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어머니 가시다 (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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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어머니 가시다 (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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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가시다 (61회)

  제10장 코래드




1987년 이름 봄, 잔설(殘雪)이 남아 있는 날 어머니는 다시 못 올 먼 길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일제말기(日帝末期)를 거쳐 6.25를 전후한 그 험난한 때에 어린 우리 삼남매를 키우시느라 온갖 고생을 다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형언할 수 없는 그 꿋꿋한 정신과 건강한 몸으로 잘도 헤쳐 나오시면서 자식들을 하나같이 건전하게 키우셨고, 모두를 성공적인 일가(一家)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셨다. 


이제는 아들 며느리 딸 사위의 봉양(奉養)을 받으시며 손자 손녀들 재롱 속에 편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짧은 행복을 시샘하셨는지 하늘이 손짓해 부르신 것이다.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생각하니 그간의 행적이 좀 이산하기는 했었다. 어머니는 전에 없이 나와 고등학교 동기인, 정연철 군의 어머니와 함께 보문동에 있는 탑골승방에도 다니시고, 일가댁을 죽 찾아가서 하룻밤씩 주무시고 오기도 하셨다. 


어렵게 사는 친척 댁에 가실 때는 값나가는 선물을 사가시거나 돈으로 보태드리고 오실 때도 많으시더니, 그것들이 모두 떠나가실 준비였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뵙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으셨고, 다만 일주일 전부터 식사 분량이 다소 줄어든 것이 느껴져서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 


그 무렵에는 나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서빙고동 신동아아파트 7동 401호로 이사를 하였는데, 의사인 친구 정인성 박사가 매일 아침 우리집에 들러 어머니의 건강을 살핀 후에 출근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우리 집을 찾은 정 박사는 병원에 입원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어머니는 막무가내였다. 병원에 안가시겠다고 하시면서도 기운이 없다고 하셔서 거기에 대한 조처만을 해드렸다. 


그런데 그날은 어머님도 느낌이 이상하셨던지 누이동생들도 모두 저녁에 왔다갔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나는 동생들과 작은 매부를 집으로 불렀다. 한 자리에 모인 자식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쉬시겠다고 하시면서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이 새벽 1시쯤 이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8시쯤에 정 박사가 도착하자 출근채비를 마친 나는 함께 어머니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머니의 안색을 살피던 정 박사가, 평소에 농담을 한마디씩 건네던 때와는 달리 정색을 하면서, 아들 가슴에 못을 박지 않으시려면 입원을 하시라고 어머니에게 강력하게 권하시는 것이었다. 정 박사의 강압적인 말이 효과가 있어서인지 어머니는 고집을 꺾고 입원에 동의를 하셨다. 


집사람과 나는 어머니를 깨끗하게 씻어드리고, 머리도 빗겨드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드렸다. 어머니는 만족한 듯 우리에게 웃음까지 보내주시고는 나와 정 박사의 부축을 받고 손수 걸으셔서 현관을 나갔고, 엘리베이터를 타셨고,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오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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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 下 어머니 묘소에서

 

운전은 정달선 기사가 맡고 있었고, 그 옆에 정 박사, 나는 뒷자리 왼쪽에 앉아 어머니를 부축한 채 신동아아파트 단지 안 지하도를 지나 그 건너에 있는 금강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원장과 정 박사는 친한 사이여서 병실은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차가 병원을 향해 출발하자마자 어머니가 내 어깨에 천천히 몸을 완전히 기대시더니, 지하 차도를 지날 때쯤에는 힘이 쭉 빠지는 것이었다. 나는 소리를 질렀고, 차는 곧 병원 앞에 도착했다. 몸이 부하신 편인 어머니를 정 기사가 가볍게 들쳐 업고 응급실로 달렸다. 


정 박사가 옆에 있는데도 나는 왜 그리 몸이 떨리는지, 다리가 이리가고 저리가고 도무지 걸을 수가 없었다. 응급실 의사들이 모두 달려들었고, 원장까지 가세했으나 소생하실 가망은 없는 모양이었다,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응급조치를 시도하던 원장은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댁으로 모셔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집으로 전화를 했다. 어머니방을 치워놓은 후 입원실이 정해지는 대로 뒤따라 병원으로 오기로 했던 집사람은, 어머니가 다시 원기를 회복하시리라 믿었기에 여유를 부리며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있었는데, 다급한 내 전화 목소리를 듣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입원실에 누워보지도 못하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어머니는 숨만 쉬고 계실 뿐 완전히 돌아가신 상태였다. 이번에는 ‘앰블런스’로 어머니를 모셨는데, 집에 들어가는 들것은 앞에서 나와 정 박사가 들고, 뒤는 정 기사가 들었다. 


몸을 씻고 옷도 갈아입고 직접 걸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차에 올라 병원으로 가신 어머니는, 30분도 안되어 병원 앰블런스에 실려 다시 집으로 온 후, 당신 방에 누우셔서 10분쯤을 보내다가 83세를 일기로 저 세상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장례는 회사의 김명하 부사장을 비롯한 전 직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치를 수 있었는데, 나는 관(棺)을 어머니가 평소에 좋아하셨던 꽃으로 장식하는 것에 신경을 쏟았다. 꽃에 쌓인 어머니는 파주군 주내면 백석리에 있는 가족묘지에 아버지와 합장으로 모셔졌다. 


조문(弔文)을 와주신 많은 분들과, 애써 주신 일가친척 특히 외가댁 여러분에게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또한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지켜준 정인성 원장에 대한 고마움은 언제까지 갚아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우리 자식들의 유년의 기억 속에는 백현리 도까밭에 항상 웅크리고 일하시는 모습으로 남아계시는 어머니, 도까밭에 땀과 눈물을 쏟으시면서 우리 삼남매에게는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오로지 ‘겨름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엄하게 이르시던 어머니!


막내동생 종방이가 세상을 떠나자, 도까밭 한 모퉁이에 묻어 놓으시고 매일같이 그 작은 무덤을 돌보시며 영혼을 위로하시던 어머니!


이제 저 세상에서 아버지도 만나시고 일찍 보낸 종방이도 만나셔서 못 다한 얘기 나누시며 영면(永眠)하시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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