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 집권시기에 철폐된 고흥군의 용강사와 배향 인물

사적 Cultural Heritage
홈 > 뿌리알기 > 사적
사적

대원군 집권시기에 철폐된 고흥군의 용강사와 배향 인물

관리자 0 510 0

대원군 집권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는 대원군의 집권부터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할때까지의 시기를 가리킨 것이 일반적이다.

 

대원군이 등장하던 당시의 내외정세는 복잡하고 미묘하였다. 안으로는 세도정권이 등장하여 왕권을 배제시킨채 소수의 벌열가문이 정권을 독차지 하였다. 세도정치로 인한 부정부패는 삼정(三政)의 문란을 가져왔고, 그 결과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관기(官紀)는 극도로 문란하여졌다. 세도정권 아래에서 매관매직의 풍습이 만연하여 수령직을 산 수령들은 백성들에게 가혹한 수취를 일삼아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여기에 아전(衙前)들이 지방관들의 부정에 편승하여 농간을 일삼아 사리사욕을 채웠다. 이에 백성들은 불만을 갖고 수령의 가혹한 수탈을 관에 호소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자 소극적으로 유망하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이 저항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특히 경상도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후 삼남지방에 확산되기도 하였다. 흔히 말하는 임술민란(壬戌民亂)이다. 밖으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센 물결이 조선의 종주국인 청(淸)을 유린하였고 동해바다 건너 일본에도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문호를 개방하도록 했다.

 

경상도 진주에서 시작한 임술민란(壬戌民亂)으로 35개 고을에서 탐관오리가 징치(懲治)되었으며 살육과 방화가 계속되었다. 민란을 통하여 백성들은 그들 자신의 울분을 토로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원망의 대상이 된 수령과 향리는 효수되거나 유배 (流配)를 당하였으며 혹은 파직되었다. 이러한 중앙정부의 조처는 백성들의 불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으나 농민의 요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수용하는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란의 봉기는 일단 수습되었다.

 

세도정권 하에서 왕실은 존속하였으나 모든 정치권력은 세도가문에 의해 장악되었다.

마치 왕은 형식적인 존재에 불과하였고 실제 권력은 세도재상에 의해 행사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왕권의 강화와 왕실권위의 회복은 불가능하였다. 실제로 왕의 옹립운동에 관련된 이하전 등이 처벌을 받았다. 즉 철종 13년(1862) 전오위장(前五衛將) 김순성 (金順性) 등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이하전(李夏銓)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운동을 벌였다는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이하전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세도가문에 대한 비난도 용납되지 않았다. 경평군(慶平君)은 철종 11년(1860) 세도재상 김좌근(金左根), 金汶根(김문근) 등을 비난하였다고 하여 작호가 환수되고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왕실은 물론 종친들도 세도가문의 감시와 탄압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철종 14년(1863)년 12월 왕은 후사(後嗣)없이 서거하였다. 모든 정치세력은 왕위계승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때 조대비(趙大妃)의 지명에 의해 흥선군(興宣君)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국왕에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고종(高宗)이다. 왕의 생부 이하응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생모 민씨(閔氏)는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으로 봉작되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고종을 대신하여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곧 흥선대원군에게 위임하였다. 고종 즉위 이후 비록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대원군은 조대비의 명을 받아 정사를 처리하였다.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실권을 대원군에게 넘긴 이후에는 왕의 명을 받아 일을 처리하였다. 따라서 대원군은 고종 즉위 이후부터 하야할 때까지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였다고 생각된다.

 

흥선대원군은 왕의 아버지로서 아무런 관직을 가지지 않은채 모든 권력을 행사하였다. 집권한 대원군은 국내적으로 두 가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었다. 우선 세도정권의 등장으로 인해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과 세도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신진인사를 등용하여 자신의 정치권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삼정의 문란으로 야기된 민란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고 민생 안정을 위한 일련의 재정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 외세의 침입 위협을 막는 것이었다. 안동김씨 중심의 세도정권은 천주교 탄압을 하였고 이는 천주교 교인의 탄압 방지와 종교의 자유를 내세운 외세, 특히 프랑스 군함의 조선 침입의 구실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 서구 국가들은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에 접근하였다. 이러한 외세의 도전에 대원군은 철저하게 맞서면서 조선의 기존체제를 유지하여야 했다.

