兮(선졸이천사감결혜) 웅치에서 적을 만나 크게 이겼도다. 진군하여 차례로 용인에 나아가 분을 떨쳐 쳐부수고 명나라 군대가 동으로 내려와 평양을 빼앗았으나 날랜 기병 경계치 아니하여 벽제에서 무너지니 遌賊熊峙牙角脫兮(악적웅치아각탈혜) 進次駒城奮撻伐兮(진차구성분달벌혜) 天兵東下平壤拔兮(천병동하평양발혜) 輕騎不戎碧蹄蹶兮(경기불융벽제궐혜) 장성의병이 웅치에서 적을 만나 크게 이겼다는 점은 사실과 다르다. 웅치에서 적을 무찌른 것은 의병장 김제민인데, 이는 그가 장성의병에 합류하기 전인 1592년 7월이다. 명나라 원수 사기가 꺾여 화의를 제안하니 삼군이 해체되고 북소리마저 멈추었지만, 정예군사 뽑아 절강병법을 익히고 두 괴수 목을 베어 울분을 삭임이여 元帥氣沮和議發兮(원수기저화의발혜) 三軍解體鼓聲竭兮(삼군해체고성갈혜) 蓄銳齊發肄江狾兮(축예제발이강제혜) 馘斷二酋輿憤洩兮(괵단이추여분설혜) 정유재란에 다시 거의하니 때는 팔월이라. 완산과 여산에서 군율을 엄히 하여 진군하고 소사에서 한 번 싸워 싸움을 끝내도다. 팔년 동안 어지러웠던 창칼 거두고 무기를 거두었다. 칼 던지고 갑옷 벗고 돌아와 베옷을 입도다. 丁酉再擧時八月兮(정유재거시팔월혜) 完山礪山行以津兮(완산여산행이진혜) 素沙一膊天討訖兮(소사일박천토흘혜) 八載搶攘干戈撤兮(팔재창양간과철혜) 擲劍解甲反布葛兮(척검해갑반포갈혜) 오직 제봉 고경명과 중봉 조헌 같은 호남의 인걸들이 자기 몸을 잊고 나라에 보답하는 마음 끝내 이루었도다. 죽거나 살거나 그 의는 오직 한가지 인데 백세를 지나도록 그 기상 더욱 높고 선명하도다. 維高與趙南之傑兮(유고여조남지걸혜) 忘身報國心如結兮(망신보국심여결혜) 或死或生其義一兮(혹사혹생기의일혜) 百世之下風激越兮(백세지하풍격월혜) 크고 거센 물결 길이 그쳤으나 아직도 마음 떨림이여 호남의 물길은 동으로 흘러 생생히 넘치고 우뚝 높은 비석은 위대한 절의를 들어냄이여 그 혁혁한 광채는 바로 태사공의 太史의 글이로다. 鯨濤永息尙震恒兮(경도영식상진항혜) 湖水東注流活活兮(호수동주유활활혜) 有石嶄巖彰偉節兮(유석참암창위절혜) 赫赫其光太史筆兮(혁혁기광태사필혜) 홍문관대제학 홍양호 짓고, 홍문관제학 황승원 쓰고, 춘추관수찬관 김이도 전서를 씀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글은 감동적이다. 홍양호는 175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수찬․교리를 지낸 뒤, 1777년(정조 1)에 홍국영의 세도정치에 따른 횡포가 심해지자 경흥부사로 있다가, 홍국영이 실각한 뒤인 1781년에 한성부우윤․대사간을 지냈다. 이후 대사헌․평안도관찰사․이조판서가 되었고, 1799년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했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영조실록〉․〈국조보감(國朝寶鑑)〉․〈동문휘고(同文彙考)〉등의 편찬을 주관했다. 문집인〈이계집〉을 비롯하여〈육서경위(六書經緯)〉․〈해동명장전〉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에 있는 장성 남문창의비를 보고나서 다시 장성군으로 돌아왔다. 