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지울 수 없는 고구려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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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지울 수 없는 고구려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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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지울 수 없는 고구려의 정체성


동방의 피라미드 고구려의 옛 도읍 지안현 퉁거우에 있는 장수왕릉인 장군총(가로 31.5m, 높이 약 1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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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교수는 나를 꼬리렌이라 불렀다

고구려의 옛땅 옌볜(연변)은 필자가 나서 자란 고장이다. 거기서 고구려의 떳떳한 후예로 자부하면서 겨레의 역사를 배웠고 겨레의 얼과 넋을 키웠다.

꼭 50년 전 이맘때, 그러니까 대학교(베이징대) 3학년 여름방학 때, 고구려 수도였던 지안현 퉁거우로 찾아갔다.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 북안에 자리잡은 그곳 룽산의 나지막한 언덕 위, 우거진 숲 속에서 그 용자를 드러낸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주변의 광개토대왕비며 태왕릉, 그리고 수백기의 무덤들이 고즈넉이 눈앞에 펼쳐졌다. 돌보는 사람, 찾는 사람도 별로 없이 삭아빠진 나무푯말만이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같은 해라고 기억되는데, ‘아시아사’ 강의를 맡은 저명한 저우이량(주일량) 교수는 기말 구두고사 때 본인을 ‘꼬리렌’(고구려인)이라고 부르면서 고구려에 관해 이것저것을 물었다. 저우 교수는 1960년대 공동저술한 〈세계통사〉에서 고구려는 한민족 국가라고 못박았다. 사실 이것이 중국 정통사학계의 정견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민족사의 어제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베이징대학에 유학 온 북녘의 학자 리지린이 고조선의 서쪽 영역을 베이징 근방의 강으로 추정하는 난허까지 넓힌, 괄목할 만한 연구성과를 내놓았다. 이 과정에서 일부 중국 학자들이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북방사에 의문을 던지는 낌새가 보여, 자칫 논쟁거리가 되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리 교수와 의기투합한 필자는 고서점가에서 구한 관련사료들을 한 보따리 챙겨가지고 63년 북녘에 환국했다. 20년 후 남녘에 와보니 이쪽 학계에서도 고조선 강역 문제가 한창 논의 중이었다. 그것을 곁에서 말없이 그저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 지금도 겸연쩍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50년전 베이징대 다닐때 아시아사 강의한 저우이랑교수


“고구려는 한민족 국가” 못박아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96년 초, 중국 상하이 푸단대학에서 열린 ‘담기양 선생 탄생 85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초청되어 ‘고대 한-중 육로 시론’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담씨는 80년대 이른바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즉 역사적으로 오늘의 중국 판도 안에 있던 모든 국가나 민족은 중국에 귀속된다는 ‘귀속론’의 이론적 틀을 마련한 사람이다. 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의 요지는 고대의 고조선과 삼국시대부터 실크로드의 3대 간선의 하나인 오아시스 육로가 장안에서 유주(베이징)를 걸쳐 고구려땅을 관통해 경주까지 이어졌다는 이른바 ‘실크로드의 한반도 연장설’이다. 참가자들은 대체로 동감을 표했으나, 한 사람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가 바로 고구려의 중국 편입을 앞장서 주창하는 ‘선양동아연구중심’ 주임인 쑨진지(손진기)다. 그는 평양 천도 이전의 고구려는 중국에 신속된 나라이기 때문에 그곳을 한민족 국가로 삼아 실크로드를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역시 ‘귀속론’의 논리다. 논쟁 끝에 ‘구동존이’(같은 견해는 함께 구하고, 다른 것은 남겨두어 연구하자)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렇게 고구려는 필자뿐만 아니라, 우리 겨레 모두의 가슴속에 마냥 살아 숨쉬고 있는 실체다. 중국은 이러한 실체를 무시한 채 관변의 힘으로 ‘동북공정’이라는 어마어마한 괴물을 가설해 놓고, 여러 가지 강변요설로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끌어들이면서 고구려의 정체성을 냉큼 지워버리려고 한다.


중국 쪽은 아예 종족 기원부터 건드린다. 역사적 사실은 고구려의 종족은 중국 동북과 한반도 일대에서 자생해 농경을 영위하던 예맥족계 종족임을 증언하고 있는데도, 중국은 엉뚱하게도 서명이나 저자, 저작연대, 어느 것 하나도 확실치 않은 〈일주서>(逸周書) 같은 책을 인용해 전설상 인물인 전욱 고양씨(高陽氏)의 후예 고이(高夷)가 바로 고씨 고구려의 선조라고까지 한다. ‘고구려’에서 ‘고’자는 족칭이 아닌데, 고이와 연결시키는 것은 일종의 견강부회이며, 전욱 고양씨는 기원전 2500년께고, 고이는 기원전 1000년께 사람으로서 양자 사이에는 무려 1500여 년이란 시간차가 있다. 차제에 ‘고구려’나 ‘고려’의 ‘려’자는 ‘려’가 아니라 ‘리’(‘나라이름 리’)로 읽어야 한다고 제언해 본다.


