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총제 (諱)령 관향조 사적지 탐방 (2) 밀양 모아재, 경현사, 밀성대군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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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총제 (諱)령 관향조 사적지 탐방 (2) 밀양 모아재, 경현사, 밀성대군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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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군 원덕사 참배를 마친 후 이제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3길 58 모아재(慕雅齋) 경현사(景賢祠)로 향합니다.
모아재/경현사 ▶ 
https://kko.to/tr9kneTt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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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현사(景賢祠)는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팔방마을 명방촌의 모아재(慕雅齋)의 경내에 있으며, 이 사우(祠宇)는 1992년 5월 23일 삼사좌윤공 후예 6개 종파 후손들이 모여 사우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밀성박씨 고성파 박창호(귀흠, 삼사좌윤공 25세손, 2016년 타계) 대륙제관 설립자를 사우건립위원장으로 추대하여 선임하고, 부위원장으로 6개 종파의 각 회장단 2명씩을 선출하였습니다.


고성파 박재후 박중흠,
창원군파 박병주 박채희,(삼사좌윤공파대종회 연혁 및 역대회장 보기)

초암공파 박상기 박상용,
정국군파 박창규 박지영,
구산군파 박재식,박정훈,
태안군파 박재생 박원홍 등이 피선 되었습니다.

또한 박귀흠 위원장이 거액의 성손금 헌정(誠損金獻呈)을 약속하고, 박창규 부위원장이 사재부지(祠齋敷地)로 전답 800여평 기증을 약정하였습니다. 삼사좌윤공 탄생지인 당두(堂斗)와 기증한 부지가 인접지역으로 최적지라 결론하여 종중 명의로 등기 이전하고, 사우건립 취지문을 성손들에게 홍보하여, 1996년 5월 5일에 준공하고 칠현선조(七賢先祖) 봉안(奉安) 고유제(告由祭)를 봉행 하였습니다.


경현사 배향 삼사좌윤공파(三司左尹公派) 칠현선조((七賢先祖)
          

삼사좌윤공 (휘)을재공을 주벽(主壁)으로 諱 元義(원의), 諱 麟祐(린우), 諱 威(위), 諱 蒇(천), 諱 粹(수) 諱 齡(령) 등 일곱 칠현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매년 (음)3월 마지막주 일요일에 추모향제(追慕享齋)하는 사당(祠堂)입니다.


삼사좌윤공 諱 을재(乙材)는 우리 始祖王 諱 赫居世의 30세손이며, 밀성대군 諱 彦沈의 8세손이고, 밀성박씨의 十二中祖 중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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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현사 배향 7현 위패 좌우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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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아재 경내 입구에는 '밀성박씨칠현유적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1995년 8월 15일에 의성 김병무 글, 능성 구강회 글씨, 아찬 삼사좌윤공 26세손 박지석 종원이 전서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의 실제 제막식은 2002. 4. 28에 개최 되었다는 기록입니다.
  

 ▶ 칠현유적비문 내용을 자세히 보려면 이곳을 클릭하여 경현사지 207~218쪽을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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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재 경내로 들어가는 정문(첫번째) 상례문(尙禮門)을 들어서면 동쪽 경내에는 큰 헌성비 4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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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첫번째는 경현사 모아재 창건 헌성사각비로 『행함에 있어 사람으로서 항상 지켜야할 도리를 돈독히 하고 극기하여 선대의 사업을 계술함이리니 정성과 효도로서 태어나온 그 근본을 잊지 않고 갚을지어다.』는 뜻의한문으로『행돈이륜 극술선업 성효보본비(헌성록정사각비)』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뒤.옆쪽에는 헌성금을 납부했던 6종파별 종원들 본인 이름과 아들 이름 및 종파 및 출생지역이 새겨져있습니다.

▶ 이곳을 클릭하여 헌성금 납부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경현사지 236~244쪽을 참조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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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비는 밀성박공 귀흠사적비명 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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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비는 만취밀성박군기적비(휘 창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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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비는 밀성박공 상화위선헌성비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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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 이가원(眞城 李家源) 문학박사의 글씨인 모아재 재실 편액(현판)입니다.  위키백과 이가원 정보 보기

경내 현판들은 모두 이가원 박사의 글씨입니다. 상례문, 모아재, 염수문,경현사 등 네 개의 편액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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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재 재실 벽에는 1995년 진주 강신중이 쓴 모아재 기문 편액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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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재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사당 경현사가 보이고 경현사로 들어가는 염수문(念修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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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패가 모셔져 있는 경현사입니다. 열쇠로 문이 잠겨져 있어서 아쉽게도 위패 실물은 이번에도 살필 수가 없었습니다.

이곳 모아재.경현사의 건립 경위를 역사 자료로 간행한 책이 경현사지(景賢祠誌,2006년 11월, 대보사, 대구)입니다.

경현사지 발간 헌성금록에는 창원군파(고흥 진사공파) 및 박정환(故朴正煥, 마륜)이사 이름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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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삼사좌윤공파 휘을재조(諱乙材祖) 후손들의 계보를 정리하여 간행한 보첩이 삼사좌유공대동보(1987년10월, 보전출판사, 대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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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루 앞에 있는 밀성대군단소입니다.


밀성대군지단(密城大君之壇)이라고 불리는데, 일반적인 묘가 아니라 비로 되어있습니다.

