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방송성공의 숨은 사연 (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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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방송성공의 숨은 사연 (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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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성공의 숨은 사연 (20회)

  제4장 정치격변과 고교야구중계




7호 스튜디오


그 무렵에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아나운서 혼자 기기(器機)를 조작하면서 뉴스와 음악 등을 방송했는데, 그날 5.16혁명을 알리는 첫 방송은 7호 스튜디오로 불리는 작은 방송실에서, 내가 뉴스를 진행하는 메인 마이크 앞에 앉고 송영규 아나운서가 보조 자리에서 턴테이블 행진곡을 걸어놓고 기계조작을 해주었다.


내 앞에는 박정희 장군이 꼿꼿이 서서 방송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김동하 장군, 이주일 장군과 함께, 김종필, 이석제 중령이 서 있었고, 내 뒤에는 정문순 중령, 이형주 중령이 작은 의자에 앉아 권총을 빼든 채 나를 감시했다.


타령에 이어 방송이 ON-AIR되어 애국가가 나가고, 그리고 5시 정각에 행진곡과 함께 5.16방송이 시작되었다. 나는 “........은인자중 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장도영.”으로 끝나는 혁명공약 방송을 같은 자리에서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일단 성공적으로 방송을 내보낸 뒤 나는 이석제 중령과 상의하여 혁명공약방송 사이사이에 다른 프로그램을 넣어가면서 방송을 계속했다. 이 중령이 청취자들을 너무 놀라게 하는 것은 좋지 않겠다고 해서 채근담(菜根譚) 등으로 엮은 ‘마음의 샘터’라는 10분짜리 프로그램을 그 긴박함 속에서도 천연덕스럽게 방송하기도 했다.


또 7시에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도 그대로 받아서 냈는데, 그때 미국의 소리에 가 있던 장기범 선배의 방송에서 혁명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대목이 나오자 즉각 중단하기도 했다.


방송 성공의 숨은 사연


그때 김종필(金鍾泌) 중령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지 않은 검정 양복차림이었는데, 한쪽 머리칼이 축 쳐져 내려 온데다가 손에 카빈총을 들고 군인들을 지휘하는 모습이 마치 영화에서 본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자 같았다 .


누군가가 김 중령이 서울대 사대를 다녔다는 귀띔을 해주어서 친근감이 느껴지는 참인데, 마침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5시 20분쯤이었다.


나는 그에게 “지금 이곳 남산 KBS방송국만 접수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연주소이고 방송이 발사되는 곳은 ‘연희송신소’라는 곳이다. 그곳에서 자크 하나를 빼든가 스위치를 내리면 방송은 되지 않는다. 그곳을 빨리 챙겨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해주었다.


김 중령은 그런 절차가 있느냐며 깜짝 놀랐고, 서둘러서 송신소로 군인들을 보내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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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7호 스튜디오 / 이 방에서 5.16방송을 했다 


그런데 연희동에 있는 송신소로 향한 군인들이 아현동 언덕을 넘어 신촌역 부근을 지날 때 5.16 첫 방송은 전파를 탔다. 연희송신소에 군인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혁명방송이 탈 없이 나간 것이다.


그날 연희송신소 담당 엔지니어는 서울대 동문으로 나와 인연이 많은 정용문 씨였는데, 그는 새벽에 방송 스위치를 올리고 나서 잠시 혼란에 빠졌다. 방송이 나오는데 이상했던 것이다.


난데없이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방송이 나오자, 그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들어 남산연주소로 연락을 해볼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시 들어보니 방송 아나운서는 전날부터 같이 숙직을 하는 ‘박종세’가 분명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박종세가 방송을 하는데 스위치를 내릴 수도 없고 해서 그대로 놔두었던 것이다.


만약에 생판 모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면 방송은 중단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가끔 정 회장과 만나 식사를 하면서 그때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다.  


혁명군은 방송국 접수계획을 세우면서 처음에는 혁명공약을 방송할 아나운서를 외부에서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일로 여러 의견이 오간 끝에 청취하는 국민들이 놀라지 않도록 당직 아나운서를 통해 자연스럽게 방송을 하자는 쪽이 우세해 결국 내가 마이크를 잡게 된 것인데, 결과적으로 방송국 당직을 택한 지혜가 혁명방송의 성공을 가져온 셈이 되었다.


기름통에 빠진 양복


그 당시 나는, 나에게 식은 땀을 줄줄 흐르게 했던 한영식, 임시현 두 엔지니어가 어떻게 그렇게 극적으로 방송국에 나타나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두 사람은 2층 주조정실에서 군인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 바로 뒷담을 넘어 필동 쪽으로 해서 명동까지 내달려 파출소에 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관들은 지금 KBS에 군인들이 쳐들어와 총을 쏘고 있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무슨 소리하느냐며 도무지 믿어주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방송 시간이 다가오자 책임 질 일이 생길 것 같아 조심조심 방송국 쪽으로 발길을 옮기다가 지금의 적십자사(赤十字社) 근방에서 자기들을 찾는 군인들을 만났고, 한 걸음에 방송국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그때 두 사람이 겁에 질려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면 혁명방송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혁명 방송을 모두 끝내고, 신분증을 넣어서 텔레타이프실 밖으로 내던진 양복 생각이 나서 가봤더니, 하필이면 텔레타이프용 기름통에 빠져있었다. 다행히 신분증은 건질 수 있었지만 양복은 세탁을 해도 기름이 빠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얘기를 들었는지 방송을 담당했던 이석제 중령이 나중에 양복을 몇 벌 보내주었고, 소문이 퍼지자 옛날 유신고속 사장을 지낸 박창원 장군도 양복 몇 벌을 보내주었다. 정황 중에도 고마워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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