700년 장수한 독립국을 조공·책봉관계 등 들먹이며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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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도 중국의 지방정권인가 고구려를 중국 판도밖의 다른나라로 표시한 동한형세도(〈중국고대사 교육참고지도첩〉·베이징대학 출판사·1983년). 부여, 옥저, 읍루, 예맥과 함께 고구려가 중국 영토 밖의 독립국가로 표시되어있고 흉노, 선비도 외국으로 그려졌다. 

민족뿌리 문제와 더불어 고구려는 한나라의 군현인 현토군 안에서 세워지고 발전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지방정권에 불과하다는 것이 또한 중국 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현토군 내에 자리잡으면서 평화공존한 것이 아니라, 그 동쪽에 성을 쌓고 무력으로 대응하였으며, 따라서 현토군은 고구려를 견제하는 창구 구실이나 한 것일 뿐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역사적 정통성은 무시한 채 단순한 영토의 크기나 존속기간의 장단에 따라 고구려를 중국의 영역에 편입시키고 있다. 고구려시대 전체 국토의 3분의 2가량이 중국 영내이고, 평양 천도 이전의 기간은 464년(기원전 37~기원후 427)이고 이후 기간은 241년(427~688)이므로 결국 고구려는 중국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단순계량학은 역사에서 무리다. 더 황당한 것은 천도 이전에도 평양은 고대 중국의 관할범위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중삼중으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고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는 강변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변이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과 자가당착이라는 점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중국 쪽이 고구려의 ‘귀속’ 문제에서 가장 유력한 증거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소위 조공·책봉관계다. 고구려는 중원왕조에 조공하고 그로부터 책봉을 받는 처지여서 결국 중원왕조의 신속국(번속국)이라는 논리다. 우선, 중앙에 군림하여 지방을 호령하는 ‘중원왕조’라는 것이 과연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고구려 존속 705년 동안에 중국 영내에는 무려 35개 나라가 흥망했는데, 그중 86%가 넘는 30개 나라는 100년도 못 견디었으며, 두 나라(한과 당)만이 간신히 200년을 넘겼다. 자신의 고고한 천하관을 가지고 있는 동방의 패자 고구려로 볼 때 ‘중원왕조’란 한낱 허깨비에 불과했다. 다음으로, 원래 조공·책봉은 중앙과 지방 간에 맺어진 정치질서였으나 점차 국가 간의 교섭형식으로 발전한 일종의 관행인데, 종래 중국사람들은 중화관에서 출발하여 이러한 관계를 일방적인 신속관계로 왜곡하고 강요해 왔다. 그러나 제아무리 왜곡하고 강요해도 고구려 같은 강자의 독자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 영락·연기라는 독자적 연호까지 사용하였다. 주변의 수많은 조공·책봉국 가운데서 유독 고구려만을 신속국으로 얽어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우리 민족수호정신의 발현인 고구려의 수·당 항쟁도 중국은 지방의 ‘소란’을 진압하기 위한 내전쯤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 이면에는 역시 독자적인 국제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흑심이 깔려 있다. 이 전쟁은 중화적 질서를 무력으로 실현코자 하는 수·당의 야심에 대한 고구려의 정당한 항전으로서 두 세력 간의 국제전쟁이지 결코 중앙과 지방 간의 내전은 아니다. 그밖에 중국 학계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주민의 상당수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한족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파악해야 하며, 또한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왕건이 세운 고려는 본래 족속이 다르므로 계승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주제넘는 억측도 마다지 않는다. 반박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한심한 억지에 불과하다.


옛 영토를 차지했다고 역사까지 지배할 순 없는 법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지 말길


역설적으로 이 억지 속에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고구려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 정체성이란 고구려의 민족뿌리는 외래가 아닌 자생의 예맥족계라는 것, 고구려는 조공이나 책봉에 얽매인 ‘중원왕조’의 지방정권이 아니라 중국 왕조사에도 전무후무한, 700년 이상 장수한 자주 독립국가라는 것,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하고 발해와 고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연쇄 전통국가라는 것, 고구려는 ‘중화문명’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인 선진문명을 가진 나라라는 것 등이다. 고구려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 민족사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다.


역사는 누가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고 바꾼다고 해서 바꿔지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사실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토주권’이 ‘역사주권’과 다르다는 것은 역사학의 상식이다. 현실적으로 옛 고구려 땅을 지배한다고 해서 그 역사까지 마구 지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행히 중국의 일부 양식있는 지식인들이 역사의 곡필에 맞서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제부터라도 중국은 얼토당토않은 ‘역사도발’을 접고 정도로 돌아와 큰 나라다움의 체통을 지켜줄 것을 역사를 믿고 중국을 아끼는 한 사학자의 양심으로 간절히 호소하는 바이다. 한편, 우리로서는 남북이 뜻과 슬기를 한데 모아 당당하게 역사의 순리를 따라 대응논리와 방안을 개발하고 전개하여 우리다운 성숙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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