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동양방송(東洋放送), 역사 속으로 (51회) 제8장 시대와 역사의 풍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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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동양방송(東洋放送), 역사 속으로 (51회) 제8장 시대와 역사의 풍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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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방송(東洋放送), 역사 속으로 (51회)

  제8장 시대와 역사의 풍랑에서




세계 야구 준우승


1980년 도쿄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는 미국, 일본, 쿠바 등 세계 강호 12개국이 모여서 자웅을 겨루었다. 


우리 한국은 미국 팀에는 지고 홈팀인 일본에게는 이겼는데, 쿠바와의 경기에서 이해창 선수가 선제홈런을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패하는 바람에 우승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러나 마지막에 쿠바가 일본을 1대 0으로 물리치더니, 미국마저 5대4로 이기는 바람에 쿠바가 우승, 우리나라와 일본은 나란히 준우승을 차지해서 한국야구의 위상(位相)을 그런대로 끌어올렸다. 


이때 우리나라 선수단은 감독에 김응룡, 선수로는 이선희, 최동원, 김용남, 황규봉, 유승안, 이만수, 김봉연, 김인식, 김용희, 김재박, 김일권, 이해창, 장효조 선수 등 쟁쟁한 멤버들이었다. 


동향끼리의 격돌


이 해의 고교야구는 인상적인 경기가 많았다. 대통령배대회에서는 결승에서 동향인 광주일고와 광주상고가 격돌했는데, 광주일고에서는 발군(拔群)의 투수 선동렬, 광주상고에서는 김태업이 나섰는데, 타격은 물론 빠른 발로 정평이 나있던 허세환, 이순철 선수가 눈길을 끌었다. 


결국 광주일고가 우승을 차지했는데, 광주서중시절부터 따져서 개교 60주년이 되는 해의 우승이라고 해서 광주일고 선수단은 더욱 뜻깊어 했다. 이때 광주일고의 감독이었던 조창수는 나중에 프로야고 해태타이거즈의 코치가 되어 나와의 인연이 계속되었다. 


청령기 대회에서는 박노준, 김건우가 활약한 선린상고가 처음으로 결승에 올라온 마산상고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봉황대기에서는 신예 천안 북일고가 전통의 야구 명문 배재고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해 천안을 떠들썩하게 했다. 


황금사자기 대회에서는 이 해에 우승을 한 번씩 차지했던 선린상고와 광주일고가 격돌했는데, 선린상고의 우승으로 결말이 났다.   

    

동양방송(東洋放送), 역사 속으로 


1980년 들어 나는 참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뉴스전망대, 정오뉴스, 야구 중계방송, 다큐멘터리 사회, TBC석간 등을 진행하면서 그야말로 몸이 두개라도 모자라겠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9월 3일 ‘방송의 날’을 맞아 나는 ‘방송대상(放送大賞)’을 받게 되었다, TBC석간 앵커로서, MC로서 ‘해설상’이라는 이름의 대상을 받게 된 것인데, 나는 이 상을 방송생활 25주년을 격려해주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개인적으로 큰 감동을 느꼈었다. 

 

그러내 내가 이렇게 감격스러워하고 있는 동안에 정치(政治)의 깊은 장막 속에서는 엄청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군부 세력이 새로운 언론풍토조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언론기관 통폐합(統廢合)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거칠 것 없이 밀어붙이는 새 정권의 정책에 의해 마침내 1980년 11월 30일, 동양방송은 깃발을 내리고 KBS로 통폐합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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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별방송을 마친 후의 기념촬영 / 앞줄 중간에 니와 고일환, 홍두표, 전응덕, 임경춘 봉두완 위원 등이 보인다


통폐합으로 KBS 가야되는 동양방송 인원 중에 가장 직급(職級)이 높았던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를 몰라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회사에서는 중앙일보에 남겠으면 자리를 만들어보겠다고 하고, 나를 좋게 보고 있었던 기업하시는 몇 분은 자기 회사로 오라고 연락을 해왔다. 


나는 마음의 갈피를 다잡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기관(機關)에 있는 이상재(李相宰)씨가 연락을 해왔다. “무조건 당국의 조치에 따라 KBS로 가주었으면 좋겠다. 박 주간은 모두가 주시하고 있다.”고 하면서, 모든 조치를 다해놓았으니 아무 말 말고 KBS로 가라는 것이었다. 


이상재 씨는 당시 막강한 권력기관의 실세로 사람들은 그를 어려워했지만, 5.16민족상을 같이 받는 등의 교분이 있어서 내게는 편안한 분이었다. 


나는 그렇게 진로를 결정한 뒤 11월 30일, TBC의 마지막 특집방송에서 시청자들에게 내일부터는 KBS에서 다시 뵙겠다고 인사를 하고는 전 직원들과 함께 술독에 빠져들었다. 이때 TBC 마지막 특집방송은 ‘방송의 날’ 특집 등에서 요즘도 가끔 방영이 되어, 그 당시 안타까움 속에서 방송하던 내 모습을 보면서 감회에 젖곤 한다. 


‘그 위대한 17년, TBC는 영원하리!’


11월 30일 TBC 의 ‘뉴스 전망대’ 진행도 내가 맡아, 뉴스 말미에 내일은 KBS에서 뵙겠다는 인사를 또 한 번 했다. 그렇게 TBC의 깃발을 내리고 술에 취해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나는 다음날 KBS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KBS 뉴스전망대’를 스튜디오만 달리해, 같은 ‘채널’로 방송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였는데도 막상 내게는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양TV 개국 이전부터 김규 부장을 정점으로 최덕수 차장, 홍두표 과장, 김행오 과장, 고일환 과장, 이기하 과장 그리고 아나운서 과장인 나까지를 포함해 자타가 공인하는 봉송계의 ‘쟁이’들이 똘똘 뭉쳐, 그야말로 피땀으로 키워온 동양방송이라는 성채(城砦)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병철, 홍진기 두 회장님은 떠나는 우리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면서 자그마한 선물을 하나씩 나누어주셨다. 문진(文鎭)과 시계였는데, 거기에는 ‘그 위대한 17년, TBC는 영원하리!’라고 씌어 있었다. 

 

KBS출근을 했더니 내 방이 KBS 별관, 동양TV가 있었던 건물에 마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놓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첫 출근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사장실로 불러 차를 나누던 이원홍(李元洪) 사장이, 별관(別館)에 내방을 만들고 있는 모양이라는 말을 듣더니 당장 서무과장을 불러 시정명령을 내렸다. 방송주간 방을 사장실과 그렇게 떨어진 곳에 두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이 사장의 지시에 의해 나는 KBS 본관(本館) 사장실 바로 아래 있는 널찍한 방을 쓰게 되었다. 내 옆방에는 동아방송, 기독교 방송 등에서 온 유명 해설위원들이 방송위원(放送委員)이 되어 자리를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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