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시조왕릉 비명(新羅始祖王陵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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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조왕릉 비명(新羅始祖王陵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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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維羅之始 =신라 처음에   
 或獻土産 =옥저가 토산말을 바쳐왔네
 天降聖王 =하늘이 성왕을 내리셨내
 享閱六紀 =육십년을 다스리니
 仙桃所誕 =선도 성모가 탄생한
 祚跨千算 =복조가 천년이었네
 大瓠爲祥 =큰 박의 상서 있었내
 于今百世 =지금 백세가 흘러서
 剖而得孩 =쪼개어 아이를 얻어서
 式多雲仍 =자손이 번성하네
 浴則場彩 =목욕을 시키니 빛이 났네
 諸派所傳 =여러파가 전해오니
 鳥蹌獸舞 =새 짐승이 모여 춤을 추니
 厚澤可徵 =후한 은택 징험되었네
 齒纔十三 =나이 겨우 열세 살에
 肇興之墟 =나라를 세운 터에다
 君長六部 =육부의 임금이 되었네
 有廟孔恤=사당을 지어 제사지내니
 德維聖哲 =덕이 있고 성스러워
 恤我英陵 =우리 세종 임금께서
 化以寬厚 =너그러움으로 다스렸네
 義在象德 =그 덕을 상징하셨네
 迪得賢妃 =이에 어진 왕비를 얻으니
 巍巍殿名 =전각 이름 높다랗고
 基生赤異 =그 출생 역시 기이했네
 煌煌王號 =왕의 호칭 빛나네
人謂二聖 =사람들이 두 성인이라 부르니
前後曠典 =전후에 훌륭한 전례
內治克備 =내조를 아주 잘했네
祀宮則告 =전각에서 제사하네
勤民力業 =백성들에게 농사 힘껏 권하니
水旱之歲 =가믐이 든 해에는
足衣與食 =의식이 충분했네
民蒙靈 騭=백성들이 여험을 입네
俗有禮讓 =풍속이 사양과 예를 알아서
父老曰噫 =부로들이 말하기를
國無兵革 =나라에 전쟁이 없었네
餘惠未渴 =남은 은혜 다함이 없다하네
旣服倭奴 =왜구들이 복종을 하고
墓門之側 =묘의 문 옆에다
且즙浪人 =낙랑사람들이 물러갔네
貞珉屹然 = 우뚝 높은 비석 세우네
何以致此 =어떻게 이런 정치 이루었나
王命爲銘 =왕게서 명을 새겨
繄王之仁 =어진 왕이 있어서이네
永垂晩年 =영원히 전하라 하시네
不伐隣喪  =이웃나리 초상에 정벌을 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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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이는 신라 시조왕의 능이다.
옛날 세종(世宗)11년에 처음으로 사당을 세웠으니 대가 주(周)나라에 삼각(三恪)의 의(義)이며 경종(景宗) 3년에 또 숭덕젼의 전호(殿號)를 표시하게 하시고 우리 성상(聖上)27년에 위판(位板)에 왕자를 쓰게 하시고 묘비를 세우게 하시매 관각(館閣)의 신하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시니 왕의 후손인 여러 박씨가 이미 상소하여 윤허(允許)를 얻고 내가 일찍이 대제학을 지냈다 해서 글을 부탁하니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동국사(東國史) 및 장행록(狀行錄) 을 상고 하오니 왕의 성은 박씨요 휘는 혁거세이시니 한선제(漢宣帝) 지절원년(地節元年) 임자(壬子)에 탄생하사 13세에 의젓하게 어른다워서 육촌장이라 하니 그때는 오봉원년(五鳳元年) 四月이다.

이보다 앞서 고조선(高朝鮮)의 유민들이 동해가서 나누워살며 육촌을 이루웠으나 임금이 없었는데 고허촌장이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의 숲사이를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떠오르고 신선(神仙)이 꿀어앉아 절하는 듯한 모습을 보고가서 보니 박과 같은 큰 알이 있음으로 쪼개서 보니 어린 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움으로 동천에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춤추며 기뻐하더라. 육촌사람들이 그 출생함이 심히 신기하다하여 거두워 길렀는데 이제 추대하여 왕으로 모신 것인데 이 박 같은 알은 선도산 의 성모(聖母) 파사소(婆娑蘇)가 낳으셨다 한다. 박으로 성으로 한 것은 방언에 호(瓠)를 박이라 하기 때문이다.

