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금녕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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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11> 금녕김씨

관리자 0 1920
금녕김씨(金寧金氏)는 경순왕의 8세손인 김시흥(金時興·시호 문열 文烈)을 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2000년 인구센서스에서 금녕김씨는 대사성공지파(大司成公智派)·도순찰사공문제파(都巡察使公文齊派)·만은공길상파(晩隱公吉祥派)·상서공문희파(尙書公文熙派)·송암공질파(松菴公秩派)·영돈영공존파(領敦寧公尊派)·진주목사공형파(晉州牧使公炯派)·충경공경세파(忠敬公景世派)·충의공문기파(忠毅公文起派)·충정공문영파(忠貞公俊榮派) 등이 있다.

  김녕김씨 충의공파 종손들이 전통차례를 지내고 있다.

# 금녕김씨는

인구는 총 51만3000명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금녕김씨라는 성관을 쓰고 있는 인구뿐 아니라 금녕김씨이면서 김인찬을 시조로 하는 양근김씨(또는 김해김씨 북청파, 경주김씨 익화군파), 계유정난을 피해 황해도 풍천에 숨어 들어가 세거지를 삼은 김해군수 김춘(金春)를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 법흥파(金海金氏 法興派)가 있으며, 계유정난으로 멸문의 화를 당했던 백촌 김문기(金文起·사육신의 한 사람, 시호는 충의공·忠毅公)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와 김해김씨의 백촌공파(白村公派)도 있다. 또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진 김준영(金俊榮)을 시조로 하는 분성김씨가 있고, 그 외 결성김씨도 같은 갈래의 성관으로 파악된다.

그중에서 김해김씨 법흥파와 백촌공파는 인구조사에서 김충선을 시조로 하는 사성 김해김씨와 구분되지 않아 김해김씨로 함께 파악되고 있으며, 2000년 인구센서스에서는 20만명 정도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금녕김씨의 성관에 속해 있는 인구는 51만3000+20만(=70만) 정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전 뿌리공원 내 김녕김씨 조형물.
#금녕김씨의 유래와 역사

금녕김씨는 경순왕의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넷째 아들인 김렴(金濂)을 시조로 하고, 인종 때 병부시랑으로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광록대부를 거쳐 평장사에 올라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진 김시흥(시호 文烈)을 중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김렴의 후손으로는 첫째 품언(稟言)을 시조로 하는 수원김씨(水原金氏)가 있으며, 둘째 심언(審言)을 시조로 하는 영광김씨(靈光金氏)가 있다. 그 중 김품언이 거란의 침공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수성군(水城君)에 봉해졌는데, 그 후손 중에서 수원김씨, 인동김씨(仁同金氏), 용성김씨(龍城金氏), 용담김씨(龍潭金氏), 서흥김씨(瑞興金氏), 한남김씨(漢南金氏), 용궁김씨(龍宮金氏), 풍산김씨(豊山金氏), 김녕김씨, 김해김씨(법흥파) 등이 생겨났다.

그중 김녕김씨의 관조 김시흥은 대안군 김은열의 6세손이며, 김품언의 4세손인 김봉기의 넷째 아들로 지금의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는데, 병부시랑으로 있으면서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을 연거푸 평정하여 금주군(金州君·지금의 김해)에 봉해졌다.

이렇게 생겨난 금녕김씨는 갈래를 파악하기가 대단히 복잡한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금녕(김해의 옛 지명)의 지명 때문이다. 김해는 신라에 병합되면서는 금관군으로 되었다가 문무왕 때는 금관소경, 경덕왕 때는 김해소경으로 불렸다. 하지만 고려에 들어오면서 김해부(金海府) 또는 금주(金州)라고 불렸고, 다시 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그 후 1895년이 되어서 김해군으로 개칭되었다.

이렇게 관향의 지명에 따라 김해김씨(후김)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가야계의 김해김씨(선김)와 구분이 모호하여 혼란을 주었다. 결국 금녕김씨는 고종 때 이르러 왕에게 상소한 다음 자신의 성관을 김녕김씨로 쓰게 되었다. 하지만 교통과 소식이 원활하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 때문에 일부는 그대로 김해김씨를 성관으로 쓰고 있다(김해김씨 법흥파, 북청파).

또,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던 세력을 숙청한 계유정난으로 김문기와 그의 아들 현석(玄錫)이 참수를 당하고 멸문의 화를 입게 되자, 가문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도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김문기(이조판서 김관의 아들)가 역적으로 몰린 뒤 김해김씨(후김)라는 이유만으로 수난을 당하게 되자, 성관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그 후 200년이 지난 영조와 정조 시대에 들어와 복권되고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지자 다시 모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갈라진 역사가 오래된 만큼 통합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다른 성관으로 살아왔고(경주김씨 백촌공파), 일부는 김해김씨라는 성관 명칭을 고집하고 있기도 하다(김해김씨 법흥파, 백촌공파, 북청파). 또한 같은 계통의 일부는 다른 성관으로 바꾸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경주김씨 익화군파, 양근김씨, 분성김씨 등). 실제 김문기를 관조로 하는 파도 경주김씨(백촌공파)·김해김씨(백촌공파)·김녕김씨(충의공파)로 나뉘어 있으며, 익화군(益和君) 김인찬(金仁贊)을 관조로 하는 파도 김해김씨(북청파)·경주김씨(익화군파)·양근김씨(楊根金氏)로 갈라져 있고, 분성군(盆城君) 김준영(金俊榮)을 관조로 하는 파도 금녕김씨(분성군파)와 분성김씨(盆城金氏)로 갈라져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서로 적통을 주장하며, 법률적 공방을 벌이기도 한다. 1990년 김녕김씨 충의공파가 경주김씨 백촌공파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이 그것이다. 경주김씨가 족보를 편찬하면서 김문기의 손자인 충립(忠立) 등의 후손을 누락하고, 적통 시비를 족보에 기록하여 김녕김씨 충의공파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또 1985년에는 경주김씨 백촌공파의 후손이 김녕김씨 충의공파 대종회를 상대로 김문기의 조부 김순(金順)의 묘지관할권 확인소송도 있었다. 하지만 법원에서는 어느 파가 진짜 적통인지 진실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정도로 마감했다.

