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김일권 문제와 김동엽 감독 (5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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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김일권 문제와 김동엽 감독 (5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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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권 문제와 김동엽 감독 (55회)
  제9장 해태그룹과 해태타이거즈
‘김일권 문제’

‘김일권 문제’는 아주 복잡한 실타래였다. 

1974년 봄, 군산상고를 졸업한 김일권은 상업은행에 입단하여 실업 야구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3년 뒤인 1977년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겠다는 생각으로 한양대에 입학을 했는데, 그해 9월 병역 적령기에 걸려 1학년도 마치지 못한 채 군에 입대하여 경리단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김일권은 1980년 6월 제대를 한 달 앞두고, 약혼을 한 상태에서 모친을 여의자 생계유지를 위해 실업팀으로 복귀하고자 했고, 포항제철 야구팀과의 입단교섭이 물밑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업에서 대학으로 옮긴 선수는 졸업하지 않으면 쌍방 감독의 합의가 이루어지더라도 재 이적(移積)할 수 없다’는 규정에 얽매여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실업선수들이 대학을 디딤돌로 삼아 팀을 옮겨 다니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규정대로라면 김일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양대로의 복귀뿐이었지만 1학년으로 복귀하려 해도 시기적으로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양대의 김동엽 감독이 그의 복귀를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기지 않는다는 데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실업의 문을 다시 열어보려고 여로 경로로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김일권은 궁여지책으로 1981년 봄에 한양대 1학년에 복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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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82. 2.6.)

이 복잡한 김일권 선수의 해태타이거즈의 개막전 출전을, 대한야구협회와 프로야구위원회에서 선뜻 허가해 줄 리가 없었다. 개막 날 아침, 너무나 급한 나머지 김 상무와 나는 반포동에 있는 이용일(李容一) 사무총장 댁을 또 다시 찾았다. 

우리의 긴박한 사정을 알고 있는 이 총장은 대한야구협회 쪽과 전화로 의논을 거듭한 끝에, 프로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직권(職權)으로 김일권 선수를 해태타이거즈로 보낸다는 각서(覺書)를 써서 날인(捺印)을 해주었다. 이 각서는 김일권 선수가 개막 경기 3일 뒤인 3월 31일 해태타이거즈 팀에 정식으로 합류하는 보증서 역할을 했다. 

각서를 받은 시각이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김포비행장으로 나가 부산행 12시 비행기를 타고, 김해비행장에 내려, 오후 2시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구덕경기장에 도착해야 했다. 그야말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포비행장으로 나가는 길은 그날따라 왜 그렇게 막히는지, 이리 돌고 저리 돌면서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12시 15분 전, 비행기표는 미리 사람을 내보내 사놓았지만 제대로 수속을 밟고 탑승하기는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나는 김 상무의 소매를 이끌고 무작정 비행기 트랩 쪽으로 내달렸다. 공항 관계자들이 우리를 제지했고, 보안경찰들도 놀라서 달려왔다. 나는 급하게 소리쳤다. 

“중계방송이 급해서 그렇습니다. 부산에서 2시에 야구중계방송을 해야 됩니다.”

모두들 멈칫했고, 그 사이에 내 얼굴을 알아본 직원이 우리를 그대로 통과시켜주었다. 부산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고 ‘박종세가 야구중계 방송을 위해 그곳으로 간다’는 것은 그때까지도 아주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무사히 비행기에 올라탄 우리는 김해공항에 내렸고, 대기한 차에 올라 구덕경기장에 도착한 시각은 1시 40분, 경기 시작 20분 전이었다. 예상한대로 김동엽 감독은 우리가 도장을 받아오지 않으면 경기를 모이콧 할 기세로 선수들을 아무렇게나 놔두고 있는 상태였다. 

김 감독은 우리가 받아온 김일권 선수의 각서와 사무총장의 날인을 확인하고서야, 손에 빨간 장갑을 끼고 운동장에 나가 선수들에게 출전준비를 시키기 시작했다. 
 
3232235521_tqTFQbcx_fd5a8b2d84f53e9fe265e446781f82a3af7fb951.jpg ▲ 프로야구 광주에서의 첫 경기에 앞서

김동엽 감독은 이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본부석 앞에 와서 인사도 하고 관중석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는 등 독특한 제스처와 쇼맨십으로 ‘빨간 장갑의 마술사’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인기(人氣)몰이를 했다. 김 상무와 나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행동을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했다. 

구덕경기장에는 부산의 롯데 팬은 말할 것도 없고, 광주와 서울 등지에서 몰려온, 수천 명으로 헤아려지는 해태 응원단도, 뒤에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을 모른 채 응원에 열중하고 있었다. 김 상무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 채 본부석 한쪽에 자리를 잡았고, 마침내 프로야고 해태타이거즈의 첫 경기는 막이 올랐다. 

참패(慘敗)를 당한 첫 경기

이 날의 경기는 제과업계 끼리의 격돌인데다 영호남의 대결이라는 정서도 어우러져서 흥미를 배가시켰고, 그래서 응원단들은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해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해태 투수 신태중 선수는 초반부터 얻어맞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볼을 아무데나 던지는 것이었다. 감독이 투수를 교체해주지 않으니까, 몸이 지쳐가면서 오기(傲氣)가 난 신태중 투수는 볼을 포수(捕手)에게 던지는 것이 아니고 백네트(back net)로 던져대는 것이었다. 프로야구가 아니라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구단 관계자들이 김동엽 감독을 가까스로 달래 투수(投手)가 교체되면서 야구경기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경기결과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14대 2, 프로야구 첫 경기에서 해태타이거즈는 그야말로 참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멀리 부산까지 응원을 왔던 많은 해태 응원단의 분노는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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