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흥양) 용강사(龍岡祠)와 무열사 (高興武烈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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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흥양) 용강사(龍岡祠)와 무열사 (高興武烈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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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양 용강사(龍岡祠)와 고흥 무열사 (高興武烈祠) 


무열사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전공을 세운 무장 진무성(陳武晟)장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호남 유림의 발의와 영남 유림의 협찬으로 고종 19년(1882)에 이전에 있던 용강사를 계승하여 건립한 것이다.  

원래는 1826년(순조 26)에 고흥군(흥양현) 대서면 상남마을에 ‘용강사(龍岡祠)’란 이름으로 창건하여 진무성과 함께 창원박씨 3인 박유원, 박태수, 박홍세를 배향하였다. 위키백과 참조.

2021년 9월초까지 이에 대한 관련 史實 기록을 찾지 못하였고, 늘 궁금했던 일은 왜 창원박씨 집안의 사당에 진무성(陳武晟)을 함께 향사 했을까였다.
여러 고문헌을 발굴 탐구하던 중에 일제의 치하의 조선총독부 경부총감부가 모든 서책 발행을 통제하던 시기에 발간된 
창원박씨세보(昌原朴氏世譜)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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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아닌 관향조 8세손 訓鍊院 副正 朴大根祖의 사위이며 9세손 朴應達의 매제이니, 훈련원 판관 박응오(應鰲)祖와도 역시 사촌 사이라는 사실이다. 이에서 기록 유지의 중요성과 족보에서 출가 여자 가족들에 대한 기록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2003년간 고흥파보에는 출가한 여자들에 관한 기록이 편집에서 제외된 것이 많이 아쉽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1799년간]
 

조선후기 창의(唱義) 활동을 한 호남 사람들의 사적을 수록한 의병록. 12권 5책. 목활자본. 1799년(정조 23)에 편집, 간행되었다. 홍양호(洪良浩)·고정헌(高廷憲)의 서(序)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는데 총론에서는 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병자호란·이인좌의 난의 내용과 결과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술 하였고, 인물들의 자/ 호/ 본관/ 거주지/ 가족관계들이 기록되어 있다. 


아래 원문 책자 캡처 이미지는 호남절의록에 나타난 창원박씨 세 분의 선무원종훈공신과 진무성(陳武晟) 장군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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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세 贈수사, 추증좌찬성(선무원종훈) 2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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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세 수사, 추증좌찬성(선무원종훈) 2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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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陳武晟 (8세손 訓鍊院 副正 朴大根祖의 사위, 훈련원판관 응오(應鰲)의 사촌매제) 호조판서(선무원종훈) 3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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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이장 무과, 숙부 部將 응오(應鰲)와 함께 수훈 (선무원종훈) 9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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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이장 무과, 숙부 部將 응오(應鰲)와 함께 수훈 (선무원종훈) 9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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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수 무과, 훈련원 검정 (선무원종훈) 93페이지> 

 

위의 네 분이 흥양(고흥) 용강사에 배향 되었다는 사실을 호남절의록에서 알 수 있다.


[고흥 용강사(龍岡祠) 史實 

◆ 1826년(순조 26)에 고흥군(흥양현) 대서면 상남마을에 건립 된 ‘용강사(龍岡祠)의 위치는 대서면 상남리 1005번지로 흥양읍지 기록에 있으나, 오늘날 주소는 대서면 상남리 1005-1 위치로 추정된다. 

◆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사원 훼철령에 따라 헐린 뒤 용강사는 복원되지 못하고
◆ 1873년 계유(癸酉)에 창원박씨 재실 2호(齋室二號) ☞성동재(城東齋)로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 797번지 城山에 건립(建立) 하게 되고,
◆ 1893년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 산 139번지 平田山 아래에 齋室3號 ☞율수재(聿修齋) 건립하였고, 현재 (휘)유원(由元)의 신도비(神道碑)가 현존하는 위치이다. 