군청 정문에도 호남오산남문창의비가 세워져 있다. 장성군청에는 문불여장성비, 백비, 그리고 장성의병비가 나란히 있다. 이는 선비의 고장, 청백리의 고장, 의병의 고장의 상징이다. [장성군청 광장에 복원된 호남오산남문창의비] 이렇게 장성군이 가장 장성군다운 점을 브랜드화 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요즘은 글로컬(Glocal) 시대이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징 세계적인 것이다. 며칠 후에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방문하였다. 1층 전쟁역사실의 “임진왜란에서의 의병활동”판에서 ‘호남오산남문창의비’ 탁본을 보았다. 이곳에 장성의병 활동이 전시되어 있어 흐뭇하다. 탁본을 구경하면서 설명문을 읽는다. 남문창의비 탁본 임진왜란 때 호남 각 고을의 70여 의사(義士)들이 오산(현재의 전남 장성) 남문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정조 23년(1779)년에 호남오산남문창의비문을 짓고 순조 2년(1802)에 비석을 세웠다. 그런데 설명문 중에 한 곳이 틀리다. 정조 23년은 1799년인데 1779년으로 잘못 적혀 있다.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연도가 틀리면 자칫하면 망신스러울 수 있다. 전쟁기념관에서 이를 속히 수정하여야 할 것이다. (부록) 호남오산남문 창의비명(湖南鰲山南門倡義碑銘) (앞면) 湖南鰲山南門倡義碑 諸賢位次(22명) 地主忠定公李貴 盟主同中樞金景壽 義兵將忠剛公金齊閔 副使贈參議奇孝諫 參謀佐郞金弘宇 從事贈參議尹軫 義穀將縣監奇孝曾 從事直長朴璟 都有司訓導徐滾 首倡生員李應鍾 贈參判李守一 別提鄭㦢 贈左承旨鄭雲龍 贈參判金景男 主簿金億鎰 贈左參贊金彦勗 贈執義柳希津 內禁將金麟渾 司宰正尹遑 訓練正金溥 贈參判金弘遠 軍資正洪遠 子弟從事(12명) 副護軍金光宇 同中樞金德宇 直長金溟 參奉金克厚 敎官金克純 察訪李克扶 學生李克揚 贈掌樂正金彦希 學生柳希汶 奉事金曄 縣監金昕 學生金克溫 同倡(32명) 直長金後進 別提金大立 主簿金垓 奉事金重器 參奉金聲振 判官金信男 僉正徐弘渡 參奉金麒壽 奉事朴安東 別提徐挺厚 參奉金蘭 同中樞金德器 學生李元愷 護軍劉德文 主簿鄭忠良 習讀宋廷春 部將鄭得良 學生曺汝一 學生許尙徵 禦侮將軍崔寶義 贈參議洪繼勳 判官金景佑 司僕朴雲 部將朴應春 學生全瑞 學生朴辶省(성) 學生金翼熊 學生金武哲 參奉吳仁甲 學生金國瑞 司果李根 進士金珽 義僧將(9명) 處能 慈惠 義寬 啓黙 德忍 處閒 學仁 戒閒 惠仁 私奴(1명) 愛金 萬曆壬辰二百十一年 壬戌 竪 (측면, 후면) 頭篆 - 有明朝鮮湖南鰲山南門倡義碑 余嘗奉使湖南踰蘆嶺過長城登其南門緬想壬辰擧義之蹟如見諸義士沫血奮擧北首赴難狀爲之/愾然興感而恨未能揚厲于今二百年泯翳不章也乃者湖南諸儒發憤倡論呈于禮部又編當時事實/名曰南門倡義錄將立碑紀功跋涉千里求辭于不侫余受而讀之昔在 