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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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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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38회)
  제6장 멕시코 올림픽과 고교야구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1972년 지구별 초청 고교야구대회에서 군산상고는 강호 부산고와 결승에서 격돌했다. 3만 관중이 운집했고, 부산고와 군산상고의 재학생, 졸업생들이 응원전을 펼치는 가운데 명승부는 계속 됐다. 군산상고 송상복 투수는 안타를 계속 맞으면서도 완투했고, 부산고는 편기철과 조규표가 이어 던졌다. 안타는 부산고가 훨씬 많았다.

부산고가 4대 1로 앞서고 있던 9회 말에 기적(奇蹟)같은 일어났다. 김우근, 김일권, 양기탁, 김준환 선수의 선전으로 마침내 5대 4로 군산상고가 부산고를 물리치고 역전 우승을 거둔 것이다.

야구 불모지나 다름없던 호남지방의 창단 3년밖에 안 되는 군산상고가 전통의 명문팀 부산고에게 역전승을 거두고 우승을 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고, 이때부터 호남야구의 기둥들인 김봉연, 김성한 같은 대형 선수들이 계속 군산상고에서 배출되었다.

이 같은 결과가 나오자 동양방송과 군산 서해방송, 광주 전일방송의 제휴가, 중계방송을 통해 잠자던 호남야구를 위해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군산상고의 뒤를 이어 광주일고(光州一高)가 전국을 제패하며 돌풍을 일으킨 것도 세 방송의 제휴로 내 중계방송이 호남지역에 울려 퍼진 이후의 일이다.

그때까지는 서울과 인천, 그리고 대구와 부산의 교고교야구가 휩쓸고 있었고, 장태영으로 대표되는 영남야구가 김양중(金洋中)으로 대표되는 호남야구를 완전히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고교야구의 재기는 그야말로 우리나라 야구발전의 균형을 잡아준 역사적 의의를 갖는 일이었다. 

5.16민족상 수상

1972년에 나는 5.16민족상 사회부문상을 수상했다. 하루는 JP가 타워호텔로 불러서 갔더니 5.16민족상에 내가 추천되었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5.16 첫 방송을 비롯하여 그동안 방송에 기여한 공로와 대한뉴스, 국방뉴스 해설 그리고 야구중계방송을 통한 스포츠발전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서 5.16민족상 사회부문상을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큰 영광이었다. 민족의 이름으로 주는 큰 상을 받게 되는 나는 집사람과 함께 청와대로 초청되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상패와 상금을 받았다. 그곳에서 총재이신 박 대통령은 물론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김종필 이사장이 각별히 축하하고 격려해주었다. 특히 육영수 여사의 학처럼 단아하던 미소가 잊혀지지 않는다.

5.16민족상 수상자들은 각계에서 묵묵히 남모르게 일을 한 훌륭한 분들이었는데, 지금도 5월회라는 이름으로 가끔 만나 국가 사회를 위해 의욕적으로 봉사하던 때의 얘기를 나눈다.

5월회의 모임에는 회장이신 백제약품 김기운 회장, 전 회장 유준 박사, 김희오 장군, 안목단 여사, 이육주 여사, 김준 회장, 강길태 학장, 최덕수 선생, 김호욱 선생, 홍영근 선생 등이 주로 나오셔서 담소를 나누며 친목을 다진다.
 
 


▲ 5.16민족상을 받고 육영수 여사와

불광동으로의 이사

나는 1971년 말 옥인동에서 불광동으로 집을 옮겼다. 큰 아들 준수가 학교에 갈 나이가 가까워지면서 통학거리 등 교육환경을 우선으로 하여, 우리 같은 서민이 살기가 불편하지 않은 곳을 찾다보니 동네는 불광동으로 결론이 났고, 집사람이 다리품을 팔아 불광동 구석구석 헤멘 끝에 적당한 집을 찾아낸 것이다.

