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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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2> 성씨의 유래

박두현(Anselm) 0 1217

[뿌리를 찾아서] <2> 성씨의 유래


#혈통과 출신지역을 나타내던 성씨

각 나라의 성씨 제도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아무래도 중국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중국에서는 약 5000년 전부터 성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3황5제시대 ‘신농(神農)씨’의 경우, 어머니가 살았던 지역이 강수(姜水)여서 성을 강이라고 했다. 또한 황제 헌원(軒轅)은 성이 희(姬)였다. 초기에는 ‘성(姓)’을 위주로 사용했고, ‘씨(氏)’는 나중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성씨는 처음 사용될 때 엄격히 구분되는 용어로 ‘성(姓)’은 계집녀(女) 변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어머니 계통을 이어받는 말이고, ‘씨(氏)’는 아버지 계통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성(姓)은 주로 혈통을 나타내는 말이고, 씨(氏)는 출신 지역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렇듯 성씨 사용 초기에는 모계사회 전통의 특성 때문에 모계혈통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후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되면서 성(姓)과 씨(氏)가 통합된 형태로 되었다. 즉, 성이나 씨가 동일하게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출신 지역은 본관(한국의 경우)의 형태로 분화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은 성씨는 혈통을 나타내는 말이고, 본관은 조상, 또는 본인의 출신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또한 성씨제도가 통치제도와 결합하면서 황제가 하사한 것은 성(姓)으로 표기하고, 왕이나 제후가 하사한 것은 씨(氏)로 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성씨가 하나의 말로 결합되면서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성씨를 사용하는 인구도 사회 현실과 접목되어 수많은 변화를 거쳤다. 처음에는 씨족(모계사회에서는 모계혈통)을 구분하는 것으로 쓰이다가, 이후에는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기도 했고, 나중에는 가문이나 개인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최상층 귀족(황제, 또는 왕과 제후, 족장)에게만 쓰였다가 점차 귀족으로 확대되었고, 일반 백성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 후 신분제 사회의 철폐에 따라 천민 출신도 성씨를 갖게 되었으며, 지금은 모든 국민이 성씨가 있다.
 

◇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에 위치한 뿌리공원 입구. 뿌리공원은 전국 유일의 효 테마공원이다.

#통치 수단으로서의 성씨



동양사회에서 성씨는 백성에 대한 통치나 관리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성을 하사한다든지(사성), 씨족을 통한 행정관리가 그것이다. 일찍이 주나라에서는 공신에게 식읍을 나누어 봉건제를 시행했다. 이와 함께 식읍을 관리하는 제후들에게 성씨를 하사했다. 이는 중국만이 아니었다. 부여나 고구려, 백제,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각각의 국가에서는 씨족들을 구분하는 성씨가 있었고, 이 부족을 통해 백성을 통치하고 관리했다.

이러한 경향은 역사가 진척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황제는 각 지역의 왕과 제후들에게 성씨를 하사하고, 왕과 제후들은 그 신하들에게 성씨를 하사하여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다. 우리나라도 매한가지다.

신라 말에는 국가가 관리해야 할 중요 인물에게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했으며, 고려 초에는 개국공신들에게 성씨를 하사하여 통치 및 국가 지배구조의 근간으로 활용했다. 이렇게 사성을 통치에 활용한 것 외에도 씨족사회는 백성에 대한 관리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부여·고구려·백제·신라에서 부족들에게 성씨를 부여하고 관리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향·부곡·소 등 일정한 신분에 따라 성씨와 주거지를 주어 거주케 한 사례를 통해서도 그것은 확인된다. 즉, 성씨가 통치를 위한 수단뿐 아니라, 행정관리 체계로도 활용되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씨가 형성되었기에 성씨는 신분질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씨를 통해서 그 사람의 신분적 지위는 물론 혈통관계를 파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성씨를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또 어떤 조상에서 출발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성씨는 집단적 신분을 나타내는 징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뿌리공원에 설치된 ‘재령강씨’ 문중 조형물 ‘세계로’(조각가 도정원 작품). ‘재령강씨 시조의 충절을 기리며 자손만대로 이어지고 세계 만방에 널리 알려져서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후손이 되리라’는 다짐을 담고 있다.

#한국 성씨의 기원 1-성씨에 대한 오해와 진실



우리나라 성씨와 족보를 보면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한자 성을 갖게 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라 왕족인 박·석·김씨는 각각 박혁거세·석탈해·김알지 때부터 박·석·김이라는 성을 썼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야 수로왕의 성도 김씨로 여기고 있으며, 심지어 고조선 시대의 왕에 대해 한자의 성씨가 있었던 것으로 여긴다.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보면 각 성씨의 탄생설화와 함께 성씨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했기 때문에 ‘고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이 충신들에게 ‘극씨(재사)’ ‘중실씨(무골)’ ‘소실씨(묵거)’를 사성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백제의 시조 온조는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씨’라고 했다. 신라는 박·석·김씨의 삼성 전설이 전해오며, 유리 이사금 때 육도(또는 육촌, 육부족)에게 ‘이씨(양부)’ ‘최씨(사량도)’ ‘손씨(점량부)’ ‘정씨(본피부)’ ‘배씨(한저부)’ ‘벽씨(습비부)’ 성을 사성하였다고 했다. 또한 금관가야의 수로왕 전설을 언급하며, 황금알에서 탄생하여 성을 ‘금씨’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현재 확인되는 금석문과 중국 고서로 추정할 때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나 가야의 성씨가 처음부터 쓰이기 시작했다고 하고 있으나, 신라 진흥왕 때 건립된 4곳의 순수비와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그리고 경주 남산의 진평왕시대 신성비에는 ‘성’을 쓴 인물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 비에는 우리말로 된 ‘이름’ 뒤에 본(출신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촌명(소속부명)이 사용되었다. 즉 ‘000 훼부(양부)’ ‘0000 소훼부(급량부)’ ‘000 본피부’, 이런 식이었다. 다시 말해 유리 이사금 때부터 사성을 하였다면 ‘000 이씨’ ‘0000 최씨’ ‘000 정씨’ 등으로 썼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다. 이는 중국의 한서 기록과도 일치한다. 한서와 후한서에 나타나 있는 삼국시대 국왕과 인명기록을 보면 후마(주몽왕)·마와궁(태조왕)·수성(차대왕)·백고(신대왕)로 쓰고 있으며, 삼국지에도 마·궁수성·백고(고국천왕)·유리모(산상왕)·계(고국원왕)·안(광개토왕) 등의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 후 남북조시대 진서에 와서야 장수왕의 이름을 ‘고연’이라고 칭하고 사신들에 대해서도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성과 이름을 썼다.

