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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서양인이 본 조선’ 에 대한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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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서양인이 본 조선’ 에 대한 기록들


△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의 저자인 영국의 여성 여행가 비숍. 남장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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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속의 조선’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

남들과 어우러 사는 세상에서 서로 알게 됨은 그 어우름의 전제다. 일찍이 조선시대에 서세동점의 거센 흐름을 타고 우리 곁에 다가온 서양인들은 의도야 어떻든 간에 우리와의 어우러진 삶을 위해 저들의 눈으로 우리를 보고, 저들의 사고로 우리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보고 이해한 것을 적어놓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그 중에는 우리의 좋은 것을 북돋아주고 모자람을 타일러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거지나 왜곡 같은 것들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두가 ‘자기 성찰’의 거울이 된다.


19세기 후반 닫힌 문 열리다

서양인들이 조선에 관해 쓴 최초의 글은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의 웅천항(熊川港)에 들어와 포교를 시도하다가 되돌아간 스페인 선교사 세스뻬데스가 현지에서 보낸 네 통의 서간문이 실린 <선교사들의 이야기>(1601년)란 책이다. 그뒤 제주도에 표착해 13년간 억류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네덜란드의 하멜이 일명 <하멜 표류기>(1668년)란 견문기를 써내 조선을 서양에 알렸다. 그러나 조선이 서양을 엄격하게 경원한 것은 서양인들이 조선에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멜 이후 한 세기 남짓한 동안 서양인들은 조선 근방에 얼씬도 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중국이나 일본에 관해 쓴 책 속에서 가끔 어깨너머로나 바라본 조선에 관해 몇 토막씩 언급하곤 했다. 이러한 부분서가 19세기 중엽까지 250여년 동안 고작 여남은 책 나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닫혔던 문이 열리게 되자 ‘은자의 나라’ 조선에 대한 서양의 관심과 연구는 폭발적으로 급증하며, 이에 수반해 조선에 관한 서양 서적의 출간도 일시에 몇 배로 도약한다. 이 기간에 ,<하멜의 표류기>와 함께 조선 관련 3대 역작이라고 하는 달레의 <조선교회사 서론>(1874년)과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1882년)이 각각 출간된다. 그후 조선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한국 전반에 관한 각종 서적의 출간은 계속 상승 일로를 걷고 있다. 1920년대를 고비로 17세기 초부터 1940년대 말까지 약 350년 동안에 나온 한국 관련 서양 서적은 약 400종(전서와 부분서)으로 추산된다.


‘비옥한 땅’ 쓸 줄은 모르니…

서양인들이 남겨놓은 이 모든 기록 속에서 우리는 근대와 선진을 자처하던 그들이 조선을 과연 어떻게 보고 이해하였는가를 읽을 수가 있다. 각계각층 사람들이 각이한 수요와 인식을 반영해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나름대로의 이해를 토로했기 때문에 내용이 방대함은 물론, 시각이나 지적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서양인들의 조선에 관한 지식은 어이없을 정도로 일천했다. 조선을 네 차례나 방문하고 나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897년)이란 책을 쓴 영국의 여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비숍이 조선으로 떠날 때 사람들은 ‘코레아’가 적도나 지중해, 흑해의 어드메에 있다고들 했다. 그런가 하면 그 무렵 조선에는 꼬리가 3피트나 되는 닭, 우수한 모피와 종이, 아름다운 도자기, 인삼이라는 영약, 풍부한 해산물이 있다는 소문이 미국사람들 귀에 들어갔다. 또한 옷을 장식할 정도로 금이 흔하고, 묘에는 호화로운 부장품을 함께 묻는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모두가 서구인들의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비몽사몽간에 ‘안개 속의 땅’ 조선에 들어선 서양인들의 눈에는 조선이 그야말로 낯설고 신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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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재 각국 외교관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미국 전권공사인 앨런) 



조선의 자연환경에 대한 서양인들의 이미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기후는 온화하고 토지는 비옥하여 농업에 유리하고, 유용한 수산자원이나 관광자원은 풍부하다. 그러나 제대로 개발하여 활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들의 일치한 평가다. “한국은 가난한 국가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국민의 잠재된 에너지는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비숍의 지적이다.


당쟁·부패에 대한 신랄한 일침

모두가 서구의 근대정치에 훈육된 내방자들이라서 조선의 전근대적 정치행태에 대해서는 신랄한 일침을 놓는다. 가장 큰 병폐로는 지배층의 학정과 무능을 들고 있다.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 때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 바 있는 <대한제국멸망사>(1906년) 의 저자 헐버트는 지배층 내에서의 관직매매와 횡령 등 부패와 타락이야말로 한국인의 뛰어난 능력과 발전 잠재력의 발현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못박는다. 영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타임즈>(1897.9.17.)도 조선의 “양반들은 개혁을 부패나 직권남용 같은 자신들의 공인된 권리의 상실”로, “자신들의 삶의 양식을 빼앗아가는 악”으로 간주한다고 논평한다. 100여년 전 서양인들의 벽안에 굴절 없이 반사된 조선 정치의 참상은 오늘의 우리에게 경종으로 들려온다. 나약한 조선의 지배층은 외세에 대한 대항도 너무나 소극적이고 허무맹랑했다. 서양인들은 배에서 바라본 조선의 해안풍경이 너무나도 황량해 도무지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것은 왜구와 서양 오랑캐의 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해안을 황폐화시키고 섬에서 주민들을 철수시키는 이른바 공도(空島)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금이 서구인들이 탐내는 대상이라고 해서 금 채굴을 아예 법으로 금한 것도 그 일례다.