 

대원군의 정치개혁 가운데 흥양현의 주민은 물론 지방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을 살펴보겠다.

 

먼저 조미(漕米)의 운반을 빌미로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금지하였다. 고종 1년(1864) 1월 조대비는 전라도 영암 나주 조미의 작간(作奸) 고패(故敗)를 엄중 조사하여 선주 사공에게 엄형을 내리고 해당 지방관을 체포하여 처벌토록 하였다. 또 삼남도의 관리에게 명하여 양세(兩稅)를 포장하여 싣고 있는 각읍에 공문을 발송하여 선주와 사공의 삯이 배로 늘어난 것을 없애고 앞으로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것은 선주가 조미를 상납할 때 삯을 마련하기 위하여 공곡(公穀)을 빼돌리고 경저(京邸)에서는 자식(滋殖)의 이(利)를 탐내고 선주 등은 조미의 상납기간이 여유가 있는 것을 이용하여 작간을 하였기 때문이다.

 

고종 1년(1864) 4월 조대비는 전 전라관찰사(前 全羅觀察使) 김시연(金始淵)이 재임하였던 임술년(1862)에 착복한 환량미 16,042석을 상환시키기 위하여 그 가동(家尙)을 구금하여 징봉(徵捧)을 명하였다. 고종 2년(1865) 5월 전라도 나주 등 12읍의 범포(犯逋)한 사람들의 범죄사실과 그들의 생사를 구별하여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고 생존자는 엄히 가두어 독촉하고 도망자는 기한을 정하여 살펴서 조처토록 하였다. 이에 천석 이상을 범포한 옥과(玉果)의 유명율(劉命律)과 삼천량 이상을 범포한 창평(昌平) 박찬식(朴燦寔)을 효수하여 여러 사람에게 경계케 하였다.

 

정부는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적발하여 민폐를 제거하기 위하여 지방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파견하였다. 전라도에 윤자승(尹滋承)이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수령의 부정을 적발하여 처리하고 선정을 베푼 수령을 포상하였다. 암행어사의 파견은 지방수령들의 폐정을 바로잡는데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이에 정부는 암행어사를 증파하여 지방을 분담시켜 신상필벌(信賞必罰)을 강화하고 혁신정치를 이루었다. 전라도는 좌도와 우도로 나뉘어 암행어사가 파견되었다.

 

지방에서 향리의 폐단도 적지 않았다. 대원군도 향리의 폐단을 알고서 이들의 폐해를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대원군 이하응이 집권당시 일찍이 전주아전(全州衙前)들의 습성(習性)을 세가지 폐단중의 하나라고 한 적이 있다. 대개 전주감영(全州監營) 밑에 있는 자들은 평소 모질고 교활하고 호탕하며 거만하다’(황현,『매천야록』권 1)고 말해 왔다는 사실에서 향리들의 지방민에 대한 폐해가 어떠한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대원군은 부정부패를 뿌리뽑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 것이 바로 조선왕조를 확고한 반석 위에 세우는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대원군은 국가재정의 파탄을 막기 위하여 전정(田政)을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였다. 국가재정의 확충을 위해서는 우선 전정에 대한 개혁이 급선무이었다. 전정을 개혁하기 위한 논의는 이미 철종 13년(1862) 삼남지방의 민란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나 아무런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양전(量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고종 4년(1867)과 5년(1968) 각도에 암행어사가 파견되었는데 경상도 경기도 전라도에 다녀온 어사들은 양전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이돈상(李敦相)은 전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양전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양전을 일시에 시행하기 어려우면 먼저 1, 2읍씩 양전을 할 것을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부분적으로 양전을 실시하였다. 양전은 토지대장에 올려있지 않은 땅, 즉 진전(陳田)이나 누세결(漏稅結)을 색출하는데 집중되었다. 지방 토호들의 토지겸병을 금지하고 사점(私占)된 어전(漁箭)을 국가에 환속시켰다. 이 양전사업이 지방에 따라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되지 않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반 양민들만 부담하던 군포(軍布)를 양반에게까지 확대실시 하였다. 양반들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실시하지 못하였던 군포제도(軍布制度)를 고종 1년에 동포제도(洞布制度)로 바꿨다가 고종 8년(1868) 3월부터 호포제도(戶布制度)로 바꿨다. 이로써 균등과세의 원칙 위에서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매호당(每戶當) 2냥씩 납부토록 하였다. 호포제도 실시로 양반들의 반발도 컸지만 대원군은 단호한 자세로 양반들의 반대를 물리쳤다. 흥양현의 양반들도 대원군의 호포제 실시로 매호당 2냥씩 납부하였다고 여겨진다.