내자의 말을 빌자면, 언덕 위의 그림 같은 집이었다. 집 뒤쪽으로 가까운 곳에 사립학교인 은혜국민학교가 있어서 아이들 학교 보내기에도 걱정이 없을 듯싶었다. 과수원이었던 자리에 지는 ICA단층 가옥이었지만 102평이나 되는 대지에, 고운 잔디밭도 있고 백목련, 향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도 자라고 있어서, 내가 보기에도 다시 없이 좋은 집이었다.

계약을 하려고 찾아간 자리에서 집 주인이 나의 사범대학 선배인 이대영(李大榮) 교수인 것을 알고, 이 집이 나와 보통 인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대영 선배는 그때 집사람의 모교인 숙명여대에 재직 중이었는데, 그래서 우리는 묻고 살필 것도 없이 그대로 계약을 하고 그 자리에서 축배를 들었다.

그렇게 해서 불광동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한 가지 불편한 것은 서소문에 있는 동양방송으로 출퇴근하기가 좀 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홍두표 상무와 봉두완 위원이 갈현동에 살고 있어서 같이 출근하게 되어 출근 문제는 해결이 되었고, 밤 9시 “TBC석간(夕刊)‘ TV뉴스를 끝내고 나면 퇴근차가 대기하고 있어서 최근에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이후 불광동에서의 우리 가족의 생활은 순탄하게 지속이 되었다. 두 아들 중수와 증수는 나란히 은혜국민학교에 다녔는데, 뒷산에 나무가 우거져 자연과도 친해질 수 있었고, 학교 운동장에서 늦게까지 축구, 야구를 하며 체력을 단련했다.

아이들은 주말이면 통일로를 따라 대자리까지 가서 낚시도 하고 겨울이면 스케이트도 타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는데, 그 당시 큰 아들 친구들인 재철이, 재범이, 병아리 병상이, 대성이, 또 다른 준수 등이 지금도 자주 만나면서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 여간 대견하지가  않다.

로타리클럽 활동

이때 서대문 지역을 중심으로 로타리클럽이 탄생했다. 우리나라 외과의사의 대부격인 한격부 박사를 중심으로 박순원, 김갑준, 박기억, 채희병 선생 등이 모여서 서(西)서울 로타리클럽을 창립한 것이다. 나는 이 분들과 나이차가 많았지만 클럽 홍보에 적격이라는 이유로 내 뜻과는 상관없이 회원에 영입되었다.

나는 그렇게 서서울클럽에서 로타리활동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학교 선배들이 모여계신 청운(靑雲)로타리 클럽으로 자리를 옯겨 30년 넘게 봉사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서서울 클럽에서 활동을 하면서 나는 가끔 선배들을 따라 골프장에도 나갔다. 한격부 박사는 한양CC, 박순원 회장님은 뉴코리아CC, KC 김갑준 회장님은 용인CC를 주로 다니셨는데, 특히 박순원 회장님은 나와 용모가 비슷한데다가 자주 나를 데리고 뉴코리아CC에 나타나서 그곳에서는 우리 두 사람이 부자(父子)지간으로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박 회장님은 내 고향과 가까운 개성 분으로, 유명한 판사였던 박천식 변호사의 아버님이시다.

내가 옮겨온 청운로타리클럽은 경복고 대선배들이 주를 이루고 게신 클럽이다. 선배님들은 만나 뵐 때마다 늘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나는 이곳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와 상식을 얻을 때가 많았다.

지금 청운로타리클럽은 현제(玄齊) 박승서(朴承緖)회장님을 비롯해서 왕황철, 김홍준, 김병천, 전동수, 이해원, 김진억, 신훈철, 이종억 선배님, 그리고 선우천, 조재진, 이충구, 김형상 동문 등이 가족처럼 존경과 우정을 나누며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주회(週會)가 시작되고 로타리 노래와 동요를 소리 높여 부르시는 선배님들을 뵐 때마다 티없이 맑은 모습에 만수무강 하시기를 저절로 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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