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15〉 선산김씨, 삼척김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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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15〉 선산김씨, 삼척김씨 등

관리자 0 1329

# 선산김씨는

2000년 통계청 조사에서 10만9682명으로 파악된 선산(善山)김씨는 통일신라 문성왕 8세손인 김선궁(金宣弓)을 시조로 하는 계통과 경순왕의 여덟째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계통, 그리고 김한충(金漢忠)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김한충을 시조로 하는 계통은 남한의 인구조사에서는 파악되지 않고 있어, 김선궁계와 김추계가 선산김씨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시조를 김선궁으로 하는 선산김씨는 일선(一善)김씨로 불렸다. 그 이유는 선산의 옛 지명이 일선군(一善郡)이었고, 또 고려에서 후백제를 멸하는 데 공을 세우고 문하시중에 오른 김선궁의 일족이 일선군(지금의 선산군)에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손들은 일선김씨로 명명하여 오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시명이 선산으로 바뀌면서 선산김씨로 본관 명칭을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 유명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은 바로 김선궁계의 선산(일선)김씨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계통의 선산김씨가 있다. 경순왕의 8자인 김추를 시조로 하는 선산김씨이다. 이들은 또다시 선산김씨, 삼척(三陟)김씨, 원주(原州)김씨, 진주(晉州)김씨, 온양(溫陽)김씨, 희천(熙川)김씨로 분관되어 나갔다. 따라서 선산·삼척·원주·진주·온양·희천김씨는 본관은 다르지만 혈족은 같은 동성이본동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산김씨와 계통을 같이하고 있는 인구를 보면, 10만9000명의 선산김씨와 8만명의 삼척김씨, 그 외 원주·진주·온양·희천김씨까지 약 2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진주김씨처럼 김추계와 수로왕계(시조는 김유신의 손자 김원술)가 함께 있는 본관들이 있어, 정확한 인구를 산출하기는 불가능하다.


점필재 김종직 종택.
# 김선궁계 선산김씨의 역사와 인물

김선궁계 선산김씨의 시조 김선궁의 원래 이름은 김선이었다. 경순왕이 문성왕의 후손이었으니, 김선은 경순왕의 먼 친척(종형제)쯤 되는 셈이다. 설화에 의하면, 그가 어렸을 때 부친 체의(體誼)를 상해한 자를 살해했다가 투옥되었는데, 관아에서 그의 효심에 감복하여 풀어줬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고 전해진다.

훗날 김선은 왕건에게 귀부하여 공을 세우고, 활을 하사받아 이름을 김선궁으로 바꾸었다. 그 후 후백제를 멸하는 데 공을 세우고 삼한통합 익찬공신(三韓統合 翊贊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리고 정종 때에 순충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문종 대에 이르러 문화시중이 증직되고 일선백(선산백)에 추봉(追封)되어 일선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이렇게 김선이 왕건에게 귀부한 것은 아마도 후백제 견훤의 대야성(합천) 공격 후 일선군(구미·선산 일대)에 침입했을 때, 부친이 견훤 군에게 살해당한 것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의 아들들도 조정에 나아가 크게 이름을 떨쳤다. 첫째 봉술(奉術)은 김선궁의 벼슬을 이어받아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시호는 장절공(壯節公)이다. 둘째 봉문(奉文)은 삼사우윤으로 있다가 고향에 돌아와 선주리(善州吏)가 되었다. 현재 선산김씨는 첫째 봉술 쪽에서 13개의 지파가 나뉘어 존재하고 있으며, 둘째 봉문에서 5개의 지파가 형성되었다.

다만, 점필재 김종직이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인 안동권씨 성화보보다 일찍이 선산김씨 세계보를 정리했으나, 첫째 봉술 이후 6대가 실전(失傳)되어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일문은 화를 피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많은 기록이 실전되었다.