 

대원군은 삼정문란 가운데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고 가장 말썽을 일으킨 환곡문제를 개편하였다. 고종 즉위 때부터 조대비의 교명(敎命)으로 환곡(還穀)을 운영하지 않은 자를 엄벌에 처한다고 발표하였다. 또 고종 2년(1865) 『대전회통(大典會通)』을 편찬하면서 환곡을 둘러싼 부정행위를 방지하려고 했다. 환곡 운영에 따른 폐해는 컸으나 환곡을 폐지할 수 없었다. 이것은 환곡이 백성의 어려운 생활을 보조하는 측면도 있지만 국가 재정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고종 4년(1867) 호조판서(戶曹判書) 김병학(金炳學)의 건의를 수용하여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개편하였다. 사창제는 각면의 인구가 많은 대동(大洞, 리)에 설치하여 면민(面民) 가운데 근면 성실하고 부유한 사람을 택하여 사수(社首)로 삼아 사창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전라도에서도 실시되었다. 비록 사창제가 실시되었다고 하더라도 관리의 부정이 완전히 없어졌다거나 농민의 생활이 크게 향상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관리의 부정이 많이 제거되고 농민들의 부담도 경감되었다. 이와 동시 사창의 본곡(本穀)이 제대로 보존될 수 있었고 이식(利殖)을 효과적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대원군은 삼정(전정, 군정, 환곡)을 개혁하여 농민의 부담을 어느 정도 경감시켰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은 삼정의 개혁을 통하여 국가 재정에 상당한 보탬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책이 모두 성공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대원군의 화폐정책은 백성들에게 또 다른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는 경복궁 중건과 프랑스 군함의 강화도 침입(丙寅洋擾)을 막기 위한 군대동원 등으로 새로운 재원이 필요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당백전을 주조하였다. 뒤에는 청전(淸錢)을 수입하여 사용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큰 후유증을 일으켰다. 특히 당백전 주조는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常平通寶), 즉 엽전의 100배에 해당되는 큰 돈이었다.

 

당백전의 주조는 고종 4년(1867) 5월까지 6개월간 계속되어 그 액수가 1,600만량에 달하였다. 당시 통용된 당백전의 실가(實價)는 2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결국 물가를 앙등시켜 백성들의 생활을 압박하였다. 당백전의 주조는 실패하였는데 대원군은 이에 물러나지 않고 국가 재정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하여 청국에서 화폐를 수입하였다. 청전은 청의 법을 무시하고 밀수입하여 사용되었다. 청전도 당백전과 마찬가지로 화폐가치를 하락시키고 물가고를 야기하였으나 대원군의 집권기간동안에 사용되다가 고종 11년(1873)에 중단되었다.

 

대원군의 개혁 가운데 가장 과감하였고 양반들의 강한 저항에 직면하였던 것은 서원철폐였다. 대원군은 고종 즉위 후 조대비의 교명(敎命)을 빌어 의정부로 하여금 전국의 서원과 향사(享祠)의 존폐문제를 협의하여 보고토록 하였다. 그는 고종 원년(1864) 8월 각 지방에 명을 내려 서원과 향사의 폐단을 적발하여 처분하고 사설(私設)이나 남설(濫設)을 엄금하고 사액서원(賜額書院)에 있어서도 정액(定額) 이외의 전지(田地)나 노비는 철저히 조사하여 보고토록 하였다. 서원은 지방 양반들의 자제 교육은 물론 그들의 세력 확장의 기반으로 이용되었다. 많은 서원은 전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면세의 특혜를 누릴 뿐만 아니라 피역자(避役者)의 소굴로 변모하였다. 서원의 유생들은 유통(儒通)이라 칭해지는 연판장(連判狀)을 돌리고 청의(淸議)라는 정치여론(政治輿論)을 조성하여 국정을 비방하고 당론(黨論)에 끼어 들어 물의를 일으켰다. 향사는 특정 지방과 인연있는 사람들과 지방 양반들의 조상을 제사하는 곳이다. 향사에 많은 전지와 노비가 점유되어 있었다. 향사 수의 증가가 늘어나 사회의 비판이 되기도 하였다.

