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박씨 분관서(分貫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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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박씨 분관서(分貫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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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계미) 창원박씨고흥파보, pp42~44]


 

[번역문] 창원박씨 분관서(分貫序)

삼한 갑족이라고 하는 이들이 동방에 셋이 있는데 박씨가 그 중 하나이니 그 자취 빛을 더하여 왔으니 박씨는 신라로부터 시작 되어 29세손 경명왕이 아들 8인을 두어 분봉을 했으니 이것이 42파의 본원이다. 자손이 번성해서 천 가지 만 잎새가 나라 안에 만연했고 지금 2000년을 지나는 동안 나라의 사직이 여러 번 바뀌는 틈에 각 파의 흥체와 소목의 차례도 흩어지는 탄식이 없지 아니하고 각 파의 가승이 그 상계를 궐한채 중조로 시작하여 조각 족보를 만드는 이들이 없지 아니하다.


내가 일찍 탄식하기를 산도 주산이 있고 물도 근원이 있다.
사람의 조종이 산수로 더불어 다름이 없거든 하물며 우리 위대한 조상의 후손으로서 파계가 분명치 못한 것은 그 문헌이 부족한 까닭이 아닌가?
지난 기해년에 밀성 종친 성민씨가 성력을 분발해서 동경유사와 각 파의 문헌을 두루 찾아 8대군 56세 이하의 휘 자와 소목을 밝혀 여덟 가닥의 여러 세계의 상계를 상고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를 힘 입어 각 파 세대의 갈림을 훤하게 알게 되었으니 하늘이 명조의 후예를 사랑해서 성민씨를 산 증인으로 내세운 것이 아닌가?


대체로 박씨의 근원은 8군 공자이다. 그 후손의 성하고 쇠함과 세계가 이어지거나 전하지 못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선조로 부터의 계통은 쇠와 돌같아서 달라지는게 아니니 중간에 혹 전하고 전하지 못함이 무슨 손상이 될 수 있는가?
공자의 말씀대로 문헌이 풍족하면 능히 증거를 찾을 수가 있다.
우리 창원박씨는 동정공 휘 기(奇)에서 시작 되었으니 공은 고려 고종 갑술년(1204년)에 문위위 예빈승 동정지 문하시중겸 동북도 안렴사 동평장사 창원군에 훈봉 되었다.


공의 3세손 유화는 고려 충렬왕 무자년(1288년)에 벼슬이 태중대부 감문위 대호군 동평장사에 봉해지고 의창백공이며,
공의 6세손 휘 영(齡)은 공민왕 무신년(1368년)에 도총제 도총판 창원도호부사로 또한 창원군에 봉작되고 시호는 양정이다.
손자 진사공 휘 동지(東智)는 조선 태조 임금 때 진사가 되었고 후릉(綻琮朝) 말년에 벼슬 길을 좋아하지 않아 세 아들을 거느려 흥양(고흥)에 안돈해서 자손의 세거지가 되었으니 이 일로 해서 진사공이 낙향의 조상이 되었다.


아! 옛날 시조왕으로 부터 아래로 나 필원에 이르기까지 63세손 2000여년에 나라의 흥폐 존망이 무수한 겁운을 격었거늘 박씨의 계통은 맑다가 어두워지고 어둡다가 다시 밝아져 세상과 더블어 소멸되지 아니하고 흡사 동아줄이 뀌인 듯 흘트러지지 아니한 것은 어찌 선조가 쌓은 음덕이 전해져 하늘의 융숭한 보답이 아니겠는가?

1917년(丙午) 초여름 시조왕 63세손 필원 지음


※ 註) 계미보서의 한글 번역문 일부가 바르지 못한 문맥이 있어서 관리자에 의해 바로 잡아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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