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김덕보 사장님 (49회) 제8장 시대와 역사의 풍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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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김덕보 사장님 (49회) 제8장 시대와 역사의 풍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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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보 사장님 (49회)

  제8장 시대와 역사의 풍랑에서




개막식에서의 영어연설 


다음날 일찍 일어나 이사회가 열리는 로얄호텔로 갔는데, 브란트 씨는 벌써 나와 있었다. 나를 본 그는 손을 끌고 다니며 대표 한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도 시키고 말도 건네게 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이끌려 일본 NHK대표, 호주 ABC 대표, 인도네시아,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대만의 방송대표 등과 인사를 나누었고, 그때 막 ABU이사국으로 참여한 중공(中共)의 북경방송 대표도 만나 보았다, 


결국 총회 전 이사회에서 KBS는 계속 이사로 유임이 되고, 새로 우리 동양방송 TBC가 만장일치로 이사에 선임이 되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늘에 감사했다. 곧이어 10시에는 ABU 발리대회가, 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옵서버 국가에서 온 수많은 방송인(放送人)이 참석한 가운데 로얄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화려하게 개막되었다. 


개막식에서는 새로 이사에 선임된 동양방송과 옵서버가 된 ‘자메이카’ 공화국 방송사 대표가 인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연단에 올라 KBS 박배식 국제국장에게 부탁해서 준비한 영어로 된 연설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영어연설은 난생 처음 하는 것이어서 나는 아주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연설을 끝내고 내려오자, 모두들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었지만 내게는 칭찬의 말들이 인사치레로만 들렸다. 


발리에서 춤을 추다


개막식이 끝나고 나는 급히 ‘덴파시’공항으로 향했다. 김덕보 사장님이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공항을 빠져나온 김 사장님은 나를 보자마자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셨고, 나는 모든 것이 잘 되었다는 보고를 드렸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김 사장님은 크게 기뻐하면서 우선 내 숙소를 모텔에서, 로얄호텔보다 한 단계 더 고급인 <하이얏트>호텔로 옮기게 했다. 김 사장님도 하이얏트호텔에 여장을 푸셨는데, 그날 밤에는 그곳에 와있던 우리나라 방송인들을 모두 이 호텔 연회장으로 초대해 자축파티를 열었다. 


인도네시아 고유의 ‘아궁 댄스’를 비롯해서 갖가지 고유의 연주를 들어주는 무대공연이 끝나고 신나는 춤파티가 벌어졌다. 아무 격식도 없이 제멋대로 흔드는 춤판이었는데, 남자들은 한두 명이고 거의가 호주에서 온 여성관광객들이었다. 그것을 본 김 사장께서는 나를 보고 자꾸만 나가서 춤을 추라고 성화를 해대셨다. 


할 수 없이 플로어로 나가기는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호주 여성들은 모두가 나보다 목이 하나 더 클 정도로 글래머인데다가 여간 잘 흔들어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몇 번 왔다갔다 하다가 들어오고 말았는데, 이것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귀국한 뒤 모임이 있을 때마다 김 사장님은 발리에서의 내 춤이야기를 꺼내놓고는 ‘박종세가 춤을 추는데 호주 여자들 젖 밑에서 왔다갔다 하더라.’ 고 놀려대는 것이었다. 


김덕보 사장님


이렇게 이사국이 된 기쁨을 멋진 파티로 자축한데 이어, 김덕보 사장님은 나에게 좋은 호텔, 좋은 음식, 넉넉한 용돈으로 분에 넘치는 포상을 해주셨는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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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보 회장님(오른쪽)을 모시고

 

귀국 길의 일본에서는 TBC와 제휴한 <니혼TV>의 고바야시[小林] 사장의 초청으로 도쿄의 최고 레스토랑 <훠시즌>에 가실 때도 나를 대동하셨고, 특히 김 사장님의 애인댁이라고 모두 놀리는 긴자[銀座]의 뒷골목의 고급 술집에도 나를 데려가 주셨다.

 

참으로 좋은 분 김덕보 사장님! 황해도 해주(海州)가 고향으로 실향민인 김 사장님은 나와 ABU발리 대회에 다녀온 후 곧 회장님이 되셨지만, 회장님이 되신 얼마 후 먼저 세상을 떠난 사모님을 따라 유명을 달리하시고 말았다. 


안양골프장에서 같이 골프를 하실 때에는 기찻길 건너 군포(軍浦)쪽 야산을 가리키면서 “내가 누울 자리가 저기야!” 하시던 김 회장님은 결국 그곳으로 가셨다. 너무나 선량하셔서 남에게 베풀기만 하시던 분, 김덕보 회장님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빌어본다. 


유수호 아나운서와 하일성 해설위원


1977년부터 고교야구는 서울운동장 야구장의, 관중이 연일 만원을 이루면서 단연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다. 1977년에는 충청도 팀으로는 처음으로 공주고가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해서 화제를 낳았고, 이 우승 이후 공주고 출신 유력인사 모임에서는 안병준(安炳俊)사장, 김광회(金侊會) 박사 등이 나서서 나를 명예 공주고 졸업생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또 이해에는 이만수(李萬洙)선수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대구상고가 우승컵을 안았으며, 광주상고도 인천고와 접전을 벌인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렇게 고교야구의 황금기를 맞은 1979년에는 야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운동장 주변의 교통이 마비될 정도의 성황을 이루었고, 중계방ㄱ송의 청취율도 절정에 달해서 야구중계 담당자들의 사기도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내가 중계방송을 할 때 가장 많이 보조를 해준 유수호(柳壽浩) 아나운서와 김동엽 감독에 이어 해성을 맡은 환일고 교사 출신의, 하일성(河一成) 해설위원이야말로 나의 야구중계방송을 가장 빛나게 해준 분들이다. 이 기회에 두 분에게 심심한 감사와 고마움을 전한다. 


준우승 인천고에 보낸 기립박수


이해 1979년의 고교야구는 대통령배 대회에서 선린상고가 부산상고를 물리치고 우승한 것을 비롯해, 청룡기 대회에서는 부산고가 선린상고를 우승했으며, 고교야구 붐에 따라 대구에서 새로 생긴 대봉기대회에서는 신예 배재고가 전통의 인천고를 물리치고 우승했다. 


또 17일 동안 연일 만원 관중의 기록을 남긴 봉황기대회에서는 광주상고가 인천고를 물리치고 1977년에 이어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해 마지막 전국대회인 황금사자기대회에서는 경북고가 인천고를 1대0으로 아슬아슬하게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관중들은 이 해에만 세 번 결승에 도전해서 준우승에 머문 인천고 선수들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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