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광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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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20> 광주 이씨

관리자 0 1393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이씨(李氏) 중에서 네 번째로 많은 인구를 갖고 있는 씨족이다. 2000년 인구센서스 조사에 의하면 광주이씨는 4만8811가구 총 15만8249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광주이씨는 고려 말에 광주지역에서 생원을 지낸 이당(李唐)을 시조로 삼고 있다. 이당은 고려 말 국자감(國子監)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는데, 그 아들들 5명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크게 출세함으로써 조선조에 들어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된 인물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원래 광주이씨의 시조는 신라 내물왕 때 내사령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이라는 설이 있다. 그 후 광주이씨 일족은 신라가 망할 때까지 칠원(漆原·지금의 경남 함안)에 세거해 왔다. 하지만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할 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토평되었다. 그 후 고려에서는 이들을 노비로 삼아 광주(廣州) 일원에서 살게 했다. 그렇게 광주 일원에서 노비로 살던 광주이씨 일족은 고려 말에 들어와 이당이 생원이 되고, 그 아들들이 크게 이름을 떨침으로써 가문이 급속히 번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광주를 본관으로 정한 것은 940년(태조 23)에 지명이 광주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하지만 이자성으로부터의 세계도가 실전되어 고려 말부터 파악되고 있는 현조(顯祖)를 각각 일세조로 하여 족보를 수보(修譜)하게 되었다.

광주이씨의 분파를 보면, 둔촌(遁村) 이집(李集: 李元齡)을 1세조로 하는 둔촌공파(遁村公派), 이익비(李益庇)의 현손 이녹생(李祿生)을 중흥시조로 하는 율정공파(栗亭公派)의 이관의(李寬義), 이익강(李益康)을 중흥시조로 하는 석탄공파(石灘公派) 이양중(李養中)과 암탄공파(巖灘公派) 이양몽(李養蒙)이 있다. 그중 율형공파·석탄공파·암탄공파는 소수이고 둔촌공계가 대다수이므로 조선조에 광주이씨의 번영을 가져온 것도 둔촌공계라고 할 수 있다.

둔촌 이집의 영정. 이용훈 전 대법관, 이수성 전 총리 (왼쪽 사진부터)
광주이씨의 연혁과 인물

광주이씨를 이야기할 때, 둔촌 이집과 그의 아버지 이당(李唐)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전엔 광주이씨 가문은 실제 존재했었는지조차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신라 내물왕 때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자성을 거론하기도 하고, 또 칠원(함안) 일원의 세거 호족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고려 태조 이후 천민계급으로 떨어져 아전(衙前)신분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역사적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가 갑자기 역사에 나타난 것이 고려 말이다. 둔촌 이집의 아버지인 이당이 국자감(國子監) 생원이 된 후 광주이씨 가문은 급속히 번창했다. 광주의 아전으로 있던 이당이 가문을 일으키게 된 과정은 설화로 전해 내려온다.

“고려 말에 광주고을의 원님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걸터 앉아 있었다. 꿈을 깬 원님이 이상히 여겨 뜰에 나가 나무 위를 올려보니 자기의 아전인 당(唐)이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치고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고 있던 터라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원님은 벙어리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 고을 원님의 사위가 된 이당은 슬하에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그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 이집 선생으로 고려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되었다. 둔촌 이집은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과 깊이 사귀었는데 공민왕 때 국정을 전횡하던 신돈(辛旽)을 논박하였다가 포살령을 받고 친구 최원도가 있는 영천으로 피신했다가 신돈이 살해된 후에 돌아왔다.

이집이 경상도 영천에 머물렀던 것은 영천에 있는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가 증명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벼슬과 학문으로 서로 우의가 돈독하던 최원도는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낙향을 하여 영천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이집에게 포살령이 떨어지자, 늙은 아버지 이당을 업고 영천까지 가서 최원도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4년 동안 숨어 살던 이집은 신돈이 죽은 후 다시 광주로 돌아와 살게 되었다. 하지만 연로한 아버지 이당은 영천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 묘역을 쓰게 되었다.

이집의 세 아들은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큰아들인 이지직(李之直)은 형조참의를 지냈고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둘째 이지강(李之剛)은 좌참찬을, 셋째 이지유(李之柔)는 사간을 지냈다. 또 이지직의 아들 이장손(李長孫)은 사인(舍人)을 지냈고, 이인손(李仁孫)은 세조 때 우의정에 이르고, 이예손(李禮孫)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그중 이인손의 다섯 아들이 조정에 중용되었는데, 큰아들 이극배는 영의정과 광릉부원군에, 둘째 이극감은 형조판서 광성군에, 셋째 이극중은 광천군에, 넷째 이극돈은 이조판서 광원군에, 다섯째 이극균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그러다 보니 조선 성종 조에는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가 되었다. 팔극조정이라 함은 극(克)자를 쓰고 있는 광주이씨 문중의 8명이 영의정을 비롯해 각종 판서와 중요 직책을 역임하며 조정의 대소사를 쥐락펴락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그럼으로써 광주이씨는 조선 초기 제일가는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 초기 번성했던 광주이씨는 갑자사화 등 각종 사화에 연루됨으로써 일족 30여명이 몰살을 당하는 멸문의 화를 당하기도 했다. 이극감의 아들 이세좌와 손자 4명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하지만 훈구파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조광조 등 명문사림과 유대를 돈독히 하고, 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가문이 다시 일어났다. 그렇게 조선조 광주이씨는 명문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침을 겪어야 했다.