萬曆壬辰島夷大擧入寇舳艫/蔽海毒丸利劒觸之皆碎先陷釜山東萊凶鋒直指京城趙文烈首擧義旗與高霽峯金健齋先後摧敗/三南瓦解人心鼎沸長城人鰲川金景壽聞錦山之敗與同郡奇錦江孝諫尹栗亭軫倡義于郡南門發/檄號召於是鄭霞谷雲龍自同郡李四梅應鍾自靈光金白谷弘宇自高敞李隱菴守一自泰仁金瑞石/彦勗自潭陽金梅竹景男金竹軒溥洪松菴遠自羅州鄭月村忄節自咸平金晩休億鎰金退憂垓金海翁/弘遠自扶安奇涵齋孝曾朴竹林璟自光州徐朋來渷自興德尹老坡趪自務安柳執義希津自井邑金/參奉聲振自茂長爭起來應各帥子弟與家僮鄕少年曾子幾二千李忠定貴時爲邑守助成之於是設/壇誓衆推景壽爲盟主鰲峯金齊閔以淳昌縣監擊破熊峙賊聞風來會遂推爲義兵將勒 兵(許尙徵行軍)西/向上書獻策于體察使鄭公澈到稷山遇賊斬數十級(洪系勳金景佑 朴雲朴應春探賊金蘭吳仁甲尤著)前至振威又斬偵倭十/三進軍龍仁(金信男朴安東以繼粮餉)聞 天將李公如松收復平壤乘勝至碧蹄驛爲倭將行長所敗経略宋公應/昌主和禁戰諸義士痛哭捲兵而還退守礪山遏南下之賊奇涵齋聚義穀數千石由水路輸餉于行/在 上嘉之曰凍天颶風千里利涉奇哉于時李四梅聞靈光倅遭喪去官江湖保障不可虛也 還守郡/城衆推爲將癸巳五月 天兵復南下諸義將發檄召散兵李公貴抄選精銳號曰膽勇軍兵勢益張設/奇遮路擒斬賊酋高沛朴儉同又以浙江陣法敎邑兵三百應募者益衆前至咸陽聞晉州被圍諸義士/從復讐將高從厚入晉陽城與健齋力戰死丁酉八月聞南原急諸義將抽壯士百餘人到全州召募兵/粟轉而北上金白谷從 天將解生大破賊于素沙賊走匿傍縣諸將追斬三十餘級奪被俘男女十七/人九月罷兵歸鳴呼壬丁之縕卽東方百六之運也當時擁重兵守大鎭者莫不鼠竄而鳥散三京皆沒/車駕西遷惟湖南一路獲全疆土 命令始通饋餉不絶終成復國之績實惟 皇朝再造之恩而抑亦/諸義士左右扶挈之力若趙文烈高忠烈二公奮身殉國忠義貫日月聲威撼山岳而如長城南門之擧/抑其亞也獨恨不得一當大賊未就雋功而其志其節不可以生死殊觀也况鰲川兩子克厚克純曁金/公麟渾徐公弘渡金公彦希騈首於晉陽城栗亭則死於笠巖役又若鄭月村尹老坡金竹軒柳執義 金/參奉金公溟相繼戰歿可謂無遜於高趙文烈而鄭公忠良六處(唐浦乃梁安骨鳴梁露梁 曳橋)報捷尤可尙矣蓋諸將俱當/代名閥或經術稱或文行著其平日所存不但爲一時慷慨損生比也由是觀之國家之重儒術所以/張士氣也鞏邦基也數百年培植之功於是驗矣 可不勒之石而垂諸後乎遂不讓而爲之序張以辭/ 曰 維壬之夏炎海溢兮長蛇起陸封豕突兮有髡其首齒則添兮千颼連檣蔽白日兮毒丸如雷舞長/鎩兮釜山先焚萊城奪兮火烈風迅莫之遏兮凶鋒直上指京 闕兮列郡彼靡如瓦裂兮維高與趙奮/忠烈兮自潭至錦次第歿兮天步遠播邦臲卼自危兮苞桑之擊凜旒綴兮嶷嶷義士共沫血兮鋤耰白挺勇/氣勃兮蘆嶺之南長城屹兮飛檄遠邇風聲洌兮如響之應若霧列兮選卒二千思敢決兮遌賊熊峙牙/角脫兮進次駒城奮撻伐兮 天兵東下平壤拔兮輕騎不戎碧蹄蹶兮元帥氣沮和議發兮三軍解體/鼓聲竭兮蓄銳齊發肄江狾兮馘斷二酋輿憤洩兮丁酉再擧時八月兮完山礪山行以津兮素沙一膊/天討訖兮八載搶攘干戈撤兮擲劍解甲反布葛兮維高與趙南之傑兮忘身報國心如結兮或死或生/其義一兮百世之下風激越兮鯨濤永息尙震恒兮湖水東注流活活兮有石嶄巖彰偉節兮赫赫其光/太史筆兮/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吏曹判書義禁府事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成均館事世子左賓客 洪良浩 撰 資憲大夫行議政府右參贊兼同知經筵事春秋館事弘文館提學 黃昇源 書 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金履度 篆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