이렇듯 김녕김씨는 조선시대까지 가야계의 김해김씨(선김)와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다 보니 자신의 성관을 뚜렷이 정립할 수 없었다. 또한 충의공 김문기가 계유정난(단종복위사건)으로 인해 역적으로 몰리고 멸문의 화를 입게 되어 그 후손들은 성관마저 속이며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후 고종 때에 김해김씨의 성관을 김녕김씨로 바꾸었으나, 일부 후손은 여전히 김해김씨를 고집하기도 하고, 다른 일부는 전혀 다른 성관을 주장하기도 하고, 일부는 성관을 분리해 독립해 있기도 한다.

백촌 김문기
# 또 다른 김녕김씨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김녕김씨는 대단히 복잡한 세계도를 지니고 있다. 같은 시조의 후손임에도 다른 본관을 쓰는 경우도 있고, 본관 명칭을 김녕김씨로 바꾼 이후에도 다른 성관을 이어오고 있는 혈족도 없지 않다.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렴계의 김해김씨 법흥파와 김춘계의 김해김씨 법흥파가 있다. 김렴계 김해김씨는 경순왕 아들인 대안군 김은열의 아들 김렴을 시조로 하는 법흥파이며, 김춘계 김해김씨 법흥파는 백촌 김문기의 8촌 동생인 김춘(김해군수)이 계유정난을 피해 황해도에 숨어살다, 그 후손들이 평안도 법흥동으로 이주한 뒤 붙여진 이름이다.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운 김인찬을 시조로 하는 양근김씨(익화김씨)와 김해김씨 북청파, 경주김씨 익화군파가 있다. 익화는 경기도 양근(양평군, 양근과 지평군을 통합하여 양평군이 되었음)의 옛 지명으로 김인찬이 익화군에 봉해지면서 관향을 삼았다. 하지만 그의 아들 검룡(儉龍)이 훈련도감으로 제주도에 입도하여 제주에서 경주김씨 익화군파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넷째 종남(從南·영의정 추증, 금성군)의 아들들이 함경북도와 남도에 거주하게 되면서 김해김씨 북청파가 형성되었다.

김문기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문으로는 김녕김씨의 충의공파, 경주김씨 백촌공파, 김해김씨 백촌공파 등이 있다. 김녕김씨 충의공파는 김문기의 손자로 충립 등 6명으로 기록하고 그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경주김씨 백촌공파는 김문기의 손자를 계훈(繼勳)으로 파악하고 그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김해김씨 백촌공파는 김문기의 아들 현석의 이름을 흠(欽)으로 파악하고 그 후손을 자처하고 있다.

또 김준영(金俊榮)은 김시흥(金時興)의 13세손인데,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분성군(盆城君·김해 옛 지명)에 봉해졌다. 그 후손들이 김녕김씨 분성군파를 형성하고 있으며, 다른 후손들은 아예 분성김씨로 분적하기도 했다.

이외에 결성김씨(結城金氏·결성과 홍주가 통합되어 홍성군이 됨)가 있는데, 결성김씨에는 김예철(金禮哲)을 시조로 하는 상주파와 이조판서 김달손(金達孫)을 시조로 하는 위원파가 있다. 김예철은 김녕김씨 시조 김시흥의 11세손이다. 

충북 옥천군에 있는 백촌 김문기 유허비.
# 김녕김씨의 인물들

김시흥은 김녕김씨의 시조이다.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였다. 시호는 문열공으로 금주군(지금의 김해)에 봉군되어 김녕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인찬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와 조선 개국 일등공신이 되고, 익화군(익화는 지금의 양평)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들이 경주김씨 익화군파, 김해김씨 북청파, 양근김씨 등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아들 종남은 예조전서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문기의 호는 백촌이며, 시호는 충의공이다. 시조 김시흥의 9세손이며, 이조판서 김관의 아들로 충북 옥천에서 출생했다. 호조참판과 함길도절제사를 지냈고, 둔전법을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거뒀다. 세조 때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로 있으면서 계유정난 때 군대를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다가 실패하고,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사육신). 이때 영월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아들 현석도 함께 순절했으며 부인과 딸, 며느리 등은 세조 공신들의 노비로 넘겨졌다. 정조에 의해 복권되고 시호로 충의공이 하사되었다.

김홍일(金弘壹·김해김씨 법흥파)은 평북 용천에서 출생했으며,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귀주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조선의용군 사령관을 거쳐 광복군총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 6·25전쟁 때는 제1군단장으로 참전하였고, 5·16군사정변 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을 거쳐 1962년 외무장관에 취임하였다. 1967년부터 정계에 투신하여 신민당에 입당해 1971년 신민당 총재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하였다.

김영삼(金永三·김녕김씨 충정공파)은 경남 거제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9선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또한 야당 총재를 3번이나 역임하고, 김대중(제15대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였다. 1990년 노태우(대한민국 13대 대통령), 김종필 등과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으며, 1992년에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군사독재를 종식하고 문민정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을 합의한 김일성의 갑작스런 죽음과 경기침체로 인한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 등 국정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외에도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석수(분성김씨에서 후에 김녕김씨로 변경),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재규, 김법린 전 문교장관 등이 유명하며, 음악가이자 지휘자인 금난새씨도 김녕김씨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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