밀성대군단(密城大君壇) 사실 문헌에 따르면 ~ 

『 밀성
대군이 수봉한 궁성(宮城)의 유지(遺址). (☞ 밀성군이 거처하고 정무를 살피던 장소인데 사실이 여지승람과 양촌 권근의 본조유사에 실려 있음) 구보(舊譜)를 고찰하니 서기1634년(숭정7년 인조12 甲戌)에 현령(縣令) 희(暿:호 四吾堂-恭簡公 휘 健의 후손)와 수춘(壽春 호 菊潭-杏山公 휘 世均의 후손) 등 37인이 외예손(外裔孫)인 밀양부사 이유달(李惟達)과 이곳에 사당을 세워 밀성대군을 향사(享祀)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3백여 년이 흐르는 동안 후손들은 한마음으로 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이 일을 이루고자 노력하였으나 일자체가 심히 중대한 사안이어서 합의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신라기원 1981년(서기1924년 甲子)에 밀양박씨 종인의 주최로 8도에 통고하여 종회를 영남루에서 크게 개최하고 설단하여 향사할 것을 건의하니 이해 五월 三일이였다. 원근에서 회의에 온 사람들이 千명을 넘었는데 모두가 한마음으로 설단할 것을 합의하고 돌을 다듬어 비를 세우니 약 4개월이 걸렸다.


삼가 고찰하니 단기 四二五五년(서기 1922년 壬戌) 윤五월 十三일에 큰 비가 쏟아지자 영남루 북쪽뜰이 빗물에 흙이 무너지면서 하나의 큰 묘자리 흔적이 있는지라 누 아래 있던 사람이 보고서 달려가 부근에 사는 박씨에게 말하여 여러 사람이 와서 보니 과연 오래된 묘자리라 이에 전 군수 박상일(朴尙鎰) 교리 박해철(朴海徹) 주사 박태진(朴泰鎭) 박장억(朴章億) 등이 들은 즉시 살펴보았다. 밀양의 부로(父老)들이 자고로 전해오는 말이 밀성대군의 묘소가 영남루 부근에 있다는 것이 과연 헛되고 허망한 소리가 아님을 이로써 믿음직하다. 그러나 이미 지석이나 증명할 만한 고증이 없는 즉 그 신중하여야 할 도리에 의심이 없을 수 없고 또한 등한이 보아 넘길 일도 아니어서 이에 설단을 하고 비를 세워 별도로 제각을 세우고 향사를 하면 마음에 미안할 바 없고 의리에도 당연히 행하여야 할 일이므로 밀양과 청도의 두 고을의 종인과 협의를 하여 단지 대부할 것을 관에 신청하니 익년 계해년(1923년) 겨울 허가가 나왔다.


이로 인하여 8도에 종회를 소집하여 결의를 거쳐 드디어 그 자리에 돌을 깔고 단을 모으고 단상에 비를 세우니 단지(壇地)가 무릇 12평이었다. 면에 다듬은 돌을 깔고 상하양방에 대(臺)를 쌓고 대위에 돌아가며 돌난간을 둘렸는데 석주가 모두 20개요 높이는 모두 한길이 넘었다. 또 이 난간 기둥에 구멍을 내고 쇠줄로 꿰어 쳐서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한가운데의 축단한 비면에 ‘밀성대군의 단’이라 쓰고 전면에 향로를 두고 향로 양쪽에 아래로 무장한 관대석을 세우고 문주(門柱) 위에 두 개의 둥근 유리 장명등을 설치하고 철문을 달아 사람들이 난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문밖 양쪽 석대위에 각각 사자석을 놓았다.


1925년(乙丑) 10월19일(음 9월 초 2일)은 300여년의 성손들의 숙원이 성취되어 영작만세유전(永作萬世遺傳)의 역사를 새롭게 장을 여는 날이라 원근 종원 및 전 향사림(鄕士林) 기타 회집(會集)한 관중(觀衆)이 오천여인(五千餘人) 이라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오전 12시(午時) 정각에 본손과 사림일동이 단비(壇碑)를 봉립하고 일제히 신고식을 장엄하고 성대히 거행하였다.』


제향일(祭享日)은 춘사(春祀) 陰 三月 初三日 巳時(오전10시), 추사(秋祀) 陰 九月 初九日 巳時(오전1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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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대군단소 앞에는 동서 5간 남북4간의 팔작지붕으로 된 2층 누각 영남루가 있습니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한국의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영남루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었다가 삼척 죽서루와 함께 2023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국보로 재지정되었습니다.

고려 공민왕 14년(AD 1365년)에 밀양부사 김주가 개창하여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고 하였고, 그 이전에는 영남루는 신라 법흥왕 때 절을 지었다가 고려 현종 때 절을 없애고 종각이 없던 금벼루만 두었던 것을 고려 예종 때 영남루를 지었으며, 1366년 공민왕 14년에 김주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 뒤 1460년 조선 세조 6년에 부사 강숙경이 누각의 규모를 키워 중건하였고 신숙주가 누기를 지었으며, 1542년 중종 37년에 부사 박세후가 다시 중건하여으나 1582년 선조 15년 병화(兵火)로 대루와 부속당우가 불타버렸는데, 1637년 인조 15년에 부사 심흥이 재건한 것을 부사 이지온이 단청을 하였고, 1842년 헌종 8년에 실화로 소실한 것을 2년 뒤인 1844년에 부사 이인재가 재건한 것이 현재의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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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영남루에서 도보로 7분 거리에 밀성박씨의 성지인 밀성재를 비롯 익성사 등이 있습니다만 늦지 않게 창원 남산을 거쳐 고흥까지 도착해야 하기에 밀성재 둘러보는 것은 다음 기회로 기약하고 영남루 주차장 건너편에 있는 밀양시장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서둘러 창원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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