孺人 昌原朴氏 烈行碑, 유인 창원박씨 열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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孺人 昌原朴氏 烈行碑, 유인 창원박씨 열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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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창원박씨 열행비 孺人 昌原朴氏 烈行碑

<碑 文>

夫人之生也稟天地生物之心
以爲心惻隱羞惡辭讓是非是也
固無物慾之蔽則四端自若而孝
悌忠信之道不待敎令而行焉衆
人有生之初物慾交蔽乃頹其綱非學問之功
○然無知終不能行在我之所
當行之道也
故三代之隆治敎休明於上人倫明於下綱常之道行焉今也則

不然聖學不明異說競起孝親弟長之道幾乎蔑矣是以憂世道者
○深際玆
鄭斯文燦玉氏謀與多士不忍泯湮先
○懿蹟欲竪貞珉於衢上使其族弟燦
元姪正基齎其家譜
○鄕薦狀謁余以文固辭益勤竟不牢辭按孺人姓朴氏

籍昌原諱在寬女禮賓丞同正諱奇后也生於高宗庚寅稟性和順自幼時聞孝順及
○歸于河東鄭公諱鳳采鳳采卽故士人諱淳成子郡守公鼓齋諱之

末十五世孫也孺人之于歸也舅姑己沒未得逮養恒以是爲恨夫兄內外事
之如舅姑敬君子而處於嫂叔有無共之其於族戚隣里敦睦焉人多譽之家
運無祿夫忽臥病心憂色沮晝則湯進夜則禱天
○其誠力命也無奈竟遭城
崩孺人時年僅二十九允若天地之忽崩日月之無光矣卽欲不從惟以夫血
一脈在襁褓飜然改悟曰徒以同穴不若善養遺孤以承夫祀飮泣抑哀喪葬
以禮自是以後自處未亡七十平生如一日而晝耘則星月而歸家夜績則燈
火以繼晷勤儉致産善課遺孤以繼夫後皓首全節而卒於丙申十二月二十
四日壯哉孺人也如是曠世柯則不可含默故所居寒泉面長具齊還多士朴
淙植具判南曺圭善具鎔祐等二十五人具狀顚末報于綾州鄕校僉君子僉
君子歎美而薦之噫如是卓異固宜竪碑闡揚而今此之盛擧雖曰鄭氏一家
之事如今剝喪彛倫之秋其於扶植世道者豈可曰少之云乎哉忘拙如右銘
曰 天賦和順貞靜在父家孝且敬及
○歸于鄭門執婦道家道正夫病
○其
誠力遭城崩矢不更衆論歸一伐石卓彼節忠江倂
檀君紀元四千三百二十六年癸酉季夏小署節
光山 李炳根 撰 長興 高光烈 書