‘오성과 한음’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선조 때에 광주이씨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이 된 그는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에 오른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가서 탁월한 외교수완으로 5만의 원병을 끌어들여 서울수복에 수훈을 세웠다. 광주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88명, 정승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했다. 

이휘소 박사, 이승엽 선수, 탤런트 이순재 (왼쪽 사진부터)광주이씨의 인물

◆둔촌 이집=둔촌 이집은 효를 실천해 귀감이 된 인물로 유명하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는 남한산성의 ‘국청사 우물’ 이야기와 과거 동기인 최원도와 얽힌 이야기가 있다.

그의 아버지 이당이 종기(등창)를 앓아 고생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이집의 꿈에 신선이 나타나서 “목욕재계하고 국청사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리면, 아버지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이집은 백일 동안 기도를 드리고 국청사에서 돌아오는 길의 바위 틈에 흐르는 샘으로 아버지 상처 부위를 닦아내니 상처가 나았다고 한다. 그 후 소문이 널리 퍼져 피부병 환자가 몰려왔고, 사람들은 그 샘물을 ‘국청사 우물’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 이집은 1347년(충목왕 3)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합포종사(合浦從事)를 지냈다. 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을 논박하다가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늙은 아버지를 업고 친구인 최원도가 있는 영천으로 도피하였다. 은거생활 4년이 된 이듬해 둔촌의 아버지 이당이 영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최원도는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 놓은 묘 자리에 예장하였다. 영천의 나현에 세칭 ‘광주이씨 시조공 묘’가 바로 이 묘인 것이다. 이런 연후로 6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음력 10월10일이 되면 영천에서는 양가가 같은 날에 묘제를 지내고 서로 상대방의 조상에게도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는 당시 임심문(任深文)을 비롯한 60명에 달하는 많은 인물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다. 특히 이색·정몽주·이숭인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三隱)의 기(記)·서(序)·서(書)는 그와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하여준다. 그의 후손들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혁혁한 훈구세력으로 등장함으로써, 그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1669년(현종 10년)에 여러 사람들이 그 유덕을 추모하여 광주 암사 강상에 서원을 세우고, 1697년(숙종 23년)에 ‘구암서원(龜岩書院)’이란 사액을 받아 이곳에 제향(祭享)되었다. 이 서원은 현재 서울 강동구 암사동의 구암서원(龜巖書院)이다. 저서에 ‘둔촌유고’가 있다. 

조선조에서 명신으로 이름 높았던 한음 이덕형.◆한음 이덕형=한음 이덕형은 1561년 외가인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이민성(李民聖)이다. 대사간이자 동인에 속한 이산해(李山海)의 딸과 혼인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결혼을 주선한 이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다. 나중에 부인 한산이씨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1580년(선조 1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이이(李珥)에게 발탁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91년 예조참판에 오르고 겨우 31세에 대제학을 겸임했다. 조선역사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오른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정주(定州)까지 호종하였고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1593년 선조는 이덕형의 공을 인정하여 병조판서에 임명하였고, 이듬해에는 이조판서가 되고 조선의 군사편제를 새롭게 만든 훈련도감(訓鍊都監) 당상에 임명하였다. 1598년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01년 경상·전라·충청·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의 즉위와 동시에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북인(대북파)과 대립하였고, 결국 모든 관직이 삭직되고 낙향하여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물러났다가 경기도 광주 사저에 머물던 중 병을 얻어 1613년 사망했다.

절친한 사이로 잘 알려진 이항복(李恒福)과는 기발한 장난과 우정이 얽힌 많은 일화를 남겼고 1613년 사망했을 때 이항복이 가장 슬퍼하며 이덕형을 직접 염을 했다고 전해진다. 인조 때 복관되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근대에 들어와 일제시대에는 독립군으로 활약 중 체포되어 순국한 이수택(李壽澤)이 있으며 을사조약 후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직한 이백래(李白來)가 있다. 또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종훈(李鍾勳)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인 이휘소 박사가 있으며, 이용훈 대법원장, 이수성 전 총리, 이중재 전 의원과 그의 아들 이종구 의원, 이경재 국회의원, 이주영 국회의원 등이 있으며, 이명재 전 검찰총장, 이택순 전 경찰청장도 광주이씨 가문이다. 또 우리나라 여성계의 태두인 이태영 박사를 비롯하여 탤런트 이순재, 야구선수 이승엽도 광주이씨 집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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