그래서 고려시대 명문대가로 이름을 떨치던 가문도 조선시대에는 어느 정도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근현대 들어와 선산김씨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명문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국회의원도 14명이나 배출하였으며, 지금도 현역 국회의원으로 김영선(한나라당), 김영환(민주당), 김태환(한나라당) 등이 있다. 작고한 김윤환 의원은 민정당과 민자당,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민국당 등을 거치며 정치의 주요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가 김동리 선생은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조선청년문학가협회장·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우익 민족문학론의 입장을 옹호한 대표적 문학가이다. 저서로는 ‘등신불’ ‘무녀도’ ‘황토기’ 등이 있다.
 선산김씨 시조 김선궁(순충공) 묘역.#김추계 선산김씨의 유래와 역사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선산김씨에는 김선궁계와 다른 선산김씨가 존재한다. 그들은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 김추를 시조로 하는 선산김씨이다. 이들 김선궁계와 김추계는 현재까지도 선산김씨의 정통성을 놓고 족보의 위작 등을 거론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김선궁계 선산김씨 측에서는 김추계에서 근거로 삼고 있는 1898년 족보는 조선 개국 초 왕자의 난에 동참하였다가 피신하여 함북 단천(김추계 단천파)에서 살던 김성부의 후손들이 작성한 위보라는 주장이다.

즉, 김추계 선산김씨의 원 시조는 원성왕의 9세손인 김한충이며, 그 후 김추계 선산김씨 단천파에서 시조로 삼고 있는 김기(金起)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김기의 5세손인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 강원관찰사·대사간)이 기록한 구암집(우문간공구암소저)에도 원조고는 김한충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추를 시조로 하는 씨족으로는 김추계 선산김씨뿐 아니라 삼척김씨, 원주김씨, 진주김씨, 온양김씨, 희천김씨 등이 있다.

김추계 선산김씨는 고려 말에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을 지낸 김문(金文)의 슬하에서 4형제가 나와 4계파를 형성하고 있다. 첫째 김성원(金成元)은 서운관정과 중서령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기(金起)는 광주목사를 지내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으나, 조선의 개국으로 선산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둘째 아들 김성부는 조선개국 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태조가 함흥에 이거할 때 호종한 뒤 복귀하지 않고 함경도 길주 등지에 정착하였다. 셋째 아들 김성룡도 조선개국 원종공신에 책봉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화의부원군에 봉해졌다고 전한다. 그의 아들 이탁은 병조참의를 지냈으며, 그 후손들은 이천 등지에 산거하고 있다. 넷째 아들 김성여(金成呂)는 고려말에 별장동정이라는 벼슬을 했고 그 자손들은 평안도에 세거하였다고 전하나, 남북관계의 단절로 행적기록은 유실되었다.

이들 김추계 선산김씨의 인물로는 을사조약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한 김정묵이 있으며, 정·관계 인물로는 김성조·김명자 국회의원, 그리고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있다. 그리고 재계에서는 김병진 대림그룹 회장이 김추계 선산김씨로 알려져 있다.
 청백리로 추앙받는 김취문(선산김씨 김추계)을 기린 낙봉서원.# 또 다른 선산김씨들-삼척김씨 외

삼척김씨의 시조 김위옹(金渭翁)은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 일선군 김추(일선군 혹은 삼척군 또는 진주군)의 둘째 아들로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어 실직군(悉直君)으로 삼고 선산김씨에서 분적하였다.

삼척김씨 시조 김위옹의 장남 김자영(金自英)은 배융교위를, 차남 김자남(金自男)은 삼중대광 태사를 지냈다. 그 후손들도 복영이 관찰사를, 승련은 사공을 지냈고, 각종 부사와 대부·대장군·상장군 등을 역임하였다. 또 11세손 김인궤(金仁軌)는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경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또, 김병충(金秉忠)은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과 논의하여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들었다.