 

서원과 향사 가운데 가장 크게 물의를 일으켜 비난을 받았던 곳은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과 만동묘(萬東廟)이었다. 화양동서원은 묵패(墨牌)를 발행하여 각종 월권을 자행하여 그 폐해가 적지 않았다. 그 폐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사가 주목된다.

 

만동묘(萬東廟)는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에 있는데 묘(廟)를 창건하게 된 것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그 옆에 송시열의 사당(祠堂)을 세웠으니 이것이 세상에서 일컫는 화양동서원이다. 서원의 책임을 맡은 자가 도내의 무단자제(武斷子弟)들을 이끌고 묵패(墨牌)로서 평민(平民)을 잡아다가 때리는 일이 많았다. 그 폐단이 많아서 그들을 가리켜 가죽을 뚫고 골수를 빨아먹는 남방의 좀이라고 불렀다. 그후 100년이 지나도록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수령들은 두려워서 감히 죄책을 묻지 않았다. 대원군이 야인으로 있으면서 이 서원에 들렸다가 유생에게 모욕을 당해 심히 분하게 여기다가 집권하자 그 유생을 죽이고 드디어 그 서원을 철폐하였다.(황현, 『매천야록』 1, 상, 갑오이전)

 

이 기록을 통하여 당시 서원이 지방민들에게 미친 폐단이 어떠하였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대원군의 화양동서원과 만동묘의 철폐는 마치 그의 사감(私感)에 의해서 단행된 것 같으나 대원군은 화양동서원과 만동묘가 지방민과 국가에 끼친 폐단을 염려하여 철폐하였다고 생각된다. 서원에 대한 철폐는 이미 대원군 집권 이전부터 있었다. 즉 영조때 300여개소의 서원이 철폐되었고 철종 10년(1859) 4월 서원의 사설을 금지하는 정령(政領)을 내렸다. 이러한 점에서 서원의 폐단은 일찍이 이에 의해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서원이 끼친 폐단은 화양동서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서원의 유생들이 자행한 비위는 당시 양식있는 유학자들에게 큰 염려가 되었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도 서원의 유생은 금일의 큰 문제거리이며 풍류나 즐기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성난 말을 몰아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화양동서원과 만동묘는 흥양현과 거리가 멀어 그 직접적인 폐단과 관련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원군은 고종 2년(1865) 만동묘의 철폐를 단행하였다. 이어서 대원군의 서원과 향사의 철폐는 일단 고종 5년(1868)까지 계속되었다. 고종 8년(1870) 8도에 명을 내려 선유(先儒) 1인에 대해 2개 이상 첩설(疊設)된 서원이나 향사를 철폐케 하였다. 이 명령에는 사액서원도 포함되었다. 대원군은 선유라고 하더라도 도학(道學)과 절의(節義)가 탁월하여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에만 1개소의 서원 혹은 향사를 인정한다고 하였다. 대원군의 명령을 위반하는 군현이 있으면 해당 수령을 엄벌한다고 하여 서원과 향사의 철폐가 신속하고 철저하게 단행되었다 그 결과 전국에 47개소의 서원만이 남게 되었다.

 

대원군에 의해 철폐된 광주 전남의 서원과 향사는 각 30개와 171개로서 모두 201개이었다. 이를 시군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철폐된 서원과 향사의 지역별 분포

시군명

서원

향사

시군명

서원

향사

광주시

1

15

16

담 양

2

11

13

목 포




무 안

1

8

9

여 수




보 성

2

9

11

순 천

9

3

12

구 례


2

2

나 주

6

25

31

영 암


9

9

광 양


1

1

영 광


9

9

강 진

3

5

8

장 성

2

14

16

고 흥


8

8

장 흥

1

17

18

완 도


1

1

진 도


1

1

함 평

1

14

15

곡 성

1

5

6

화 순

2

9

11

해 남


6

6

광주 전남지방의 서원과 향사는 고종 5년(1868)에 철폐되었다. 다만 사액서원이었던 장성의 필암서원(筆岩書院)만 존치되었을 뿐이었다. 필암서원은 선조 23년(1590)에 건립되고 효종 3년(1652)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 서원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주벽(主壁)으로 하고 양자징(梁子徵)을 배향(配享)하였다. 향사 가운데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 금산에서 전사한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을 주벽으로 하고 그의 아들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와 유팽노(柳彭老), 안영(安瑛)을 배향한 포충사(褒忠祠)만이 존치되었다.