오년봄에 알영을 맞이하여 왕비를 삼으니 왕비도 나실 때에 상스러운 징조가 있었는데 용이 알령정에 나타나서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가 태어나므로  늙은 할머니가 신기(神奇)하다 하여 걷우어 키우고 샘 이름을 따라 이름 하였는데 장성하여 왕비가 되매 또한 덕(德)이 높고 내조의 공이 커서 백성들이 이성(二聖)이라 일컬었다.  八년에 일본이 국경을 침범하려 하다가 왕의 신덕함을 듣고 돌아갔고 17년에 왕이 왕비와함께 육부를 순시하여 농업과 양잠(養蠶)을 장려하시고 19년에 변한(弁韓)이 나라를 받쳐 항복하니 또한 왕의 덕이 감화하여 구순(歸順)한 것이다. 21년에 서울에 성을 싸서 금성(金城)이라 이름하고 26년에 왕궁을 지으시다.


3십년에 낙랑이 국경을 침범 하였다가 밤에 민가에서 문을 잠그지 않고 들에는 곡식을 노적해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말하기를 도덕을 지키는 나라이니 침범할 수 없다 하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 갔으며 38년 표공(瓢公)을 마한에 보내 방문하여 안부를 물으니 마한왕이 대국을 섬기는 예(禮)에 어긋남을 책망하매 표공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이성이 건국하신 이후로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하고 천시에 화합하여 곶간에는 곡식이 가득하고 백성은 사양하는 미덕(美德)을 지킴으로 진한과 변한과 낙랑과 왜인들 까지 모두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思慕) 하나 우리 임금께서 겸손하여 사신을 보내 빙문(聘問)의 예를 닦으시니 오히려 신하들이 간하여 그만 두었는데 그 이듬해 마한왕(馬韓王)이 훙(薨)하매 어느 신하가 왕에게 말하기를 마한이 전날에 우리 신하를 욕보였으니 이번에 그 국상을 틈타서 정벌함이 어떻합니까?  하니 왕이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란의 재앙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진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하시고 사신을 보내 조위?(弔慰) 하였다 53년  동옥저(東沃沮)의 임금이 양마 20필을 올리며 과군(寡君)이 이 남한에 성인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감히 이것을 드립니다 하였다.

이때에 삼국이 모두 전쟁을 일삼았으나 왕은 홀로 인의(仁義)를 행하여 위력을 힘쓰지 않으므로 이웃 나라들이 성덕에 감동하여 속국되기를 원하였다.
61년 갑자(甲子) 3월에 왕께서 훙(薨) 하시니 수는 73세이다. 태자 남해께서 왕위에 올라 이해에 국도의 남쪽에 왕을 장사하고 장사후 7일에 왕비 알영시 도한 훙(薨)하시다.남해왕으로 부터 박씨에게 왕위를 전승하기를 8세이었고 석씨와 김시가 번갈아 전습(傳襲)하게 되었고 서라의 칭호는 지증왕 때 신라로 고쳐서 992년 동안 국조를 이어 갔으나 오직 박씨가 지금까지 번성하여 우리 동국의 대성이 되었으니 그 근원은 경명왕 때 8공자가(8子)있었는데 맏분이 밀성(密城)이요 다음이 고양이요 셋째분이 사벌이요 넷째분이 죽성이니 후에 밀양고령 함양 죽산의 파가 되었고 다섯째분이 사벌 여섯째분이 완산 일곱째분이 강남 여덟째분이 월성이니 상주(尙州) 전주 순천 경주의 관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가장 성하게 나타났고 그외에 별보(別譜)로 된 파도 심히 많아서 다 기록 못한다.

아 ! 시조왕 이야말로 신령하고 인성하신 임금이시었다. 실로 삼한의 첫 번째 임금으로서 하늘이 탄강 하실 때 신기한 상서를 나타내시니 마치 간적(簡狄)이 알을 먹고 설을 낳은 것과 같이 강원이 발자국을 밟고 기를 낳은 것과 같아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인류 사회의 문화가 열리지 못한 시대에 응 하였고 위대하고 뛰어나신 타고난 자질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여 제도를 잘 정비하고 농업과 양잠을 순시하여 부지런히 장려하고 이웃 나라에게 욕을 당하고도 초상을 틈타 쳐들어가지 않아서 먼 나라 사람들이 덕의에 감화하여 스스로 군사를 돌리게 되고 낙랑이 민속의 아름다음에 탄복하여 국경까지 침입 했다가 되돌아 가며 변한이 임금의 덕을 사모하여 나라를 받쳐 황복 하였고 옥저(沃狙)가 양마를 헌납한 것은 월상씨의 꿩을 사모하여 올린 것과 서려가 오(獒:큰개)를 받친 것과 같도다.