우리는 흔히 이른바 당쟁을 조선을 이그러지게 한 2대 병폐의 하나로 꼽으면서 마치 조선만의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은둔의 나라 한국>(1882년)의 저자 그리피스의 평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당쟁에 해악이 있다면, 그것은 원초적으로 정치라는 행태에서 빚어지는 것이지, 결코 조선의 정치에서만이 유별나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오히려 반역과 패륜이 난무하는 서구의 정치사에 비하면 조선의 당쟁은 그래도 나름의 도덕성과 게임 율이 있다고 판단한다. 조선인이나 조선조의 체질에서 당쟁은 불가피하다는 자해적 식민사관을 자성케 하는 대목이다.


조선인들의 성정(性情)이나 생활관습은 언제 어디서나 이방에서 온 서양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인들의 건전한 도덕과 따뜻한 인정은 서양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반도를 8녀간 12번이나 여행하고 <한영대사전>을 편찬해 우리나라 영어교육에 큰 족적을 남긴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게일은 저서 <전환기의 조선>(1909년)에서 한국인은 정직해서 신뢰할 수 있고, 신용을 중시하며 문서가 아니라 구두로 한 약속도 철저히 지키는 등 서양인보다 더 휼륭하다는 호평을 내린다. 다블뤼는 저서 <조선사 입문을 위한 노트>(1860년)에서 조선인들의 상부상조 정신에 크게 감동하면서, 서구인들의 ‘근대적 이기주의에 대해 증오와 가증스러움’을 느낀다고 자괴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그런가하면 두 번이나 조선을 찾은 영국의 화가 새비지-랜도어나 헐버트 같은 이들은 조선인들의 교육열과 언어습득 능력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을 뛰어넘는다면서, ‘말귀를 알아듣는 총명함’이나 ‘신속한 이해력과 추론력’에 대한 놀라움도 서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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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재 초대 미국 전권공사인 푸트의 부인이 궁중에서 나들이하는 모습  



정직하지만 게으른 민족?

그런가하면 조선인들의 성정이나 관습에 배여있는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지적과 질타를 가하고 있다. 개중에는 터무니없는 왜곡이나 비하도 있다. 그들이 자주 제시하는 조선인들의 부정적 이미지는 나태와 무기력, 불결과 사치 따위다. 이것 말고도 까다로움이나 탐욕, 수다스러움, 폭식과 폭음, 느슨한 시간과 수량 개념을 흠으로 잡는 이들도 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친구로서 그의 한국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케난은 저서 <나태한 나라 한국>(1905년)에서 조선인을 나태하고 무기력하며, 몸도 옷도 불결하고 아둔하며, 매우 무식하고 선천적으로 게으른 민족이라고 악평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헐버트 같은 이는 케난 류의 악평은 식객노릇이나 하면서 서울거리를 배회하는 건달들에나 한한 말일 뿐, 그런 계층은 서구에도 얼마든지 있다고 통박한다. 당초 게으름을 조선인의 기질로 여겨오던 비숍은 러시아나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들의 근면하고 번영하는 모습을 보고나서는 자신의 오판을 후회하면서 조선사람은 ‘밖에 나가면 더 잘 사는 민족’이라는 체험적 결론을 내린다.


쓰거나 달거나 새겨들어야

서구인들이 조선에 와서 가장 연민을 느낀 것은 여성들의 삶이다. 이런 삶을 가장 적나라고 세심하게 묘사한 사람은 같은 여성 신분인 비숍이다. 사회적 멸시와 남존여비에서 오는 비애와 절망, 힘든 노동, 병, 사랑 부족, 은둔 등이 그를 자극한 조선 여성상이다. 남자들의 방탕한 외도와 축첩을 놓고 조선사람들에게는 ‘집(하우스)은 있으나 가정(홈)은 없으며’, 조선의 딸들은 ‘아버지에 손에 처형되며 아내는 남편한테 살해당한다’는 끔직한 표현마저도 그는 마다하지 않는다.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이해나 이미지는 서로가 이토록 다르다. 이러한 편차는 근원적으로 보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주의적, 우월주의적 사고방식인 오리엔탈리즘의 인식지평에서든가, 아니면 남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타자론(他者論)의 인식지평에서 조선을 바라보는 근본입장의 다름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더해 그들의 조선 체류기간이나 체험의 심도, 그리고 정보수집 대상과 경로의 차이도 그러한 편차를 낳게한 객관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서양인들이 본 조선을 떠올리노라면 비분강개하고 애상이나 회한에 젖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그것을 피하지 말고 되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공자가 말하듯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싶거든 어디서 왔는지 되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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