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방송위원(放送委員), 방송주간(放送主幹) (44회) 제7장 골프와 방송중계 관리자 문화예술 0 1156 2022.10.04 21:37 방송위원(放送委員), 방송주간(放送主幹) (44회) 제7장 골프와 방송중계한국 야구, 마침내 세계 정상에 1977년에 이르러 마침내 한국야구는 60년 야구사에 한 전환점을 이루는 이정표를 세웠다. 이해 11월에 중앙아메리카 중부에 위치한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구아’에서 열린 제3회 슈퍼월드컵 세계 야구대회에서 우리나라가 미국과 일본 등 야구 강국을 꺾고 세계 대회 첫 우승의 금자탑을 쌓은 것이다. 세계 대회에 우리 야구가 뛰어든 것은 1975년 캐나다 몬트리얼 대회로, 나는 현지에서 중계방송을 하면서 세계의 벽이 높고 험난한 것을 지적하며, 실력차가 큰 만큼 4위를 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불과 2년 후에 우리 야구는 그 험난한 벽을 넘어 세계의 정상에 우뚝 선 것이다. 우리나라는 준결승에서 일본을 만나 3대 2로 물리쳤고, 최종 결승에서 미국을 5대 4로 이겨 두 경기 모두 한 점차의 짜릿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기쁨을 배가시키며, 60년 한국 야구의 숙원을 풀었다. 국무총리 표창니카라과 세계대회의 선수단은 감독 김응룡, 투수 유남호, 이선희, 최동원, 김시진, 유종겸, 포수 박해종, 심재원, 내야수 김봉연, 배대성, 천보성, 김재박, 외야수 윤동균, 이해창, 김일권, 장효조, 김우근 등이었다. 귀국한 한국 야구팀은 우승컵을 안고 김포공항에서부터 서울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여 시민들 환호에 답했다. 나는 이날 퍼레이드 중계방송을 지켜본 후 선수단을 동양방송 스튜디오로 초청해 직접 인터뷰를 하면서 스스로 깊은 감회(感悔)에 젖었다. 1958년 야구중계방송을 시작한 이래 고교야구 붐에 불을 당겼고, 그렇게 일어선 한국야구가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대회가 열리는 곳마다 뛰어다니며 승리를 외친 내 중계방송의 목소리를 타고 세 번이나 우승을 하더니, 마침내 세계 야구를 제패(制覇)하고야 만 것이다. 나는 나의 야구중계방송에 쏟은 열정이 결실을 맺은 것 같아 홀로 숙연해졌다. 결국 이해에 나는 방송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 야구중계 캐스터들과 함께 / 이장우, 김재영, 원창묵, 유수호 아나운서가 보인다방송위원(放送委員), 방송주간(放送主幹)1964년 동양TV가 시작될 때 우리 간부들의 직급은 김규(金圭) 방송부장 산하의 과장이었다. 나도 아나운서 과장으로 실장 역할을 맡았다. 그 후, 라디오와 TV 아나운서실이 통합되면서 나는 부장으로 진급하여 아나운서실장이 되었는데, 10년 동안 아나운서실장을 맡고 보니 승진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러나 무슨 타이틀로 승진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다. 나는 계속 아나운서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방송위원이라는 명칭을 찾아냈고, 직급은 부국장(副局長) 대우로 결정이 났다. 그래서 나는 1973년에 우리나라 방송계에서는 생소했던 방송위원이 되었고, 아나운서 실장 자리는 박노설 차장에게 넘겼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다시 승진 얘기가 나왔고, 이번에는 방송주간(放送主幹)이라는 이름으로 국장(局長) 대우라는 직급이 주어져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위원과 방송주간이 되었다. 이때 내 방송은 중앙일보 논설위원실 옆에 있었고, 홍용기 위원, 봉두완 위원, 김재원 위원과 같이 사용했는데, 중앙일보 김승한 주필을 비롯하여 신영철, 이규동, 최정호, 양흥모, 홍사중, 유근일, 성병욱, 이종복, 김영하, 송진혁 논설위원 등과 자주 어울렸었다. 다랑어 이야기 김승한 주필과 나는 가끔 이병철 회장, 홍진기 회장의 점심식사에 참가할 때가 있었는데,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배달해오는 양식(洋式)이나 동방빌딩 지하의 <기꾸(菊)> 라는 음식점에서 가져오는 메밀국수, 우동의 맛은 각별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일본 메밀국수와 일본 우동 맛이 나는 음식을 먹어볼 수 있었다. 하루는 내가 “이 음식은 독특하고 맛이 있는데, 국물 맛을 어떻게 내는 것일까요?” 하고 질문을 했는데, 홍진기 회장께서 좋은 질문이라며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다. ▲ 홍진기 회장주 재료는 ‘가쓰오’라는 다랑어를 말려서 대패로 얇게 썬 것인데, 이것을 알맞게 넣어야 비리지 않고 제 맛이 난다고 하시면서 그 비율은 물론, 다랑어는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대마도 근처에서 잡히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씀까지 자세하게 말려주셨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병철 회장께서도 “다랑어가 어떻게 생겼노?”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홍진기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백과사전을 들고 들어오시더니 그곳에서 다랑어를 찾아 이 회장님과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며 설명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 분은 그렇게 모든 면에서 학구적이었고, 말 그대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하셨다. 나에게 다랑어에 얽힌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내가 프로 야구 해태타이거즈의 단장으로 있을 때, 선수들과 함께 일본 시고꾸[四國] 지방의 고찌[高知]로 전지훈련을 간 적이 있었다. 고찌는 옛 지명이 도사[土佐]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싸움 개, 사나운 개로 알려진 도사견[土佐犬]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시꼬꾸라는 섬의 태평양 쪽으로 면한 가장 큰 항구도시인 고찌는 겨울에도 따뜻해서 일본 프로야구 팀들도 전지훈련을 많이 오는 곳이었는데, 해태타이거즈 팀은 자매결연 관계에 있던 일본 한큐[阪急] 브레이브스 팀과 함께 그곳으로 전지훈련을 갔던 것이다. 우리가 전지훈련 온 것을 환영해서 고찌 시장(市長)이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어주셨는데, 그때 나온 주요리(主料理)가 ‘가쓰오 다다끼’였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에 와서 오사카에 들르는 일이 있을 때면 가쓰오 다다키라는 요리 이름이 눈에 많이 띄어 한번 먹어보고 싶었는데, 바로 그 요리가 나온 것이다. 더구나 가쓰오 다다키의 본고장이 바로 고찌라는 설명을 들으며 나는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가쓰오 다다끼는 아무나 만들 수 있는 흔한 요리가 아니었다. 먼저 알맞은 크기의 다랑어를 골라 내장을 모두 빼내고 아주 강한 불에 알맞게 돌려가며 구워, 겉은 타고 속은 생선회 같은 기분이 들도록 하고, 또 속과 겉 사이는 익은 생선 맛이 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세 가지 맛이 한꺼번에 느껴지도록 구워서 잘라 놓은 것이 이 요리였다. 여기에다 일본 사람들이 싫어하는 마늘 다진 양념을 듬뿍 묻혀서 한 입씩 먹었는데, 대단한 별미(別味)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