<번역문>

사람이 태어날 적에 천지생물의 이치를 받아 마음이 되는 사단칠정(四端七情) 곧 사랑하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 이 네가지 마음이 하늘이 주고 우리 사람이 받은 본연의 착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물욕(物慾)의 가리움이 없으면 이 마음이 태연자약하여 효제충신(孝悌忠臣)의 도(道)가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행할 수 있음에도 중인(衆人)은 태어날 때부터 물욕이 가리어 그 선량한 본심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학문(學問)의 공(功)이 아니면 끝까지 그 선량한 마음을 알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을 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은주(夏殷周) 삼대의 성세(盛世) 때에는 위로는 다스림과 가르침이 밝고 아래로는 인륜(人倫)이 밝아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道)가 제대로 행하여졌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성인(聖人)의 학문이 밝지 못하고 그밖에 여러 학설이 다투어 일어남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손히 하는 삼강오륜의 도가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 일을 걱정함이 더욱 깊어가더니 마침 이 때에 정사문(鄭斯文) 찬옥(燦玉)씨가 다사(多士)들과 협의(協議)하여 자기 어머니의 훌륭한 업적을 차마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그 업적을 새긴 비(碑)를 도로변에 세우고저 그 족제(族弟) 찬원(燦元)과 조카 정기(正基)로 하여금 족보(族譜)의 향천장(鄕薦狀)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비문을 청하므로 사양치 못하고 살펴보니 유인(孺人)의 성은 박(朴)씨요 본관(本貫)은 창원(昌原)이니 휘(諱) 재관(在寬)의 따님이며 예빈승동정(禮賓丞同正) 휘(諱) 기(奇)의 후손이다.
고종경인(高宗庚寅:1890)에 출생하니 성품이 순하고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손함이 뛰어났다. 결혼할 때가 되어 하동(河東) 정공(鄭公) 휘(諱) 봉채(鳳采)에게 출가하여 봉채(鳳采)는 곧 고(故) 사인(士人) 휘(諱) 순성(淳成)의 아들이며 군수공(郡守公) 고재(鼓齋) 휘(諱) 지말(之末)의 15세손이다.
부인이 시집옴에 시부모는 이미 돌아가시어 봉양할 수 없음으로 항상 이것이 한이 되어 시숙내외 섬기기를 시부모와 같이하고 남편에게 공경하며 형제간에는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고 그 친척이나 이웃간에 화목하여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불행하게 남편이 문득 병으로 눕게 되었다. 부인이 근심이 되어 낮에는 온갖 약을 다려드리고 밤에는 하나님께 정성껏 기도하여 그 성의를 다하였으나 천명(天命)인지라 하는 수 없이 마침내 남편이 운명하게 되었다.
부인의 그때 나이 겨우 29세였다. 참으로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고 일월이 빛을 잃은 것 같았다. 곧 남편의 뒤를 따라 함께 죽으려 하였으나 남편의 유일한 혈맥인 어린아이가 아직 강보(襁褓:어린 처지에)에 있으니 돌연 생각을 바꾸어 그저 함께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린 아이를 잘 길러 남편의 뒤를 이은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슬픔을 억누르며 장례를 치르고 그후로부터는 미망인(未亡人)으로 자처 70평생을 하루와 같이 지냈다.
낮에는 논밭에 나아가 김을 매고 늦게 집에 돌아오면 밤에는 베를 짜고 등불로 밤을 세워 가산을 이루었다.
어린아이를 잘 길러 남편의 뒤를 이으고 머리가 희도록 만년(萬年)까지 수절(守節)하여 병신(丙申:1956) 년 12월 24일에 별세하였다. 아! 장하도다 부인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보기드문 모범적인 일을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 이웃에 거주하는 한천면장(寒泉面長) 구제환(具齊還) 다사(多士) 박종식(朴淙植) 구판남(具判南) 조규선(曺圭善) 구용우(具鎔祐) 등 25인이 사실의 전말을 서면화하여 능주향교(綾州鄕校)에 아뢰니 능주향교에서 여러 유림(儒林)들이 감탄(感歎)하여 천거하였다.
아! 이와 같이 뛰어난 일을 진실로 비를 세워 들춰냄이 마땅하도다. 이번 성대한 이 일이 비록 정씨(鄭氏) 일가(一家)의 일이라고는 하나 이와 같이 인륜이 타락된 요즈음에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진작(振作)시키는데 그 공이 어찌 적다고 하리요.
그러므로 나의 용졸(庸拙)함을 잊고 이와 같이 서술하고 명(銘)하여 가로되 천품이 유순하고 아름다워(天賦和順貞靜) 처녀시절에도 남달리 부모에 효도하였네(在父家孝且敬) 혼기되어 정문에 출가하니(及○歸于鄭門) 부도를 잘 닦으니 가정이 바로 잡히었네(執婦道家道正) 남편이 병석에 누움에 그 정성을 다하고(夫病○其誠力) 남편이 죽음에 수절하기를 맹서하였네(遭城崩誓不更) 여러 사람 뜻이 한데 모여 비석을 세우니(衆論歸一伐石) 뛰어난 그 절개 푸르게 흐르는 저 충신강과 함께 하리(卓彼節忠江倂)
1993(계유)년 6월 일
광산(光山) 이병근(李炳根) 글을 짓고
장흥(長興) 고광렬(高光烈) 글을 쓰다.

위치 : 전남 화순군 한천면 금전리

건립연대 : 1993년

규 모 : 총높이:2.50m 비높이:1.40m 넓이:0.55m 두께:0.2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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