그리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李成桂)는 삼척에 거주하였던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와 비(妃)를 목조대왕(穆祖大王)과 효공왕후(孝恭王后)로 추존하면서 삼척을 부(府)로 승격하고, 효공왕후(孝恭王后)의 진외조부였던 김인궤를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으로 추봉하였다. 또한 태조는 자신이 사용하던 관복대인 홍서대(紅犀帶)를 삼척부사에게 하사하고 제(祭)를 대신하게 했는데, 이를 영조가 삼척김씨 종중(宗中)에 하사하였다. 그 홍서대는 지금도 삼척김씨 보본단(報本壇)에 소장되어 있다.

원주김씨의 시조는 김거공(金巨公)이다. 그는 일선군 김추의 8세손으로 고려 의종 때 지문하성사를 거쳐 호부상서에 이르러 원성(원주)백에 봉해졌다. 그 이후 후손들이 원주지방에 세거하며 김거공을 1세조로 하고 관향을 원주로 삼았다. 원주김씨 중 11손 김연지(金連枝)는 세종 때 대사헌을 지냈으며, 그의 딸이 정종의 아들 복생과 혼인하여 왕가와 사돈 간을 형성했다. 김응남(金應南)은 선조 때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원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김덕원(金德遠)은 숙종 때 우의정에 올랐으며, 아들 몽양(夢陽)은 대사간을 지냈고, 후손인 몽서(夢瑞)는 목사를, 조윤(曺潤)과 화제(華濟)는 군수를 역임하였다. 2000년 통계청에 의하면 원주김씨는 1만97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진주김씨는 연원을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인 김추를 시조로 모시는 신라계가 있고, 다른 하나는 김유신의 둘째 아들인 원술(元述)을 시조로 하는 가야계가 있다.

김추를 시조로 하는 선산김씨와 맥을 같이하는 신라계 진주김씨는 김추의 10세손인 김충신(金忠信)의 후손들이다. 그중 김무진(金茂珍)은 고려 충혜왕 때 집현전 태학사를 역임하고 진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태(台)는 좌찬성에 올랐다. 그 외 조선조에서 호조참의를 지낸 김중국(金重國)과 호조참판 김귀민(金貴敏)이 유명하다. 2000년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진주김씨는 1만9795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삼척김씨 대종회의 실직군왕 대제 봉행.
진주김씨는 연원을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인 김추를 시조로 모시는 신라계가 있고, 다른 하나는 김유신의 둘째 아들인 원술(元述)을 시조로 하는 가야계가 있다.

김추를 시조로 하는 선산김씨와 맥을 같이하는 신라계 진주김씨는 김추의 10세손인 김충신(金忠信)의 후손들이다. 그중 김무진(金茂珍)은 고려 충혜왕 때 집현전 태학사를 역임하고 진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태(台)는 좌찬성에 올랐다. 그 외 조선조에서 호조참의를 지낸 김중국(金重國)과 호조참판 김귀민(金貴敏)이 유명하다. 2000년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진주김씨는 1만9795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온양김씨 또는 희천김씨는 일선군 김추의 셋째 아들 김우(金佑)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강종 때 문하시중으로 나라에 공을 세우고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에 올라 온양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관향을 온양으로 하였다.

그 후 13세손 김우(金宇)가 조선조에서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희천군에 봉군되었으므로 그를 중조(中祖)로 하고 본관을 희천으로 개관하였다. 2000년 통계청에 의하면 희천김씨는 2512명이 살고 있다.

경산김씨(慶山金氏)의 시조는 김인궤이다. 그는 일선군 김추의 10세손이며, 고려 때에서 대장군을 지낸 김윤성(金允成)의 아들이다. 그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을 지냈다. 그 후 후손인 김육화(金育和)가 이부상서·좌복야(左僕射)·상장군 등을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경산군에 봉해졌다.

그 후손들이 김인궤를 시조로, 김육화를 세조로 삼고, 삼척김씨에서 분적하여 경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000년 통계청에 의하면 경산김씨는 7550명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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