이리하여 60년이나 왕위에 계시는 동안 면면히 이어지는 나라의 기초를 닦으시니 장하시고 갸륵 하다. 지금 세대가 요원하나 산천의 웅녀(雄麗)함과 백성과 물산의 풍부함이 오히려 옛날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남아있어 왕이 끼치신 자취를 근본 삼아 후손이 번성하여 그 수가 억만일 뿐 아니므로 나라 안에 사람치고 왕의 내외파의 자손되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므니 더욱 왕의 지극한 덕을 증명할 수 있다. 세종께서는 예악을 닦고 밝히시와 신라 옛 서울에 사당을 세우시고 향축과 폐백을 내리시와 제사 하시니 전대의 임금을 추모하는 뜻이오며 전호(殿號)를 내리시고 위판에 왕자를 쓰게 함이 숭의전과 똑 같이 숭봉하는 융숭한 의전이라 할 것이다.

아 ! 능에 비가 있고 없는 것이 왕의 성한 덕과 큰 공업에 관계 될 것이 없으나 한유(韓愈)가 서원왕의 비문을 지엇는데 그의 인덕을 닦아 뒷 세상에 드리음을 기렸는데 더욱이 시조왕은 신성하신 군주로서 기록에 남을 만한 업적이 언왕(偃王)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우리 성상께서 사신에게 명령하여 비문을 짓게 하시니 대개 역사의 궐문(闕文)에 까지 미치게하여 돌에 기록하여 후세의 임금에게 귀감이 되게 하심이니 비(碑)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 드디어 명 하노니 오직 신라의 처음에 하늘이 신성한 임금 내리시니 선도 성모께서 왕을 탄생 하셨도다. 상서러운 큰 박을 쪼개보니 아기가 나왔기로 동천에 목욕 시키매 광채가 찬란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추니 아름다운 이름 여기서 나왔도다. 나이 겨우 열세 살에 육부의 임금되시매 성스럽고 밝으시와 너그럽고 인후하사 백성이 감화하고 어진 부인 얻으시니 그 분의 태어남도 또한 신기하여 이성이라 우러러서 내치 또한 극진하시다.

백성을 장려하여 생업에 힘쓰게 하매 의식(衣食)이 풍족하고 예양의 풍속 이룩 되고 전쟁이 없으며 나라 안이 고요하다. 이웃나라 항복하고 낙랑 사람 진정하니 어째서 이러한고 임금님의 인덕일세 이웃나라 초상당해 쳐부시지 않으시매 토산물을 올리면서 속국되길 원하더라 60년을 왕위에 계옵시고 천년국조 누리시어 백세 지금까지 후손 번창하여 여러파를 이룩하니 두터운 증명을 이룩함이다. 처음 세운 옛터에 우뚝솟은 사당 있으니 세종께서 덕을 추모하여 세우셨고 숭덕전(崇德殿) 높은 이름과 빛나는 왕자 칭호는 전후의 융숭한 의전(儀典)이 더욱 빛나도다.
참봉이 하는 말에 수한재(水旱災) 있을 때는 백성을 기도하면 영험(靈驗)이 있으므로 부로(父老 : 늙은 백성)들 감탄하여 왕의 은혜 끝없다 한다더라. 묘문 옆에 우둑선 비석 왕명으로 명을 새겨 천만년 길이 전하리라.

대제학 조관빈(大提學 趙觀彬) 글을 짓고
판부사 유척기(判府事 兪척基) 전서를 쓰고
지의금 홍봉조(知義禁 洪鳳祚) 글씨를 쓰다.

註 : (1)문적(簡狄) :계(契)의 어머니 현조(玄鳥 : 제비)의 알을 먹고 계(契)를 잉태 하였는데 후에 소순(소舜)을 보좌(輔佐)하여 사도(司徒)가 되어 백성을 교화한 공으로 상(商)에 대하였는데 후에 은(殷)에 시조(始祖)가 되었다.

(2)강원(姜嫄):후직(后稷)의 어머니 거인의 발자국을 딛고 잉태하여 낳았는데 불양하다하여 골짜기에 버렸더니 우마(牛馬)가 밟지 않고 피하고 개천에 얼음위에 버렸더니 새가 와서 품어줌으로 걷우어 길렀는데 성장하여 나무 심기를 좋아하며 농사 짓기를 즐기므로 제소(帝소)의 농사(農師)가 되어 후직이라 호(號)하고 처음에 버렸다해서 이름은 () 마침내 주(周)의 시조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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