이것은 백제나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부터 여구(근초고왕)·여영(진지왕)·여비(비유왕)·여경(진로왕)·여륭(무령왕)·여명(성왕)·여창(위덕왕) 등이 진서와 송서에 백제왕의 성씨로 표기되다가, 무왕 때부터 부여씨로 기록하였다. 신라에서도 23대 법흥왕 기록에서는 신라 왕실의 성씨를 ‘모(募)씨’로 표시하였고, 진흥왕에 가서야 ‘금진흥(金眞興)’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한자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는 장수왕시대, 백제는 근초고왕시대, 신라는 진흥왕 때로 추정된다. 그리고 왕실의 성씨가 ‘고씨’ ‘여씨’ ‘김씨’를 썼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성씨가 많았다. 이런 왕족의 성씨 외에 보이는 성씨로는 고구려에서는 을·예·송목·간·주·마·손·동·채·연·명임·을지 등의 성씨가 보이며, 백제에서는 사·연·협·해·진·국·목·국 등의 8족과 왕·장·사마·수미·고개·흑치 등의 성씨가 보인다. 또한 신라에서는 박·석·김 3성 외에 이·최·정·손·배·벽 등 6부의 성과 장·비 등의 성씨가 보인다.

하지만 이것도 많이 쓰여진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주로 성을 쓴 사람은 중국과 왕래가 잦은 사신이나 유학자 등이다. 신라 말기 민란 주모자 대부분(원종, 극노, 기선, 양길)과 후고구려 궁예의 부장들(홍언, 명귀), 그리고 후백제의 부장들(관소, 상귀, 상달, 능환), 고려 태조를 포함하여 그 부장들(홍술, 백옥, 삼능산, 복사귀)은 대부분 성을 쓰지 않았다.
 

◇뿌리공원에는 한국족보박물관과 성씨별 조형물 등 자신의 뿌리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뿌리공원 제공

#성씨의 기원 2-성씨의 변화와 발전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성씨는 왕족이나 귀족층에서조차 사는 지역이나 씨족을 구분하기 위해 쓰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삼국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장수왕, 근초고왕, 진흥왕) 중국식 한자 성을 쓰게 되었다. 그 후 왕에 의해 사성을 받은 귀족층이나 중국과 왕래가 빈번했던 승려, 유학자, 무역상 등에서 중국식 한자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신라 말기까지 성씨를 사용하는 인구는 많지 않았고, 또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성을 개명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왕이 성을 바꾸어 사성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고구려·백제가 무너지고 200년도 안 되는 기간에 고구려나 백제의 성씨가 신라 말 민란 주모자의 이름이나 고려 건국과 관련된 인물들 사이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성씨를 쓰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기보다는 정치적 이유(나라 멸망)로 인해 다른 성씨로 개명했거나, 성씨를 버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려 초까지 성씨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정도로 소중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고려 초에 들어와서 성씨 제도에서 두 가지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고려 태조 왕건이 각 지역 토호들의 힘을 활용하는 전략으로 결혼과 사성을 행한 것이다. 왕건은 27명에 달하는 왕비를 두었고, 또 수많은 공신들과 토호들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성씨를 하사했다. 그에 따라 수많은 성씨와 본관들이 생겨났다. 예를 들면 홍술→홍유(일부에서 부계 홍씨의 시조라는 주장이 있으나, 정확하진 않다), 백옥→배현경(경주 배씨의 시조), 삼능산→신숭겸(평산 신씨의 시조), 복사귀→복지겸(면천 복씨의 시조) 등이 그것이다.

또 일부에서는 혼란기를 틈타 지방 토호들이 자신의 위세를 강화하기 위해 개명하기도 하고, 창명하기도 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심지어 태조 왕건은 천안(목천) 근처에서 자주 반란이 일어나자, 이들 지역 주민들에게 짐승과 관련한 성씨(우씨, 마씨, 축씨, 장씨 등)를 붙였다는 설도 전래되고 있다.

그 후 성씨는 고려 문종 때 들어와서 또 한 번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문종이 9년(1055년)에 성을 붙이지 않은 사람은 과거에서 급제를 할 수 없다는 법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천민이 아닌 일반 백성들도 성을 갖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고려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또는 중시조)로 하는 성씨들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고려는 물론 조선 초까지 향·부곡·소에 살고 있는 천인계급이나 노비 등은 성씨를 갖지 못했으며, 그 비율은 조선 초기에도 전체 인구의 40%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909년 법령반포와 일제강점기 신분제 폐지와 호적제도 확립으로 모든 사람이 성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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