 

고흥군의 경우 향사 8개소가 철폐되었다. 철폐이후 향사와 배향인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흥군의 향사와 배향인물

사 명

소 재 지

훼철연대

복원연대

배 향 인 물

쌍 충 사

도양읍 봉암리

1868

1924

이대원, 정운

운 곡 사

고흥읍 호동리

1868

1960

류청신, 류탁, 류습, 송인, 류순, 송순손,
류충신, 류충서, 류몽인, 송제, 송덕일,
송선, 류척, 류계, 송영

재 동 사

대서면 화산리

1868

1995

송간, 김시습, 송순례, 송대립, 송건,
송희림, 송상보, 송홍연, 송득운, 송진부,
송심, 속석륭, 송명규, 송찬문, 송정규

봉 암 사

과역면 석봉리

1878

1988

김시흥, 김준, 김구룡

안 동 사

포두면 안동리

1868

1970

정극인, 정걸, 정운희, 정덕주, 정효묵

성 산 사

풍양면 양리

1868

1884

이장경, 이조년, 이포, 이인민, 이숭인,
이직, 이사후, 정명원

무 열 사

두원면 신송리

1868

1882

진무성

부 양 사

두원면 성두리


1972년시창

전우, 송경숙, 송형주

충 의 사

남양면 탄포


1980년시창

신덕린, 신포시, 신석, 신영해, 신홍수,
신원방, 신여량, 신여극, 신여정, 신여식,
신산원, 신호원, 신덕성, 신직모

용 강 사

대서면 상남리

1868

복원되지 못함

박유원, 박태수, 박홍세, 진무성

금 성 사

풍양면 보천리


1908년시창

이양승, 이길, 이서원, 이은, 이언,
이수생, 이지증, 이영명, 이계종,
이회, 이경일, 이탄, 이용빈

숭 양 사



1935년시창

박현, 박침, 박눌생, 박은춘, 박응수

덕 양 사

동일면 덕흥리


1924년시창

이건명

자 양 사

도덕면 신양



주자(희)

(전거 : 유림요람, 향교간)    

 

흥양현에 건립된 향사 가운데 현 풍양면 상림리에 있던 대성사만이 존치하였다. 대성사는 공자를 배향하였기 때문에 존속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원군의 서원과 향사 철폐에 대하여 흥양현의 양반들은 극력 반대하였을 것으로 쉽게 추측된다. 양반들의 서원과 향사 철폐에 대한 강한 반대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서원과 사우(祠宇)를 철폐하는데 단호한 자세를 취하였다. 그의 태도는 다음의 사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진실로 백성을 해치는 것은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서원이 우리 나라 선유의 제사나 지내기 위해 있는 것으로 도둑의 소굴이 되었다(이선근, 『한국사 최근세편』, 진단학회편, 1961. p. 183)

 

대원군은 추호도 흔들림 없는 자세로 양반들의 반발을 무산시켰다. 이러한 대원군의 자세에 양반들은 겁내어 근신 칩복(蟄伏)하였다. 후에 일부 유생(儒生)들은 대원군을 동방의 진시황이라 하여 비난하였다. 양반 유생들의 비난과 혹평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의 서원과 향사 철폐는 백성들이 환영하였다. 이는 백성들이 서원과 향사를 내세워 많은 폐단을 야기한 지방에 있던 양반과 유생들로부터 얼마나 큰 고통과 시련을 겪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대원군의 대내 개혁은 당시의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었다. 특히 그의 개혁은 다방면에 걸쳐서 과감하게 이루어졌다. 일반 백성들의 피해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대원군은 기존체제를 파괴하지 않고 기존체제를 보완 유지하여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런한 측면에서 그를 실용주의적 보수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조선을 둘러싼 외세의 도전에 대원군이 어떻게 대응해 나갔는가를 알아보겠다. 지리상의 발견을 통하여 신대륙과 아시아에 진출한 구미(歐美)의 열강들은 한반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찍이 서구열강은 18세기 산업혁명을 달성한 이후 대량 생산된 상품을 판매하는 시장으로서 또 값싼 원료를 공급하는 식민지확보에 혈안이 되었다. 그 결과 영국은 인도를 병합하였고 이어서 미얀마, 말레이반도, 보르네오섬을 그 수중에 장악하였다. 프랑스도 19세기 중엽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였다. 동양의 강대국이었던 청(淸)도 영국의 중국진출을 반대하였으나 영국과의 아편전쟁에 패배하여 영국에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였다. 아편전쟁 후에 체결한 남경조약(南京條約)에 의해 청은 영국에 홍콩(香港)을 할양하고 동시에 광동 복주 상해 등을 개항하였다. 이어서 청은 프랑스와 미국과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은 애로우호 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점령되어 천진조약(1858)과 북경조약(1860)을 체결하여 서구 열강에 굴복하였다.

