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정몽필 사장과의 우정 (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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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정몽필 사장과의 우정 (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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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필(鄭夢弼) 사장 비명에 가다


1982년 3월에 프로야구가 개막되면서 해태타이거즈 단장이던 나는 거의 매일 경기가 열리는 지방으로 장거리 여행을 다니는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던 4월 말의 어느 날 저녁,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맏아들로 인천제철(仁川製鐵) 사장인 정몽필 군이 갑자기 압구정동 우리 집을 방문했다. 내가 일찍 귀가한 것을 확인하고 찾아온 것이다. 


정 사장은 기분이 아주 좋아보였다. 지금 울산에 있는 고모부 김영주 사장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갑자기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들렀다면서, 집사람에게 라면을 하나 끓여달라고 하더니 아주 맛있게 먹었다. 가끔 라면을 먹고 싶을 때가 있는데, 집에서는 끓여주지 않고, 그렇다고 보는 눈이 있는데, 식당에서 시켜먹을 수도 없다며 밝게 웃었다. 


당시는 현대그룹이 전자사업(電子事業) 신규 투자에 관한 일을 그룹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정 사장은 그 문제로 다음날 동생 정몽헌 사장과 함께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수행해 미국에 간다면서 어딘가 좀 들뜬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가 이번 미국행에 전자산업과는 관련이 없는 인천제철 사장인 자기를 굳이 동행시키는 뜻이 무엇인지, 그런 저런 것을 고모부인 김영주 사장과 의논하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올라와 인천에 있는 인천제철에서 간부회의를 주제한 뒤 공항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나는 밤중에 울산까지 갔다 오는 것은 무리라며 몇 번이나 말렸지만, 정 사장을 미국에 가기 전에 고모부를 꼭 만나야 한다면서 그대로 떠나고 말았다. 


다음날 나는 광주에서 열리는 경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뉴스를 들었다. 정주영가의 장남, 정몽필 인천제철 사장이 새벽에 고속도로에서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정몽필 사장과의 우정


정몽필 사장과 내가 만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경기상고를 나온 정 사장은 경복고 출신 친구들을 별로 좋아 하지 않았지만 나를 만나면 그 괄괄하고 급한 성질을 누그러뜨린 채 곧잘 속마음까지 털어놓곤 했다. 그런데다가 청주방송의 음악 PD로, 내가 ‘라디오 게임’을 진행할 때 음악 반주를 맡았던 박병두 PD가 중매를 하여, 대전방송의 이양자 아나운서와 결혼을 한 뒤로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더욱 각별해졌다.


정주영 회장님은 아들들의 친구까지도 살펴보시는 분이었는데, 정 사장이 나를 만나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다. 아마 아나운서인 나와 어울리다 보면 정 사장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폭넓게 알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셨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정 사장은 현대그룹 중에서도 인정받는 자리인 인천제철 사장직을 맡고부터 부쩍 나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퇴근 후 인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다가 마포에 있는 가든호텔 일식집 <다이(臺)>로 나를 불러내 가볍게 한잔 할 때도 있었는데, 인천제철 간부들이 그런 소박한 장면을 목격하고 정주영 회장에게 좋게 보고를 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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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필 사장과


그렇듯 나와 격의 없는 우정을 나누던 정몽필 현대그룹 장자(長子)로서의 막중한 역할을 앞에 두고 그만 끔찍한ㄴ 일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 뒤, 부인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세월이 흘러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판문점(板門店)을 넘어 북한으로 향하는 때가 왔다. 그런데 정 회장 옆에서 할아버지를 부축하는 손녀들이 정몽필 사장의 딸들인 은희와 유희였다. ‘어느 틈에 저렇게 컸구나!’ TV로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정몽필 군의 애석(哀惜)한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역도 연맹 부회장 


해태타이거즈 단장을 그만두고 광고회사 일에 전념하고 있을 때 해태그룹 박건배 회장이 대한역도연맹 회장에 선출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연맹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역도인들과 자주 접촉을 가졌는데, 그 무거운 바벨(barbell)을 번쩍 번쩍 들어올리는 우람한 체격의 사람들이, 생각과는 달리 아주 꼼꼼하고 순수한 마음씨들을 가진 것을 알고 곧 그들과 정이 들게 되었다. (여기까지 정서)


아마가사키 한일 역도대회


1985년 7월, 나는 일본 아마가시키에서 열리는 한일 역도대회에 우리나라 대표 팀을 이끌고 참가하게 되었다. 오사카[大阪] 공항 근처인 아마사키에 도착한 우리 대표 팀은 환영식을 마치고 다음날부터 경기준비에 들어갔는데,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오사카의 변두리나 다름없는 이곳은 일본 깡패인 야쿠자, 그 중에서도 유명한 ‘아마구치 구미[山口組]’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체격 좋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우리 선수들이 야쿠자를 만나면 자칫 불상사도 생길 수 있다는 판단으로, 선수들에게 할일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니지 말도록 각별한 당부를 했다. 


우리가 묵고 있는 여관은 아주 대형으로, 선수들에게 꼭 필요한 우동기구들도 아주 잘 갖추어져 있어서 불편한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문제는 음식이었다,. 


헤비급 선수들은 몸무게와는 상관없이 잘 먹어야 하기 때문에 불고기를 구워서 먹었는데, 여관의 구조상 그 냄새가 차단(遮斷)이 되지를 않아, 몸무게 관리를 위해 굶다시피 해야 하는 경량급 선수들을 괴롭힌 것이다. 


그런데다가 고기를 근처 고베에서 가져온 고베니쿠[神戶肉]로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일등급 쇠고기였다. 강병식 선수를 비롯한 헤비급 선수들은 그 맛좋은 쇠고기를 그야말로 산처럼 쌓아놓고 원 없이 먹어댔다. 그러나 경량급 선수들은 냄새만 맡으면서, 한 여름에 난방(煖房)장치가 가동된 방에 틀어막혀 몸무게를 줄이느라 땀을 짜내고 있었으니, 보기에도 너무 딱한 광경이었다. 


나와 이형우(李亨雨) 이사는 경량급 선수들의 처지를 보면서 차마 고기를 입에 댈 수가 없어서, 쇠고기 구이를 바라보며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 역도(力道)에는 그런 잔인한 면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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