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라디오 게임 (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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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라디오 게임 (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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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 게임 (16회) 

  제3장 대학 진학과 방송국 입문




그 당시 국방뉴스는 우용삼, 박정수, 윤기호, 윤지영 씨가 감독을 맡았고 양후보, 양주남, 정희민, 윤동렬 씨가 기술을, 음악효과는 최형래, 홍종희 씨 등이 담당했었다. 30년 동안 홍보관리소에서 해설을 하는 동안 정이 들었던 면면들이다.


특히 대한뉴스는 1958년 시작하여 1968년 10월 올림픽 중계방송을 위해 멕시코로 떠날 때까지 10년 동안 해설을 맡았고, 이후 김승한 아나운서에게 바톤을 넘겼다. 그런데 그 10년은 말 그대로 우리나라가 겪는 최대 격변기였다. 자유당 말엽과 4.19의거, 장면(張勉)정권의 혼란기, 5.16군사쿠데타, 6.3사태, 새마을운동, 월남파병 등이 모두 내가 대한뉴스 해설을 맡았을 때 일어났던 것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던 격랑의 현대사를 대한뉴스가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그런지 지금도 ‘그때를 아십니까’ 등의 TV프로에는 내 방송이 소개되는 경우가 많고, 그런 때마다 나는 가슴 뭉클한 감회에 젖기도 한다.


1959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나는 ‘라디오 게임’사회로 우리나라 학교 대항 퀴즈게임 개척에 온 힘을 기울였다. 시작은 최세훈 아나운서가 했지만 바로 내가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내 스타일로 진행되었는데, 관심과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결승전 상황이 사진과 함께 신문에 실리기도 하고 고등학교 에는 ‘라디오 게임’반이 생기기도 했다.


게임은 두 고등학교에서 선수들이 나와 양쪽에 앉고 사회자가 가운데에 앉아 문제를 내면, 아는 사람이 먼저 버튼을 눌러서 대답하는 형식으로 치러졌다. 그때 버튼을 누르면 램프에 불이 켜지는 게임 기계도 우리 KBS기술진이 처음 만들었는데, 학생들은 게임에 들어가기 전에 처음 보는 기계 앞에서 버튼 누르기 연습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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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대 국회에 막 등원했던 시절 

 

초기에는 서울 소재 고등학교만을 대상으로 하다가 인기가 치솟자 나중에는 지방으로 내려갔고, 학교가 아닌 장소에서 게임을 하기도 했다. 연말에는 전국의 우승팀들이 예선경기를 거치고 마지막 까지 남은 두 학교가 남산 KBS 연주소(演奏所) 공개홀에서 최종 결승을 벌였다. 연말 최종 결승 때는 두 학교 학생들이 남산으로 모이고 신문, 잡지 기자들도 취재를 와서 열기가 그야말로 뜨거웠다.


프로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생겨났다. 문제를 미리 알아내려고 고등학교 관계자들이 방송국을 찾아와, 애원도 하고 애교작전도 펴는가 하면, 심지어는 술대접의 유혹까지 펼친 것이다.


사실 문제의 보안은 이 프로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큰 일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한 문제라도 새어나가면 끝장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대학입시 다루듯 문제를 잘 지켰고, 끝까지 아무 말썽 없이 프로그램을 성공시킴으로써 ‘라디오 게임’을 방송 퀴즈프로그램의 효시로 자리 잡게 했다.


‘라디오게임’에서 우승을 많이 한 학교는 ‘서울여상’, ‘경기여고’, ‘이화여고’, ‘경기고’, ‘경복고’, ‘중앙고’, ‘중동고’ 등이었다. 지방학교로는 실력도 우수하면서 유난히 고운 학생들이 많았던 ‘강릉여고’와 씩씩한 모습의 ‘마산고’ 등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한번은 전남 광주에서 라디오게임을 마치고 그곳 선생님들과 저녁식사를 했는데, 매실주를 권하는 대로 주책없이 많이 마시고 취했던 기억이 난다. 밤 기차로 상경하면서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내내 기차 승강구에 앉아 졸다 깨다 했는데, 술기운에 잠이 깊이 들어  떨어지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한번은 전북 익산 남성여고에서 방송을 마치고 교감선생님과 식사를 했다. 교감선생님은 초면인데도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인간적인 매력이 듬뿍 느껴지는 분이었다. 나는 스탭들에게 이 분이 분명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예언을 했는데, 나중에 전라북도 교육감에 오르셔서 나는 한참 동안 관상쟁이로 불리기도 했다.


라디오게임 초창기에는 두 학교 선수가 양쪽으로 갈라서서 아는 문제가 나오면 ‘STOP'을 외치고 문제를 맞췄는데, 이 소리가 동시에 나올 때 누가 먼저인지 판가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진행을 해서 별 문제는 없었지만 항상 찜찜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기술을 담당한 분들이 연구 끝에 부저 달린 신호기를 만들어냈을 때 내 기쁨은 아주 컸었다. 그런데 요즘 텔레비전의 유사한 프로에서 부저를 누르면 온갖 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좋은 그림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라디오 게임에 출현했었다는 50대의 장년들을 만나 인사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같이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어서 그때마다 여간 흐뭇하지가 않다. 라디오게임은 학교를 찾아가는 게임방송의 효시였다. 그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내가 중요한 몫을 담당했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한다.


그 당시 PD를 오래 맡았던 김석호 선생과 기술을 담당했던 홍기봉, 박규진 씨, 그리고 항상 명랑한 얼굴로 운전을 하면서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해주던 문창남 기사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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