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제1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43회) 제7장 골프와 방송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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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제1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43회) 제7장 골프와 방송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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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43회)

  제7장 골프와 방송중계




제1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이 해 1975년에는 서울에서 벌어진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가 또 한 번 우승을 차지했다. 


우리나라 대표선수로는 투수에 김호중, 강용수, 이선희, 포수에 우용득, 박해종, 내야수에 김봉연, 김재박, 강병철, 외야수에 김우열, 윤동균, 이해창, 김차열 선수 등이 출전했다. 


일본 팀은 대학선발이 주축인, 비교적 약체로 결승에서 우리와 만나 0대 0으로 비기는 바람에 승점이 많은 우리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과 싸울 때는 아슬아슬하게 극적인 요소가 가미되어야 중계방송도 신이 나는데, 서로 점수를 내지 못해 다소 맥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우승을 해서 야구 붐을 이어가는 데는 일조(一助)를 한 대회였다. 


대륙칸컵 세계 야구선수권대회


같은 해 가을에는 제2회 대륙칸컵 세계 야구선수권대회가 캐나다의 ‘몬트리올’과 ‘멍톤’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참가하게 되어 나는 중계방송을 위해 KBS의 이규항(李圭恒) 아나운서와 함께 캐나다로 향했다. 


우리는 미국 LA로 가서 에어캐나다로 갈아타고, 캐나다의 토론토를 거쳐 몬트리올에 도착했는데, 선수단은 아시아야구 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멤버에 함학수 선수와 박영길 선수가 추가되었디. 


영어보다는 불어를 먼저 하는 몬트리올에서 선수단과 합류한 중계방송단은 캐나다의 동쪽 끝에 있는 뉴브룬스위크 주의 멍톤으로 향했다. 


지방을 수도나 대도시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는 캐나다 당국은, 지방도시 멍톤에서 경기 전반을 치르고, 후반은 대도시인 몬트리올에서 마무리하기로 스케줄을 짜놓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그 먼 거리를 번거롭게 오가면서 대회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캐나다 동쪽 끝에 있는 작은 항구도시 멍톤을 그때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의 ‘마그네틱힐’이라는 언덕에서, 크고 힘이 좋은 자철석(磁鐵石) 때문에 자동차가 저절로 언덕으로 끌어올려지는 희한한 체험을 할 수 있었는데, 제주도의 착시(錯視)에 의한 자동차 움직임과는 확연히 다른 성격이었다. 또 세계의 가장 깨끗한 바다 중의 하나인 멍톤에서 잡힌 바다가제(Lobster)는 어찌나 크고 맛이 있었는지 대단한 맛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몬트리얼 엑스포스’ 팀의 홈구장


대회에서 우리나라의 성적은 신통치 못했지만, 콜럼비아와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마지막 날에는 니카라과를 이겨 4위를 기록, 그런대로 체면을 세웠다. 우리 중계방송도 지는 게임이 상대적으로 많아 별로 신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기는 경기를 중계할 때는 덩달아 힘이 솟았다. 


우리 팀이 마지막으로 이긴 경기가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바람에, 프로야구 ‘몬트리올 엑스포스’ 팀의 홈구장에서 중계방송을 할 수 있었는데, 6만 관중을 수용할 정도로 거대한 구장이 예쁘고 멋있게 꾸며져 있어서 부럽기 한량없었다. 


최종 결승은 역시 세계 야구의 강호 미국과 일본이 격돌했는데, 8대 0이라는 큰 점수 차로 미국이 이겨서 동서양의 벽을 실감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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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기명 위원과 중계방송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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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의 멍톤에서 이규항 아나운서와


몬트리올에서 만난 옛 친구


당시 우리나라에는 달러가 귀할 때여서 많은 돈을 가지고 나가지 못했는데, 우리 팀 단장인 한국화장품 임광정(林光廷) 사장이 신경을 써주어 이규항 아나운서와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중계방송을 마칠 수 있었다. 


이때 나는 귀한 친구를 몬트리올에서 만났다. 6.25가 끝나갈 무렵 우리가 누하동 피난 집에서 어렵게 살고 있을 때 이웃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김두홍(金斗弘)군을 만난 것이다. 


그 무렵에 나는 옥인동에 있던 미 서울지구사령부(SAC)에서, 김군 은 용산에 있는 미 8군사령부에서 근무를 했는데, 우리는 야간에 같이 동대문에 있는 동부훈육소(덕수상고)에 다니는 등,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주 만나 장래 얘기도 진지하게 나누던 사이였다. 


그 후 나는 모교인 경복고로 복교를 했는데, 영어를 빼어나게 잘했던 김두홍 군은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우라늄 광산회사에 취직, 실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중계방송을 위해 몬트리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 군은 자동차에 가족을 모두 태우고 수도인 오타와에서 몬트리올까지 꼬박 달려 나를 만나러왔다. 반갑게 만난 우리는 하루 종일 ‘몬트리얼’ 시내관광을 하고 식사도 하면서 회포를 풀었다. 


김군 가족은 오타와로 떠나고 나는 몬트리올에서 기차에 올라, 끝없이 펼쳐지는 울창한 삼림(森林), 호수(湖水) 그리고 머리를 깎은 것처럼 개간한 넓은 옥수수 밭과 밀밭을 바라보면서, 먼 길을 달려 토론토에 도착했다.  


토론토에서는 나와 아나운서 동기로, 치과의사로 성공한 임동순(任東淳) 군과 만나 그의 집에 묵으며, 골프도 치고, 술도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군산상고 4년 만에 우승


나의 야구중계방송이 무르익었다는 평가를 받던 1976년, 고교야구에서는 군산상고가 1971년에 우승한 이후 4년 만에 다시 한 번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결승전에서 군산상고와 격돌한 팀은 대구상고로, 두 팀은 피를 말리는 투수전 끝에 1대 0으로 군산상고가 승리를 했다. 애 결승전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누구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던, 역대 교교야구 최고의 투수전으로ㅠ 기록될만한 멋진 한판이었다. 


군산상고의 투수는 김용남, 대구상고의 투수는 김시진이었는데, 이 대회에서는 이들 외에 광주일고의 이상윤 투수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서해방송을 통한 나의 중계방송도 자연스럽게 이들의 투수전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불을 뿜었다. 


이때 서울에서는 신일고와 충암고가 한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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