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어머니와 아버지의 후반기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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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어머니와 아버지의 후반기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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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아버지의 후반기 (4회)

  제1장 내 고향 도라산




아버지의 후반기


해방 전후에 아버지는 개성세무서에 다니던 일을 그만 두셨고, 우리 식구의 살림집도 다시 도라산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도라산리 112번지의 고향 큰집에는 둘째 형님이 살고 있었으므로 우리 식구는 길 아래 작은 집에 살림을 차렸다.


해방된 고향 동네에서 아버지의 후반기는 시작되었다. 아랫말, 가운뎃말, 윗말로 나뉘어진 고향 도라산리는 도랍산이라고도 하고 소정동, 세장말이라고도 했으며, 또 아랫마을은 범말이라고도 했는데, 100호 가까운 주민들은 거의가 창원 박 씨 우리 일가들이었고, 타성(他姓)은 몇 집되지 않았다. 이곳의 구장이라고도 하고 이장이라고도 하는 직책을 맡으신 아버지는 마지막 봉사를 일가들, 마을 사람들을 위하는 심부름에 바치셨다.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몇 년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을 위해 헌신, 봉사 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남을 위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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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머니 이금순 여사는 1903년 임강 이씨(臨江 李氏) 댁 2남 4녀의 둘째 딸로 개성에서 태어나셨다. 어머니는 한글을 깨치고 한문을 배우려고 할 즈음 큰 외삼촌이 일제에 항거하여 만주로 떠나시는 바람에 어린 나이로 개성 인삼창(人蔘廠)에 취직을 하시게 되었다.


그곳에서 숙련공이 된 어머니는 스물아홉 노처녀가 되어서야 아버지를 만나 후처로 시집을 오시게 되었는데, 결혼 후에는 도랍산, 연천, 전곡, 장단, 역전 등으로 수없이 이사를 다니면서도 아버지를 성심껏 뒷바라지 하셨고, 우리 삼남매를 키우느라 손에 물마를 날이 없으셨다.


전실 아드님 세 분도 우리 어머님을 낳아주신 분 이상으로 따랐고, 집에서 속상한 일이 있던가, 사회생활 중 어려운 일을 만나면 며칠이고 우리 집에 와 묵으면서 어머니에게 의논하고 위안을 얻곤 하는 것을 여러 번 볼 수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 어머님은 전실 아들들과 당신이 낳은 아들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오로지 사랑으로 감싸신 넉넉한 분이셨다. 엄격한 듯 따뜻했고, 통이 큰 듯 자상하신 어머니는 어떻게 보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자식들에게 정성을 바치셨다.


어머니는 신체도 건장하시고 마음도 한량없이 넓어 일견 여걸(女傑)의 풍모를 지니셨지만, 나이 많은 남편에다 어린 삼남매에 대한 격정이 너무 크셨기에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온몸을 던지는 정성으로 사실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가끔 우리를 앞에 앉히시고 “우리가 지금 시련 속에 어렵게 살고는 있지만, 절대로 잘된 사람이나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시기, 질투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겨름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머니는 ‘겨름 마음’이란 시기, 질투, 미움을 떠나 겨루고, 경쟁하며, 나도 해보겠다고 스스로를 다스리고 노력하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해주시며, 그 뜻을 늘 새기고 살 것을 당부하셨다. 어려서는 별 생각 없이 듣기만 했는데, 철이 들고 성장하면서 나는 ‘겨름 마음’이 더 이상 좋은 말이 없다고 할 정도로 깊은 뜻과 오묘한 이치를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름 마음’은 남이 잘 되면 칭찬하고 박수를 보내면서 내면에서도 나도 어떻게 하든지 잘 되도록 노력해야지 하고 마음을 다지는 채찍으로 내게 남아 있다. 많이 배우지 못하신 어머님에게서 받은 가장 큰 유산(遺産)으로 나는 이 말을 가슴에 새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해 4월


그해 4월 아버지는 내가 서울대학교 재학 중에 아나운서에 합격해 KBS로 출근을 할 때, 이제는 걱정이 없다는 듯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1959년 2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치른 방송사 시험에 합격하여 발령이 났을 때 또 한 번 환하게 웃으시더니, 그해 4월 저 세상으로 가셨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때 너무나 영광스럽게도 당시 공보처장이던 오재경(吳在璟) 장관께서 조문을 와주셨고, 오재경 장관께서는 나에게 공보처 동기라면서 농담을 하셨는데, 내가 말단 아나운서로 중앙방송에 입사할 때, 오 장관께서는 장관이 되신 것을 빗댄 말씀이었지만, 다른 직원과는 할 수 없는 농담을 나에게는 허물없이 해주신 것이어서 두고두고 생각이 난다.


구 뒤 오재경 장관님은 5.16이후 공보부장관으로 다시 부임하셔서 또 한 번 나와 인연을 맺었고 우리나라의 초창기 로타리 총재로 활동하실 때도 ‘로터리인’으로서 모시게 되어 그 큰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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