 

한반도 동쪽에 있는 일본도 미국에 의해 1854년 미국과 신내천조약(神奈川條約)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다. 일본의 문호개방은 미국이 태평양에서 고래잡이 어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강제로 이루어졌다. 즉 미국은 1853년 페리제독으로 하여금 군함을 이끌고 동경만에 가 군사적 위협으로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200년간 유지되온 쇄국정책을 버리고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영국 러시아 화란과도조약을 체결하여 서양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후 일본은 1868년에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면서 근대화에 노력하였다.

 

한반도 주변의 청이나 일본이 외세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였을 때 우리 나라의 해안이나 해변에 출몰한 이양선(異樣船)도 문호개방과 통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흥양현을 비롯한 한반도 연해안에 자주 이양선이 출몰하였다. 서구선박이 최초로 조선 연해에 나타난 것은 정조 11년(1787) 프랑스 군함이었다. 프랑스 군함 2척은 제주도 근해에 출몰한 후 동해 울릉도 주변까지 올라가 조사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조 21년(1797) 9월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Providence)호가 동해안을 탐사하고 동래 용암포를 거쳐 돌아갔다. 순조 16년(1816) 영국 군함 2척(세스트 Alceste호 릴라 Lyra호)이 중국 천진(天津) 하구(河口)까지 갔다가 돌아가는 도중에 조선의 연안을 측량하고 도서(島嶼)에 상륙하였으며 군산만에 입항하기도 했다. 조선에 출몰한 선박은 초기에 탐사나 측량을 하였다. 그러나 외국 선박은 점차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였다. 특히 19세기 후반에 더욱 그러하였다. 순조 32년(1832) 6월 영국 상선 로오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는 충청도 홍주목(洪州牧) 고대도(古代島)에 머물면서 통상과 조난구조에 관한 조약의 체결을 요청하였다. 헌종 11년(1845) 6월 영국군함 사마랑(Samarang)호가 제주도 해안에 나타나 측량하였으며 이어서 우도(牛島)에 상륙하여 가축을 약탈하였다.

 

헌종 11년 흥양현 앞바다에도 외국의 선박이 출몰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주목하여 보자.

 

이달에 이양선(異樣船)이 호남(湖南) 흥양(興陽)과 제주(濟州)의 바다 가운데에 출몰 왕래하며 스스로 대영국(大英國)의 배라 하였다. 이르는 섬마다 곧 희고 작은 기를 세우고 물을 재는 줄로 바다의 깊이를 재며 돌을 쌓고 회를 칠하여 그 방위(方位)를 표하고 세 그루의 나무를 묶어 그 위에 경판(鏡板)을 놓고 벌여 서서 절하고 제사를 지냈다. 역학 통사(譯學通事)가 달려가서 사정을 물으니, 녹명지(錄名紙)라는 것과 여러 나라의 지도(地圖)와 종려선(棕櫚扇) 두 자루를 던지고는 드디어 돛을 펴고 동북으로 갔다(『헌종실록』 헌종 11년 6월 기미).

영국선박이 흥양현과 제주도 바다 가운데 출몰하여 측량하였다. 이 선박은 조선 연해를 탐사하기 위해 출몰하였던 것 같다. 이는 역관이 가서 출몰의 이유를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이나 요청없이 측량 후에 물러갔기 때문이다.

 

Social Login

빠른 링크 Quick Links
사이트 현황 State 20180805
  • 현재 접속자 0 명
  • 오늘 방문자 1,106 명
  • 어제 방문자 2,017 명
  • 전체 방문자 677,314 명
  • 전체 게시물 798 개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