◆ 1910년 다시 중건(重建) 하였고,
◆ 다시 1936년 2월 성동재가 있었던 ☞대서면 상남리 797번지 성산(城山)에 齋室4號 성모재(誠慕齋)를 건립하여 ‘용강사(龍岡祠)’에 모셔왔던 창원박씨 박유원, 박태수, 박홍세 세 분을 배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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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보존되고 있는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 797번지 성산(城山)의 창원박씨 齋室4號 성모재(誠慕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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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보존되고 있는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 797번지 성산(城山의 창원박씨 齋室4號 성모재(誠慕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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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 181번지 성모재(誠慕齋) 앞에 보존되어 있는 박홍세(朴弘世) 신도비(神道碑) 

[전고대방(典故大方)]


일제 강점기 학자 강효석이 우리나라 역대 인물에 대한 전거를 밝혀 1924년에 간행한 전기이다.

4권 1책. 활자본. 권두에 윤희구(尹喜求)의 서와 권말에 편자와 고응한(高應漢)의 발이 있다.

■ 권1은 역대편(歷代篇)·전궁원묘(殿宮園墓)·만성시조편(萬姓始祖篇),
■ 권2는 상신(相臣)·문형(文衡)·호당(湖堂)·청백리(淸白吏)·공신(功臣)·명장(名將)·등단(登壇)·문무제곤록(文武制閫錄)으로 이뤄졌다.

■ 권3은 경연관초선록(經筵官抄選錄)·유현연원도(儒賢淵源圖)·문인록(門人錄)·문장가(文章家)·서화가(書畫家),
■ 권4는 종묘배향록(宗廟配享錄)·문묘배향록(文廟配享錄)·서원향사록(書院享祀錄)·두문동칠십이인(杜門洞七十二人)·사색당파원인약설(四色黨派原因略說)·북관칠의사(北關七義士)·십이사화록(十二士禍錄)·임진란순절제인(壬辰亂殉節諸人)·기의승병장(起義僧兵將)·의기(義妓)·의병장(義兵將)·순절신(殉節臣)·척화신(斥和臣)·강도순절부녀(江都殉節婦女)·배종팔장사(陪從八壯士)·임오우해인(壬午遇害人)·갑신피화육대신(甲申被禍六大臣)·동원록(東援錄)·통신사(通信使)·외국인내공(外國人來貢)·외국인내사(外國人來仕)·명인귀화(明人歸化)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이 전고대방의 서원향사록에 재실1호 용강사에 대한 기록이 아래 캡쳐한 이미지처럼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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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고대방(典故大方) 권4 - 서원향사록(書院享祠錄) 1924 일제강점기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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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전고대방에 기록된 고흥(흥양)군의 향사는 위 표와 같이 모두 5개이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사우 일제 철폐령에 의해 훼철 당한 후 무열사가 1882년(고종19)에 두원면 신송리에 건립 되어 진무성 장군 1인만 별도로 제향되어 그의 영정이 있다.  


진무성(1566 ~1638)장군은 임진왜란때 전라좌수군 진중(陳中)의 해전에서 대공(大功)을 세운 무장(武將)으로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여양(驪陽/나주)이다.
부사 인해의 아들로서 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에 자원 출전하여 옥포・적진포(玉浦・赤珍浦)등지의 해전에서 사도첨사 김완(金浣)등과 더불어 많은 왜병을 참획 하였으며, 특히 당포 해전시 적선에 뛰어들어 왜병의 목을 베고 적선을 불태우는 등 이순신이 장계에 기록할 만큼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이 한창일 때 현장의 전세를 탐지하기 위해 단신으로 성중에 잠입한 일이 있었다. 이때 변복으로 왜장을 자칭한 후 적진을 뚫고 들어가 성중의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등을 상견(相見)한 뒤 돌아오는 길에 또 왜병 수명을 참살함으로써 이순신으로부터 맹장(猛將)이란 칭언을 들었다.  


1599년(선조 32) 무과에 급제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1623년(인조 1) 경상도 도호부사, 1627년(인조 5) 구성부사(龜城府使)를 지낸 뒤 1638년(인조 16) 향리에 돌아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바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 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호조참판겸오위도총부총관(戶曹參判兼五衛都總府總管)이 가증(加贈)되었다.
무열사에는 진무성 장군의 영정, 칠성검(七星劍)과 일산(日傘) 그리고 진무성 장군이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받은 교지와 1614년・1633년・1647년(2)에 각기 관직을 제수 받았던 교지와 소지(所志)・상서(上書)・명문(明文)・입안(立案)・호구단자(戶口單子)・통문(通文) 등 총 79매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58호, 전남 고흥군 두원면 신송리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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